[스페셜1]
18년간 고민한 나를 버리는 방법
2015-09-03
글 : 이예지
사진 : 백종헌
<암살> 김홍파

영화 <검사외전>(2015) <널 기다리며>(2015) <내부자들>(2015) <대호>(2015) <암살>(2015) <악인은 살아 있다>(2014) <신의 한 수>(2014) <방황하는 칼날>(2013) <고스톱살인>(2013) <남자가 사랑할 때>(2013) <더 테러 라이브>(2013) <신세계>(2012) <남쪽으로 튀어>(2012) <박수건달>(2012)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베스트셀러>(2010) <취화선>(2002) <와니와 준하>(2001) <미지왕>(1996)

<암살>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얼굴, 김구 선생이 등장했을 때 객석에서 짧은 탄성이 들렸다. 대사로 설명되기 전, 그가 김구임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인자하면서도 강단 있는 생김새, 둥근 안경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구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김구’를 연기한 이 배우가 <더 테러 라이브>의 ‘주진철 경찰청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능하면서도 권위만 앞세워 관객의 분노를 치솟게 한 주진철 경찰청장을 떠올리면, 여기서 <신세계>에서 폭력으로 자본을 굴리는 골드문 김 이사,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조폭과 유착된 국가안전기획부 엄 실장을 연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위인 김구에서 악역들까지 넘나든 주인공은 배우 김홍파. 그는 “비리 공무원 전담 배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번에 김구를 연기해 관객에게 용서를 받은 것 같다. (웃음)”며 운을 뗐다.

김홍파가 선악을 아우르며 실존 인물부터 가상의 인물까지 폭넓게 연기할 수 있는 비결은 “그 배역이 되어서 호흡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비우고 그 사람이 되어서 삶을 살아가야 연기가 된다”는 그의 연기론은 1991년 입단한 극단 목화의 오태석 연출가의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어느 날 내 연기를 보고 오태석 연출가가 ‘왜 김홍파가 보이냐’며 화를 내더라. 연기를 하는데 인간 김홍파의 모습이 보이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 아니겠나. 18년간 나를 버리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해답을 의외의 곳에서 찾았다. “놀이터에서 역할극을 하면서 노는 아이들을 보며 불현듯 깨달았다. 아이들처럼 욕심을 버리고 해맑아져야 한다는 것. 그 뒤로는 배우로서 알려지고 싶은 욕망을 버리고, 연기의 이유를 또 다른 삶을 사는 재미에서만 찾았다.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배역은 없다는 생각을 한 거지. 무대와 현장을 아이들의 놀이터처럼 여기려 했다.”

연기에 대한 해답을 얻었을 무렵, 그는 <베스트셀러>의 단역을 제안받아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더 테러 라이브> 등에서 권력 유착형 악역을 맡았고, 주연으로 나선 <고스톱살인>과 <악인은 살아 있다>에선 악 그 자체가 됐다.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 이전에, 시나리오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텍스트의 세계와 그 관계망 속의 배역을 파악한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삶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겠나. 그것을 이해하고 그 인물이 되어 살아가는 거다.” 이런 방법론으로 캐릭터에 접근하는 그는 가상의 인물에는 레퍼런스를 차용하기도 했다. “연기 외적으로는 풍자의 의도도 지닌다. <더 테러 라이브>의 주진철은 모 경찰청장을 모델로 했다. 그 인물이 되면, 관객은 내가 응징당할 때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지 않나. 관객이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면 오히려 기분이 좋다.”

풍자형 악역들을 자처해온 그가 위인 김구를 맡았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제안을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위인의 삶을 산다는 건 너무나 큰일 아닌가. 하지만 여태까지 풍자해 전하던 메시지를 직구로 던질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이후 그는 김구가 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이미지다. 김구는 국민들 가슴속에 새겨진 이미지가 있다. 감독과 사진을 찍으며 이미지를 찾아갔다. 김구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틀니를 꼈는데, 낯설어지지 않기 위해 촬영하지 않을 때도 항상 끼고 살았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김구가 보이더라.” 마침내 김구가 된 그는, 촬영이 끝나고 나서는 역할에서 빠져나오며 호된 몸살을 앓았다. 다행히 개봉을 앞둔 다른 작품에서는 힘을 빼는 것이 가능했다. “개봉을 앞둔 <대호>에서는 소탈하고 인간적인 약재상 역을 맡았다. 연기 인생 처음으로 실제 내 모습과 비슷해 휴식 같은 캐릭터였다. 몰입하기도 편했다. 살다보니 실제 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도 되는 역을 맡기도 하더라”라며 웃었다. 배역을 통해 천 가지 인생을 사는 배우 김홍파가 다음엔 또 어떤 인물의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해진다.

<암살>

내가 꼽은 나의 매직아워

가장 가슴에 남는 한순간은 <암살>에서 김구가 염석진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장면이다. 김구는 이 신에서 “염석진이 상해에서 영사관 사사키를 만나면 확실한 밀정이다. 확실한 밀정이면 죽이라”고 단호하게 명령한다. 김구가 가장 김구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중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자한 모습은 해방 후 연세가 든 모습이다. 하지만 젊었을 때의 김구는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강단있는 성격이었다. 당시의 김구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고, 이 장면에서 김구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 늘 배역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이 연기의 큰 기쁨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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