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무대가 있는 곳에 사람과 함께 간다
2016-02-11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사진 : 백종헌
창단 30주년 맞은 연희단거리패의 자취를 돌아보며
이윤택, 오달수(왼쪽부터)

연희단거리패 주요 작품

1986 <푸가> 1986 <히바쿠샤> 1987 <산씻김> 1988 <심판> 1989 <시민K> 1990 <오구> 1991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1992 <세월이 좋다> 1993 <바보각시> 1995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1996 <햄릿> 1998 <느낌, 극락같은> 1999 <로빈슨과 크루소> 2000 <일식> 2001 <시골선비 조남명> 2002 <하녀들> 2003 <초혼> 2004 <리어왕> 2005 <오월의 신부> 2006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외 다수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올해로 창단 30주년을 맞았다. 이윤택 연출가가 1986년 부산 가마골 소극장의 문을 열며 극단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게 그 시작이었다. 부산을 거점 삼아 <푸가> <히바쿠샤> <산씻김> <시민K> 등을 선보이며 실험 극단으로서 그 이름을 알려나갔고 부산뿐 아니라 서울 대학로 연극 무대를 오갔으며 마침내 1990년 5월 <오구>를 통해 한국연극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연극평론가 김방옥은 당시 <오구>를 보고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 이후 한국적 코미디극의 최대 수확”이라고 평했다. 1990년 도쿄국제연극제, 1991년 독일세계연극제에 한국 대표작으로 참가하는 등 그야말로 연희단거리패라는 이름을 국내외적으로 각인시킨 시발점이다. 1999년에는 경남 밀양에 밀양연극촌을 만들며 연극을 꿈꾸는 이들의 해방구가 되기도 했다. 서울 집중형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하며 ‘오직 연극’만을 향해가는 이들의 거침없는 행보를 어찌 소홀히 볼 수 있을까. 경계를 모르는 전천후적 연극 활동은 흡사 게릴라 운동을 방불케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의 연극은 ‘한국적인 것’을 섣불리 신성시하지 않되 전통 서사를 뒤집어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과감한 시도를 이어왔다. 생전에 시인 기형도는 연출가 이윤택의 이름 앞에 ‘문화 무정부주의자’라는 말을 붙였고, 언론계는 그를 ‘문화 게릴라’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 수식이 곧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그 확고한 뿌리에서 뻗어나온 이들이 오달수, 김소희, 곽도원, 이희준, 조영진, 김경익 등 한국연극계와 영화계를 떠받치는 배우들이다. 전방위적인 활동으로 한국 대중문화사의 지반을 다져오며 한국영화계에도 자극을 줘온 연희단거리패의 30주년을 축하하며 <씨네21>이 그들을 만났다. 연희단거리패 창립의 주역이자 현재 극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연출가 이윤택과 부산 가마골 소극장 시절을 함께 보낸 배우 오달수가 한자리에 앉았다. 연희단거리패의 서울 거점인 대학로 게릴라 극장에서 연희단거리패 30주년이라는 좋은 핑곗거리로 회포를 풀어낸 스승과 제자, 연극적 동지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옮긴다. 이어서 현재 연희단거리패가 준비 중인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의 연습 현장을 지켜봤고, 마지막으로 연희단거리패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어온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동지들이 보낸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이윤택

<씨네 21>_두분은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첫 인연을 맺은 뒤 현재까지도 틈날 때마다 함께 연극 작업을 하는 걸로 안다.

오달수_20대 시절 부산에 살 때 공연 인쇄물 배달을 하며 가마골 소극장을 들락날락했다. 그 공동체가 매력이 있으니까 계속 간 거다. 어쩌다 밥때에 배달을 가면 찜통 한가득 밥과 국을 해서 이윤택 선생님과 말단 단원들이 빙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럼 내게 “밥 한 그릇 먹고 가라”고 말을 거시고 먹고 그냥 가기 미안해 설거지라도 하고 오는. 그 시절에는 좋은 의미의 남루함, 아름다운 나눔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에 들어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대에서 다 같이 밥을 먹었는데 금세 그 무대에서 공연이 열리니. 무대라는 곳이 얼마나 신기한가. 매력덩어리였다.

이윤택_충동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만이 배우가 된다는 게 내 확신이다. 사람들의 충동을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데 내가 또 선수고. “연극해볼래?”라고 툭 던졌을 때 용기 있는 사람은 연극을 한다. 내 말에 쑥 들어온 사람이 바로 오달수다. 오달수가 <오구>의 문상객1 역으로 처음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땐 연기를 너무 못했다. 내가 얘기라도 하려고 하면 얼굴이 벌게지고…. (웃음)

오달수_정말 죽고 싶었다. <오구>는 한번 무대에 오르면 연극 끝까지 퇴장이 없다. 앉아만 있는 역할이라도 뭔가 계속 연기를 해야 했다. 대사 없이 가만히 있는다는 게 정말 어렵더라. 그때 얻은 자산이 어마어마하다. 연기 학교를 안 다닌 나는 그렇게 이윤택 선생님을 통해 연극을 접했다.

오달수

이윤택_오달수 연기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본 게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공연한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오영진 작)에서의 이중생 역이었다. 지금의 오달수 연기의 기본이 만들어진 때라 말하겠다. 나도 전심전력을 다해 연기 지도를 했고 한국적 희극 연기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오달수 얼굴에 하회탈을 그려넣고 어깨, 눈짓, 발짓까지 하나하나 지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면도날을 가지고 노는 마지막 7분여간의 오달수의 연기는 꼭 봐야 한다. 이후 이승헌, 정진각 등의 배우들이 이중생 역을 연기했지만 감히 말하면 오달수의 이중생이 최고였다. 연희단거리패 30주년을 기념해서 다시 한번 서울에서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하자고 오달수한테 말했다. 작고하신 배삼룡 선생께서 <눈물의 여왕>(1998)에 출연할 때 달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니마이’ 배우들의 생명은 짧지만 희극 배우는 죽을 때까지 간다. 달수는 좋은 희극 배우가 될 것이다.” 얼굴의 표정이 살아 있고 리액션 연기를 아주 잘하는 배우가 오달수다. 오달수의 또 다른 진면목이 있다. 1990년대 초•중반 내가 상경해 우리극연구소를 세우고 단원들을 받아 지도하고, 일본과 미국 등을 오가며 공연할 때 정작 가마골 소극장을 지킨 사람이 오달수다. 후배들과 같이 밥해먹으며 작업해 완성한 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작)였다. 그 작품을 보는데 ‘아, 저것은 내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오달수 스스로가 개척한 연기다’ 싶더라. 또 오달수와 박성철 두 배우가 2인극을 했는데 관객이 딱 2명 들었다. 지금의 오달수가 아니던 시절이다. 그렇게 힘든데도 고향 극장을 지킨 연희단거리패의 선배가 오달수다. 오늘에서야 말하는데,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오달수_선생님께서 ‘지킨다’는 표현을 쓰셨지만 세계적인 연출가인 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아무리 깽판으로 연기를 해도 선생님께서 돌아와 가르쳐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연기를 어디서 배워야 하나, 미래는 어떻게 될까로 상당히 불안했을 거다. 지금도 열정적으로 연극 작업을 하시지만 30년 전 선생님은 훨씬 더 에너지가 넘치셨다. <바보각시> 때 잊지 못할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바보 역을 하다 보니 늘 해맑아야 한다고 생각해 계속 웃었다. 근데 그 모습이 마치 쥐어짜는 듯 보이셨나 보다. 조용히 불러, “달수야, 웃기 싫으면 웃지 마라”, 딱 한마디 하셨다. 지금까지 내 연기 인생의 화두가 된 말이다. 연기를 처음 하던 때 외형적으로만 표현하려고 노력했지 정작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감정들을 몰랐던 거다. 역시 연출가는 사람을 다루는 예술가라는 걸 알았다.

<오구>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이성적인 연기로

<씨네21>_연희단거리패는 제의(祭儀)를 통해 한국적 희극의 새 전형을 보여준 <오구>, 조선 초의 과학자 장영실의 자취를 좇아가며 민중을 주체적 위치에 둔 <궁리>, 유교적 영웅주의와는 정반대로 서민적 정서의 해석을 덧입힌 <적벽가> 등 한국적 이야기의 재해석을 시도해왔다. 연희단거리패 연극의 정체성, 색깔에 대해서 좀더 듣고 싶다.

이윤택_한국적인 인식이라는 게 있다. 예컨대 복수 개념을 두고, 일본은 시간이 흘러도 반드시 복수한다면 한국은 세월 지나면 잊어버리고 만나서 풀어버리는 식이다. 언어의 리듬도 이박자가 아닌 삼박자다. ‘아이고!’가 아니라 ‘아~이고~’ 하는. 우리의 가락, 고저장단 등을 고려하는 게 한국적 연극이다. 극단 목화, 미추, 아리랑 등 한국적인 연극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온 극단과 그곳 출신 배우들의 생명이 긴 이유다. 또 연희단거리패는 인간성과 사회와의 관계, 사회성 강한 작품을 해왔다. 하지만 운동권 극단은 아니다. 대단히 이지적이고 이성적인 연극이다. <산씻김>을 보면 어찌나 깔끔한지 놀라울 정도다. 뜨거울 것 같아도 차갑고 단정한 연기를 지향한다. 연희단거리패의 메소드 연기다. 연희단거리패 출신 배우들을 보면 감정적이지는 않되 차갑고 강하게 감정을 보여준다. 오달수 연기도 굉장히 차분하고 냉정하며 군더더기가 없다. 연희단거리패의 희극 연기의 대표가 오달수라면, 눈물 흘리지 않는 이지적이며 강력한 비극 연기의 대표가 김소희다.

오달수_이윤택 선생님을 따라 일본, 독일 등에서 공연할 때마다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한국적 음악과 춤을 활용한 <햄릿>만 봐도 그렇다. 선생님의 연출의 힘에 놀라기도 했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의 극중 이중생의 나이가 60살이 넘은 노인이다. 그걸 24, 25살이던 내가 연기했으니 얼마나 부족한 게 많았겠나. 세상을 보는 눈이 채 떠지기도 전인데. 선생님께서 하회탈을 그려주시거나 해서 배우의 단점을 다 막아주셨다. 관객이 전혀 인물에 이질감을 못 느끼게끔 하신 거다.

이윤택_그게 연극의 힘이다. 간혹 영화에서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을 하고 나오는데 분장을 심하게 해 얼굴 근육이 안 움직여 표정을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연극의 리얼리티는 분장은 대충 하되 연기로 60대의 역할을 보여주는 데 있다. 연기만 제대로 된다면 나이를 초월할 수 있는 게 연극이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 연기에 삶이 묻어나는 건 있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씨네21>_19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가 성장하면서 연극배우들이 영화계로 상당히 많이 진입했다. 연희단거리패 출신 배우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극단 차이무의 명계남, 강신일, 박원상, 이성민, 극단 목화의 손병호, 유해진, 박희순, 극단 골목길의 박해일, 윤제문, 장진이 이끈 공연기획집단 수다의 정재영, 임원희 등을 비롯하여 송강호와 김윤석까지, 한국영화계가 연극계에 입은 수혜가 상당했으나 반대로 연극계에도 긍정적인 일이었을까 싶다.

이윤택_시나리오작가로 일을 시작했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영화와 연극배우가 따로 있었다. 두 영역을 오가는 배우들이 생긴 건 아주 좋은 현상이다. 송강호, 김윤석도 연극판에서 10년여씩 고생한 사람들이다.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먼, 케이트 블란쳇 등 미국, 유럽의 명배우들도 영화와 연극을 오간다. <오구>를 영화화할 때 촬영현장이 정말 힘들었지만 인상적이었던 게 있다. 어린 스탭들이 고생하면서도 밤새 철학적인 영화 이야기를 나누더라. 한국영화계의 잠재력이 무한하다는 걸 느꼈다. 현재 한국 영화배우들의 연기도 상당히 좋다. 이걸 잘 끌어와 영화와 연극이 조우하면 좋겠다. 연극배우들이 영화 작업을 하면 한국영화가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고, 영화배우들이 연극을 하면 연극이 좀더 대접받지 않을까. 2000년부터 극단 신기루만화경을 운영하는 오달수가 그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달수, 송강호, 김윤석과 같은 좋은 배우들이 연극을 꾸준히 하길 바란다. 상업영화로는 한국이 세계 정상급의 수준이지만 예술영화로서의 깊이를 더하려면 연극, 문학, 미술과 영화인들이 좀더 연결돼 있어야 한다.

오달수_연기자는 연기자다. 카메라 앞이든 무대의 관객 앞이든 배우일 뿐이다. 근데 요즘 내게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내 연기의 장점이자 단점은 연기에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연기에 애가 나 어떻게든 연기를 잘해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연극 무대는 필(feel) 받으면 쭉 가는 거지만 영화는 테이크가 있잖나. 내가 어릴 때는 영화감독님들이 ‘오케이’ 사인을 다 내줬다. 근데 요즘은 나보다 어린 감독들이 많다 보니 자꾸 내게 묻는다. “저는 좋은데 선배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 무조건 감독님이 오케이면 오케이던 내가 요즘은 감독님들이 예의상 물어봐주면 “그럼 한번 더 가볼까요?”라는 말을 하게 되더라. 이 변화에 스스로 깜짝 놀란다. (웃음)

이윤택_달수 말대로 영화와 연극 연기의 차이는 없다. 단, 활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연극은 카메라가 없다 보니 배우 자체가 카메라가 돼야 한다. 영화는 그 거리감을 카메라가 조절하지만 연극은 배우가 숨, 표정으로 조절한다. 연극배우가 영화는 해도 연극 안 해본 영화배우가 연극을 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현장에 연극 연출가를 액팅 코치로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오달수_선생님 말씀은 정말 생각해볼 만하다. 영화 촬영장에서 연기를 전적으로 배우에게만 맡겨두는 상황이니까. 반면에 연출은 정말 역량이 안 된다. 딱 한번, 연희단거리패에 있을 때 단원들 훈련용으로 <쓰레기들>을 연출한 적이 있다. 연습 끝나고 으레 단원들이 있겠다 싶은 단골 술집에 들렀는데 아무도 없더라. 이상해서 보니까 다들 신발을 숨기고 날 따돌렸다. ‘아, 나는 연출하면 안 되는구나. 남한테 상처나 주고 나도 상처받고.’ 능력도 안 됐다. 외로워서 연극을 시작했는데 스스로 더 외로워지는 무덤을 파고 있었다.

<바보각시>

무대가 그립다면 언제든 오라

<씨네21>_<문제적 인간 연산> <혜경궁 홍씨> <길 떠나는 가족> 등으로 명동예술극장, 극립극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중대극장 공연에 이어 올해 <바냐아저씨> <방바닥 긁는 남자> 등으로 소극장 복귀를 선언했다. 문화 게릴라로서의 전방위적 연극이 계속되고 있는 셈인데.

이윤택_내가 더이상 게릴라일 수 있을까. 아무런 새로움도 없이 그저 늙어버린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까. 나이 든 이들이 박대받는 세상이고 젊은이들 위주로 문화가 흘러가니. 여전히 젊은이들의 풍토에 밀리지 않는다면 문화 게릴라라는 말이 가능할 것이다. 연극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나는 한국 문화의 지나친 서울 집중이 못마땅했다. 서울은 2008년부터 연희단거리패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소희에게 맡기고 나는 7월부터는 가마골 소극장을 지키러 부산 기장으로 간다. 서울은 결국 사람을 소모시키고 폐기하는 곳이다. 하지만 문화의 중심인 서울을 등질 수는 없다. 서울과 지역을 오가는 것도 게릴라성이 아니겠나.

오달수_극단을 운영하면서 자연히 몸담았던 연희단거리패의 미덕을 가져오게 됐다. 연희단거리패의 세 가지 규칙이 있다. ‘약속시간 엄수, 상호비방 금지, 지금은 크게 완화된 걸로 아는데 연애 금지.’ 세 번째 항목만 ‘알아서 해라’라고 했다. 스승의 좋은 정신을 가져왔다.

이윤택_당시 극단원들이 연애를 하도 해 연극이 안 될 정도라 연애를 금지시켰는데 몰상식한 짓이었다. 요새는 연애 권장이다. (웃음)

이윤택, 오달수(왼쪽부터)

<씨네21>_연희단거리패로 시작한 오달수는 이제 ‘천만 요정’이라는 수식이 붙는 흥행 배우가 됐다. 이윤택 연출가도 연희단거리패 후배들도 모두 뿌듯해하는 눈치다. 오달수가 선택하는 작품의 기준이라는 게 뭘까 궁금해진다.

오달수_제일 먼저 보는 건 감독의 퀄리티다. 두 번째는 시나리오의 재미다.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가, 안 생기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나를 견인해줄 동료 배우가 누구인가다. 감독의 퀄리티라는 건 꼭 필모그래피의 많고 적음은 아니다. 3월 개봉예정인 <대배우>는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석민우 감독의 데뷔작인데 박 감독님께 그간 얼마나 많이 배웠겠나.

이윤택_연출가의 퀄리티라는 건 연출의 성향, 작업 분위기와도 같은 말이다. 배우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시키는 연출을 만나야 한다. 그 기준은 영화든 연극이든 동일하다. 그걸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데가 연희단거리패다. (좌중 웃음) 좋은 영화배우들은 자신의 트레이닝을 위해서라도 연극을 한다. 신기루만화경에서든 연희단거리패에서든 연극을 계속 하라.

오달수_내가 연기자가 될 운명이었다면 연희단거리패를 만난 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연희단거리패를 못 만났다면 이상하고 연기 못하는 배우가 됐을 거다. 오늘 2시간여 동안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자니 또 마음에 담아가는 게 생긴다. 이 힘으로 또 오래도록 연기하며 가겠다. 막상 극단 안에 있는 식구들은 이 집단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걸 꼭 알아주길 바란다.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과 함께 무대를 만들면 좋겠다. 신기루만화경 후배들과도 올해 극단 부흥에 나서보려고 한다.

이윤택_연희단거리패가 배우를 길러내는 학교, 모태 역할을 했다는 데 뿌듯함이 있다. 오달수가 그 첫 번째에 서 있다. 연희단거리패에서 연극을 시작했다는 그 뿌리를 가지고 평생 잘 살아가면 되는 거다. 혹시나 심심하면, 무대가 그리울 때면 언제든 오라. 작품은 준비돼 있다. 이것이 곧 연희단거리패의 30주년이다.

연희단거리패의 서른 생일을 축하하며

박근형

연극 연출가 겸 극단 골목길 대표 박근형

“이윤택 선생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연극에 쏟아부어온 분이다. 제약은 헤쳐나가고, 없으면 새로이 만들어내는 몸과 정신의 야전성이란. 그것이 곧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정신이다. 또 ‘게릴라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밀양연극촌에서 연극 연습을 할 때 보면 공연하고 뒷정리까지 끝낸 새벽 2시에 다음날 공연 연습을 시작하는 에너지는 정말 대단하다. 매년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열어 지역민과 더불어 연극 공연을 올리는 것 역시도 연극의 축제성을 그대로 살리는 방편이다. 훌륭한 리더인 이윤택 선생뿐 아니라 극단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간급 리더들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도 놀랍다. 이들이 끊임없이 재목이 될 신진 배우들을 발굴하고 있으니 연희단거리패의 앞날이 창창할 수밖에.”

장진

장진 감독

“극작가인 윤대성 선생님과 더불어 이윤택 선생님은 내 스승이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복학해서 교내 교지에 타데우스 칸토르의 <죽음의 교실>을 재구성한 <허재비놀이>에 관한 리뷰 등을 썼다. 그걸 이윤택 선생님께서 눈여겨봐주셨다. 이후 1995년 우리극연구소에서 신예 작가, 연출가 발굴을 위해 진행한 ‘제1회 젊은 작가를 찾아서’로 <허탕>을 발표해 연출까지 하게 됐다. 지방에서 연극을 시작해 중앙인 서울의 연극 무대로 들어가는 연희단거리패의 행보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연극 동영상을 사운드 없이 봐도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임을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자기 앙상블, 자기만의 메소드가 분명한 집단이다. 한국적 정서를 말하되 대중성에 야합하지 않고 당대에 필요한 외침들을 선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꾸준히 해왔다. 늘 마음속에서 바라보는 곳이 이윤택 선생님과 연희단거리패다.”

이희준

연희단거리패 9기 배우 이희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하기 전인 2002년 무렵 서울에서 진행된 한 연기 워크숍에서 처음으로 이윤택 선생님을 뵀다. 내가 연극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선생님께서 ‘연극이 그렇게 좋니? 하루 종일 연극을 하게 해주겠다’며 알려주신 곳이 연희단거리패가 만든 밀양연극촌 워크숍이다. 8개월여 동안 정말 마음껏 연극만 했다. 수도승처럼. <오이디푸스>의 오이디푸스 역을 맡아 야외 무대에서 연기할 때였다. 동네 어르신들이 ‘아이고, 자를 우짜노~’라며 나를 붙잡고 안타까워하시는데 정말 무아지경에 빠졌다. 하루 3시간 남짓 자고 연습하고 연기했던 그 시절만큼 카타르시스를 느낀 적이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해 그곳을 떠났지만 그때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연기와 연극을 신성하게 여기게 할 만큼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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