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상범, 류승완, 류성희, 정서경, 오달수가 박찬욱 감독과 나눈 거침없는 대화
2016-04-26
진행 : 주성철
진행 : 이화정
진행 : 김성훈
정리 : 김수빈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류성희 미술감독, 오달수 배우, 박찬욱 감독, 김상범 편집감독, 류승완 감독, 정서경 작가(왼쪽부터).

류성희 미술감독

미국영화연구소(AFI) 유학 후 <꽃섬>으로 미술감독 생활을 시작해 <피도 눈물도 없이>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를 연달아 작업하며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미술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박찬욱 감독과는 <친절한 금자씨>(미술감독 조화성)와 <스토커>만 제외하고 <아가씨>까지 쭉 함께해오고 있다. 최근작은 <국제시장>과 <암살>.

오달수 배우

박찬욱 감독과는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로 조우한 뒤, <올드보이>에서 감금방의 이상한 남자 철웅을 연기하며 혜성처럼 충무로에 등장했다. 이후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등 박찬욱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됐다.

김상범 편집감독

오래전 연출을 준비하던 김상범 편집감독의 연출부로 대학생 박찬욱이 참여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의 부친인 고 김희수 편집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인 <달은… 해가 꾸는 꿈>을 편집한 인연도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시작으로 <스토커>를 제외하고는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박찬욱의 모든 영화를 편집했다.

류승완 감독

영화잡지 <스크린>에 실리던 박찬욱의 글을 좋아했고, 그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도 좋아하여 무작정 그를 찾아가 연출부를 청해 지금에 이르렀다. 미완성작 <야간비행>과 <3인조>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친절한 금자씨>에는 카메오 출연했다. 현재 <군함도> 촬영 준비 중.

정서경 작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나리오 전공. <모두들, 괜찮아요?>(감독 남선호, 2006)로 충무로에 데뷔했다.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감독의 믿음직한 ‘전속’ 작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씨네21>은 지난해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배우 송강호 별책부록을 제작하며 그와 2편 이상 작품을 함께한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한재림 감독을 초청해 우정 대담을 진행했다. 올해의 주인공은 바로 신작 <아가씨>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이다. 그를 위해 오랜 친구이자 동반자인 김상범 편집감독, 그의 연출부 출신인 류승완 감독, <올드보이>부터 박찬욱의 영화가 보여주는 비주얼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류성희 미술감독,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역시 박찬욱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서경 작가, 그리고 박찬욱의 영화와 조우하면서 한국영화계에 안착한 ‘대배우’ 오달수가 함께했다.

<씨네21>_창간 21주년 기념 대담을 위해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이 인터뷰는 <아가씨>의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이 발표되기 전인 4월10일 진행됐다) 아마도 박찬욱 감독과 가장 오래 알아온 김상범 편집감독부터 인연을 말씀해주신다면?

김상범_박찬욱 감독이 대학교 4학년 때였을 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건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녔다는 거다. (웃음) 당시 내가 연출 데뷔작으로 생각하고 있던 <불타는 난간>을 준비하면서 알게 됐다.

류승완_깐느박이 아니라 어린이 박찬욱 시절이다. (웃음)

박찬욱_연출부 하려다가 만나게 됐다. 비록 그 작품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이후 조언을 계속 구하고 작품 얘기도 나누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당시 연출부 막내로 유영진 감독님의 <깜동>(1988)이란 영화에 들어갔는데 유영진 감독님이 임권택 감독님 조감독 출신이었고, 상범 형도 임권택 감독님 연출부 출신이라 자주 만났다. 그런데 그 영화 하면서 제작부장이 연출부 퍼스트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져서 연출부가 다 그만뒀다.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갔다. 영화사쪽의 회유에 넘어간 거다.

류승완_역시 냉혹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셔. (웃음)

박찬욱_다 같이 그만두자는 리더 역할을 한 사람이 연출부 세컨드였던 곽재용 감독이었다. 막내였던 나는 ‘내 연출부 첫 작품에서 이렇게 나와버리면 앞으로 나를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돌아갔다.

오달수_보통 그럴 때 다시 돌아갈 마음을 먹으면, 나왔던 사람들 달래서 같이 돌아가지 않나. “야, 그래도 영화 엎어지면 안 되니까 돌아가자” 그러면서. (일동 웃음)

박찬욱_당시 곽재용 형이 너무 강경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문제 상의하러 상범 형을 만나 술 마시면서 “나 충무로에서 매장되는 거 아닌가요” 하고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김상범_당시 상황이 옳지 못했다. 친한 친구였던 황규덕 감독도 그때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 ‘현장에 절대 돌아가지 마라’라고 한 적 있다. 그걸 박 감독도 똑같이 경험한 거다.

박찬욱_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편집은 상범 형의 아버님이신 고 김희수 선생님께서 해주셨다. 정창화, 이만희, 김수용, 임권택 등 수많은 감독들 영화의 편집을 도맡으셨던 한국 영화편집의 전설이신 분이다. 나이차가 엄청나게 나는 데도 동등하게 대해주셨고, 큰 덕을 봤다.

김상범_<달은… 해가 꾸는 꿈>은 그 편집 작업을 옆에서 지켜봤다. 당시 한국영화에 있어 개성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라 느꼈다. 그를 촬영한 박승배 촬영감독님과 친한 사이였는데, 사실 그 때문에 좀 소원해졌다. 그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촬영감독 중 한명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영화 현장이 완벽한 콘티대로 진행되던 때가 아니라 현장 스탭들이 감독의 콘티를 인정하고 숙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장면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붙여서 찍으면 훨씬 효율적이고 좋지 않겠냐고 할 때, 내가 오히려 박 감독 편만 들었더니 서운해하시는 거다. 그런데 그때도 박 감독의 콘티는 되게 흥미로웠다. 요즘처럼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짠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기하려는 바가 명확했다. 그때만 해도 박 감독처럼 그림 콘티를 만들던 사람은 드물었고, 콘티란 게 뭔지 모르는 스탭도 태반이었으니 그런 반응이 당연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박찬욱_아무래도 데뷔작이니까 현장에서 힘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준비했다. 나로서는 새로운 영화를 찍어보려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 현장에서는 잘 안 받아들여졌다. 그렇다고 주인공이었던 이승철과 죽이 맞아서 우리끼리 뭘 따로 한 것도 아니고. 이승철은 언제나 노력하고 잘해주려고 했지만 워낙 바쁜 스타였기에 촬영하고 돌아가기 바빴다.

<씨네21>_류승완 감독은 두 번째 영화 <3인조> 연출부 출신이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류승완_중•고등학생 때 ‘도시에’라는 꼭지가 있던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영화잡지를 열심히 읽었는데, 특히 <스크린>에 기고했던 비평가 박찬욱의 글을 좋아했다. 그때 잘 읽히던 글들이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고 김용태 감독님 등 이른바 ‘서강학파’의 글들이었다. (웃음) 그러던 차에 그가 <달은… 해가 꾸는 꿈>을 통해 데뷔한 거다. 당시 나에게는 글도 쓰고 연출도 하는 그 모습이 무척 멋져 보였다. 그래서 잔뜩 기대를 안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오프닝 타이틀부터 영화 제목이 네온사인으로 어항 안에 있었다. 아니, 저건 뭐지?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긴 했지만(웃음), 굉장히 새로운 영화였다.

박찬욱_제작비가 넉넉했으면 더 멋지게 할 수 있었는데. (웃음)

류승완_복도 액션 신이 그렇게 기억에 남더라. <열혈남아>(1987)풍의 블루톤에 차가운 느낌도 있고. 하여튼 그 영화가 좋아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꼭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연락처를 모르니 <스크린> 편집부에 편지나 독자엽서도 여러 번 썼다. (웃음) 그러다 나중에 박 감독님을 만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바로 낭희섭 선배다. 독립영화협의회에서 낭희섭 대표가 진행했던 독립영화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당시 이른바 신철 등 기획영화 1세대가 등장하고 ‘청기사그룹’이나 ‘예술공장 서울’ 같은 독립프로덕션이 태동하던 때라, 그를 토대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그를 만나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하면서 박찬욱 감독을 인터뷰했다. 작품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연락하며 귀찮게 했다. 결국 지치셨는지 내게 연출부를 제안하셨다. 그게 바로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작품 <야간비행>이란 영화다. 그런데 사실 그전에 계속 나를 떼어놓으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도 진짜 누가 그러면 귀찮았을 것 같다.

박찬욱_그게 아니라 계속 그 복도 액션 장면 얘기를 하기에 “그렇게 액션이 좋으면 김영빈 감독을 찾아가야지, 왜 나한테 찾아왔냐”고 했다. 사실 나는 액션 신 자체에 큰 관심이 없는데 자꾸 그 얘기만 하니까. 나의 다른 면을 알아봐줬으면 좋았을 텐데. (웃음)

류승완_그러다 <3인조>라는 작품에 들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 여리고 순해 보이는 박 감독님이 그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나 싶다. 연출부 막내인 내가 봐도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일단 현장에 가면 박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이 완전히 반대 방향을 보고 계셨다. (웃음) 박 감독님이 생각해두신 풍경과 앵글이 있을 텐데 촬영감독님은 전혀 다른 곳에서 두손으로 뷰파인더를 만들어보시고는 흐뭇해하시는 거다. 적당히 합의해서 정해야 하는데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으니, 게다가 조감독이었던 유흥삼 형은 모든 게 빨리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분이었다. 연출부 세컨드였던, 나중에 권상우 주연 <야수>(2005)를 만들게 되는 김성수 형도 성격이 급한 편이었다. 정작 박 감독님은 서두르지 않는 편인데 형들이 엄청 서둘렀다. 그들 사이에서 막내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짜 모르겠더라. (웃음) 돌이켜보면 나 같으면 그런 환경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박찬욱_그러게, 내가 흥삼이랑 얘기하고 있을 때 촬영감독은 저 뒤에서 (두손으로 구도 잡는 제스처와 함께) 막 이러고 있으니. (웃음)

류승완_배우들하고는 괜찮았는데, 이경영 형은 당시 <베이비 세일>(1997)과 같이 출연할 때라 몹시 바빴다.

박찬욱_경영이 형은 현장에 오면 잠만 잤지. (웃음)

류승완_내가 또 이경영 형 깨우는 담당이었다. 깨우러 차에 가면 “야, 승완아 들어와. 너도 한숨 자고 가” 그러셨다. (웃음) 그러면 안 된다고 했더니 “괜찮아, 찬욱이는 시간 많이 걸려”라고 하셨다. 경영 형은 <깜동>과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에 출연하면서 ‘연출부 박찬욱’을 아시는 분이라 “박 감독님 연출부 때는 어땠어요?” 하고 물어본 적도 있다. “응, 엉덩이 무거운 애? 걔는 연출부 때도 감독 같았어” 그러시더라. (웃음)

노심초사의 심정으로 만든 <공동경비구역 JSA>

<씨네21>_<3인조>와 <공동경비구역 JSA> 사이에 단편 <심판>(1999)도 만들었다. 어떻게 만들게 된 작품인가.

박찬욱_<심판>은 당시 ‘영화마을’에 있던 이진숙 PD가 영화마을 비디오 가맹점들에만 독점적으로 배포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기획을 내놓으면서 시작된 옴니버스영화 중 한편이었다. 나 포함해서 김지운, 박기형 감독 그렇게 셋이서 만들기로 했는데 다른 두 사람이 각각 <조용한 가족>(1998)과 <여고괴담>(1998)으로 잘나가던 때라 굉장히 바빴다. 그래서 혼자 완성은 했는데 어디 붙일 데가 없었다. 준비하던 장편들이 만날 엎어지던 상황에서, 비록 단편이고 비디오라도 내 영화를 드디어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기에 그 두 인간이 어찌나 밉던지. (웃음) ‘나도 저들처럼 좀 바빠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류승완_지운사마(김지운 감독)가 원래 좀 그런 게 있다. 2002년에 효순, 미선양 사건(장갑차로 이들을 숨지게 한 미군 2명에게 미군 군사법정이 무죄판결을 내린 사건) 때 광화문 미국대사관 앞에서 박찬욱, 김지운 감독님과 삭발식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김지운 감독님은 촬영 때문에 지방에 계셨기에 부득이하게 따로 미용실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박 감독님과 나는 완전히 빡빡 삭발을 했는데 지운사마는 머리를 살짝 남겨서 ‘2부 삭발’을 했더라. 늘 좀 따로 노시는 게 있다. (웃음)

<씨네21>_<공동경비구역 JSA>(2000)는 드디어 김상범 편집감독과 만난 작품이다.

김상범_<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찬욱 감독의 다른 그 어떤 작품보다 애정이 많다. 시놉시스 단계부터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이른바 상업영화로 포장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남북 이데올로기가 있고, 군대 얘기지만 전쟁영화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둘 다 이 영화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컸다. 그때 박 감독이 “데뷔작 만들고 5년 쉬었고, 두 번째 영화 만들고 5년 쉬었는데, 이번 영화로 또 5년을 쉴 수는 없다”고 했다. (웃음)

박찬욱_그래도 당시 명필름 이은 대표가 불굴의 투지를 발휘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욕이 있었다. 불안한 가운데 그의 추진력을 보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시네마스코프 슈퍼35mm 촬영도 처음 해본 건데, 그 또한 내가 해보고 싶다고 한 게 아니고 그가 제안한 것이었다.

김상범_당시 한국영화에서 슈퍼35mm로 찍은 결과물을 본 게 없어서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도 컸다. 1.85:1 화면비율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어서 2.35:1에 맞는 콘티를 만들기 위해서도 고심했더라. <공동경비구역 JSA>가 당시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면서 이후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시네마스코프 2.35:1 영화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류승완_지금은 없어진 극장 씨넥스에서 열렸던 <공동경비구역 JSA> 시사회가 잊히지 않는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박찬욱이라는 연출가를 응원했다. ‘그가 이제는 포텐을 터트려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었다. 마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오스카 수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같은. (일동 웃음) 나한테도 특별한 기억인 것은, 당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가 개봉하면서 정식으로 초청받은 첫 번째 시사회였다. 나도 이제 충무로 감독이 됐구나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스승님의 영화를 보러 간 것 아닌가. 그런데 영화도 좋으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온 김지운 감독님이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고는 딱 한마디 하셨다. “박찬욱 감독 잘돼서 너무 좋다”고.

박찬욱_그로부터 한달도 안 지나서 김 감독이랑 차타고 어디 갈 일이 있었는데, 극장에 걸린 <공동경비구역 JSA> 간판을 보고는 “야, 여태도 하네”라고 하더라. (웃음) 그때만 해도 한 극장에서 오래 상영하고 그니까.

류승완_<올드보이>(2003)로 만나기 전에 <공동경비구역 JSA>에 최민식 선배를 캐스팅하려고 하지 않았나?

박찬욱_최민식이 거절한 이유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 <쉬리>(1998)가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겨우 제대했는데 또 입대하냐”고. (일동 웃음)

류승완_시사회 때 최민식 선배 자리가 별로 안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송강호 선배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좋은 자리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하니까 최민식 선배가 그러더라. “야, 이런 영화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봐도 좋아.” (일동 웃음)

<씨네21>_<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박찬욱 감독은 드디어 소망대로 바쁘게 됐다. (웃음) 이제 <복수는 나의 것>으로 넘어간다.

오달수_(드디어 첫마디) 2000년대로 접어들기 힘드네. <올드보이>는 언제 나오나. (일동 웃음)

박찬욱_세기가 바뀌는 게 쉬운 게 아니다. (웃음) 그래도 자기는 낫다. 류성희 미술감독과 정서경 작가는 아직 멀었다.

류성희_<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했을 때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웃음) 그전에 <쉬리>가 각종 한국영화 기록을 깼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런 일련의 소식을 들으면서 ‘박찬욱이라는 사람이 누구지?’ ‘한국영화가 바뀌고 있는 건가’ 궁금했다. 사실 그전까지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이 드물었으니까.

오달수_나도 그랬던 것 같다. <올드보이> 촬영이 끝나고 박 감독님이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감독님들한테 일부러 소개를 시켜주셨다. 그런데 영화를 통 안 봤으니 아는 감독님이 정말 한명도 없었다. 한번은 김지운 감독님하고 만난 자리에서 박 감독님이 “인사하지. 이쪽은 김지운 감독님이시고 이쪽은 연극배우 오달수” 그렇게 소개를 시켜주시는데 속으로 ‘뭐하는 사람이지?’ 그랬다. (일동 웃음)

박찬욱_그때 <반칙왕> 같은 영화도 안 봤어?

류성희_<공동경비구역 JSA>는 보셨어요?

오달수_(먼 산을 보며 딴소리) 연극하는 친구들 중에 영화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참 많다. 그냥 내가 좀 특별한 케이스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강박 다르게, 더 다르게 저지르기

김상범_<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고 그 이후 이제 막 작업을 끝낸 <아가씨>까지 보면, 박찬욱 영화의 일관된 느낌이 있다. 편집감독으로서 130편 정도의 작품을 작업하고 무수히 많은 감독을 만났지만, 대부분의 감독들이 욕심은 많아도 겁이 많다. 거의 모두 고여 있는 물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주저한다. 하지만 박 감독은 그 깊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바닥의 흙까지 헤쳐서 뒤집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매번 그와의 작업이 기대되는 것은 영화의 줄거리가 아니라 ‘이번에는 이 인간이 어디까지 파내려가고 싶어 하나’ 하는 점이다. <아가씨>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닫혀 있는 뚜껑을 보면, 누가 그걸 열지 말라고 한 게 아닌데도 그냥 금기시된 것인 줄 알고선 알아서 열지 않는다. 그런데 <아가씨>는 ‘더이상은 안 돼, 여기까지야’라고 암암리에 생각했던 부분까지 거침없이 열어보려고 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래서 박 감독과의 작업은 늘 재미있다.

박찬욱_체질적으로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다. 가령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가 “김정일 장군 만세! 조선노동당 만세!” 하는 부분이 있다. 당연히 나는 그런 ‘종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영화에서 오경필(송강호)의 ‘쇼’나 다름없는 그런 상황을 통해서 상업영화 안에서 그런 대사가 발설될 수 있다는 게 대단한 쾌감이었다. 금기시되는 그 대사를 넣어보고 싶었다. 영화 안에서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쇼라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었고. 그다음 <복수는 나의 것>을 할 때는 <공동경비구역 JSA>로 일시적으로 주어지게 된 특권적인 지위(?)를 더 늦기 전에 누려보려고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반면 내 필모그래피에서 여태껏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나가는 마음으로 찍은 영화다.

류승완_연출자로서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그런 부분을 떠나 <복수는 나의 것>은 사운드 연출에 있어서도 한국영화에 있어 어떤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 사운드는 할리우드에 대한 콤플렉스와 극장 환경의 열악함이 맞물려 무조건 세게, 다소 과잉되게, 혹은 잘 들리게 (웃음) 다가가는 것이 목표였다면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어 김석원 대표의 블루캡이 참여한 <복수는 나의 것>은 소리를 확 빼서 집중시키는 힘이 놀라웠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미니멀한데 그 안의 다른 것들은 너무나 꽉 차 있던 영화였다.

박찬욱_블루캡에서 <공동경비구역 JSA> 작업하면서 정말 재밌었다. 사운드하는 사람들에게 ‘총성’ 같은 건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어서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 속 류(신하균)가 청각장애인이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사운드라는 게 내게 영상과는 또 다른 큰 재미를 줬다.

류승완_<복수는 나의 것>은 캐스팅이 너무 안 돼 걱정이 컸던 작품이다. 송강호 선배가 한다고 했다가 못하겠다고 해서 박 감독님이 큰 좌절을 겪었다. 그러다 배우 김영철 선배가 그 역할을 하기로 했다. 심지어 한 TV 프로그램에서 김영철 선배가 “차기작으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든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작품을 하게 됐습니다”라는 얘기까지 하셨다. 공교롭게도 내가 또 그걸 TV로 봤다. (웃음) 그런데 1순위였던 송강호 선배가 다시 한다고 한 거다.

박찬욱_김영철 배우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정말 장문의 편지를 써서 용서를 구했다.

류승완_이후 박 감독님과 함께 김지운 감독님의 <달콤한 인생>(2005) 현장에 놀러간 적 있다. 이 사연을 다 알고 있는 지운사마가 굳이 일부러 박 감독님에게 김영철 선배를 소개시켜 주는 거다. (웃음) 정작 지운사마 자신은 밤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상황을 모르는 척 외면하면서. 김영철 선배가 박 감독님에게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럴 때 박 감독님은 <대배우>에서 이경영 선배가 ‘깐느박’을 똑같이 연기한 것에서 보듯 멋쩍게 웃으며 가방을 딱 안고 계셨다.

박찬욱_내 가방의 용도는 방패지. (일동 웃음)

<씨네21>_송일곤 감독의 <꽃섬>(2001)으로 데뷔한 류성희 미술감독은 <올드보이>에 참여하기 전에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작업했다.

류승완_<피도 눈물도 없이>를 함께하며 받은 인상이 너무 좋아서 박 감독님 말고도 <살인의 추억>(2003)을 준비하던 봉준호 형에게도 추천했다.

류성희_<올드보이>를 하자고 박 감독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살인의 추억>을 촬영하고 있던 중이었다. 경험도 부족한 데다 <피도 눈물도 없이>가 전작 <꽃섬>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여서 촬영 때 실수를 많이 했는데 류 감독님이 좋게 소개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류승완_그때는 나홍진 감독이 등장하기 5년 전이다. 아마도 그땐 한국 감독들 중에서 내가 제일 지랄 맞았을 거다. (웃음) 그럼에도 세트나 미술팀의 작업은 다 좋았다. 프리 프로덕션 때 투견장 세트부터 해서 여러 새롭고 무리한 시도들을 다 받아들여주셨다. 기존의 다른 미술감독님과 작업했다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김상범_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나한테도 류성희 감독 칭찬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웃음)

류승완_투견 장면에서 개들이 세트 철조망에 쓸려서 다치고 피 흘리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안타깝게 우시던 류성희 미술감독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박찬욱_그런데 나는 그 세트에서 누가 다쳤다고 해서 ‘그 미술감독 쓰면 안 되겠네’ 했다. (웃음)

류성희_저의 어두운 과거를. (웃음) 당시 미국에서 공부를 끝내고 한국에 가기로 했을 때 ‘과연 내가 한국에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컸다. 그런데 <피도 눈물도 없이>를 준비하면서 감독이랑 쿠엔틴 타란티노가 어쩌고, 하면서 너무 재밌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거다. 내가 이런 장르영화를 감독과 아무런 허물 없이 신나게 작업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다 극장에서 <복수는 나의 것>을 봤는데 <피도 눈물도 없이>와는 정반대로 너무 차가운 누아르영화였다. 내게는 그 두 영화가 신선한 장르적 감각으로 다가온 첫 번째 한국영화들이다. 그때 ‘한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복수는 나의 것>이 준 충격은 상당했다. ‘모던하다’는 느낌을 한국영화에서 처음 발견했다.

김상범_같이 식사를 하거나 고기를 먹으면 극명하게 나타난다. 고기를 구우면 박 감독은 템포가 빨라서 젓가락이 먼저 나오는 스타일이다. 나는 그다음부터 먹게 된다. 고기를 먹을 줄 아는 사람은 제일 맛있을 때를 아는 거다. (웃음)

류성희_칭찬이 아니라 디스인 것 같다. (웃음)

류승완_음식에 있어서는 박 감독님이 그 누구보다 전위적이고 진보적이다. (웃음)

김상범_얘기하다보니 비유를 잘못한 것 같은데(웃음), 남들은 기다리고 주저하는 순간 박 감독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저지르기 전에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일단 저지르고 본다. 연출자로서 그런 결단의 순간은 무척 중요하다.

<씨네21>_<올드보이>로 들어가기 전에 첫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 <여섯개의 시선> 중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를 통해 배우 오달수와 처음 만났다.

오달수_<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가 영화 데뷔작이지만 너무 분량이 적었고,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서는 대사를 좀 했었다. 찬드라가 초청해서 네팔에 간 적도 있다. 그때 느꼈던 해방감이 잊히질 않는다. 요새는 그런 눈빛이 없어졌는데 그때는 박 감독님 눈에 터질 듯한 결기가 있었다. 네팔 분량 촬영의 경우 제작비가 다 떨어져서 직접 박 감독님 사비로 진행했었다. 그만큼 의지가 대단했다. 촬영 끝나고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봤는데, 당시 구자홍 조감독님이 “요 몇달 사이에 감독님 웃는 거 처음 본다”고 했다.

박찬욱_잘못 안 거다. 나는 오달수 연기하는 걸 볼 때마다 웃겨가지고. (웃음)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의 첫 촬영이 아직도 기억난다. 오달수의 첫 테이크를 보는데 ‘이거 어떡하지?’ 싶었다. 정말 족보도 없는 연기에, 누군가와 비슷하다고 억지로 분류하기도 힘든 연기였다. 무엇보다 오케이를 해야 하는지, 다시 찍어야 하는지 연출자로서 선뜻 결정할 수가 없더라.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분명히 NG인데, 일단 재밌으니까 왠지 나중에 편집할 때 쓸 거 같은 거다. 현장에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류승완_연극영화과 실기시험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연기다. (웃음) 당시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올드보이>의 오달수도 그렇고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오광록 배우까지, 감독인 내가 봐도 문화적 충격이 컸다. 아니, 어떻게 저런 배우들하고 작업을 했나 하는 생각에. (웃음) 류성희 미술감독님이 얘기한 박찬욱 영화의 ‘모던’이라는 측면에 그런 배우들의 연기도 포함되는 것 같다.

박찬욱_카메라 무브먼트가 화려한 장면이 아니면 가급적 모니터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 가 있으려고 하는데, 오달수가 연기할 때는 무조건 모니터쪽으로 가야 한다. 내가 너무 폭소를 터트려서 계속 NG가 나더라고. 내 영화 중에서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오달수의 연기를 가장 좋아한다.

오달수_그때까지 감독님들이 준 디렉션 중에서 <올드보이> 때 박 감독님의 디렉션이 제일 명확했다. 내가 오대수(최민식)과 이우진(유지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역할이잖나. 감독님이 “달수씨, 애매모호하게 연기해주세요”라고 하더라. (웃음) 원래는 그렇게 들으면 헷갈린다. 그런데 그때처럼 그렇게 명쾌한 디렉션을 아직 받아보지 못했다.

류승완_아깝다. <베테랑> 때 애매모호하게 해달라고 했어야 하는데. (웃음) 그리고 <올드보이>는 정정훈 촬영감독과 처음으로 만난 작품이기도 하다.

박찬욱_정정훈은 상범 형이 같이 하라고 해서 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을 하면서 <올드보이>는 촬영감독을 구하기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복수는 나의 것>의 김병일 촬영감독은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때문에 안 되고, 다른 이들도 아무도 안 되는 거다. 스케줄이 안 되거나 시나리오를 읽고 안 한다고 했다. (웃음) 그래도 믿음직한 박현원 조명감독님이 있으니까, 내 생각엔 촬영감독이 그렇게 에이스가 아니어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 덕을 많이 봤다. 정정훈도 그렇고, 류승완이 류성희를 소개 시켜줬고, 그 류성희가 또 <피도 눈물도 없이> 의상으로 데뷔한 조상경을 소개시켜줬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함께 여행가는 기분”

<씨네21>_정서경 시나리오작가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친절한 금자씨> (2005)를 시작으로 <아가씨>까지 쭉 함께해오고 있다.

박찬욱_오기민 대표, 정성일 평론가와 셋이서 ‘이스트만 코닥 단편 제작 공모’ 시나리오 기획 심사를 한 적 있다. 그때 정서경이 뽑혔는데 압도적으로 심사 결과가 좋았다.

정서경_여기 계신 다른 선배님들 말씀 들으니까 나는 비슷하면서도 뭔가 발전되고 완성된 형태의 박찬욱 감독을 만난 것 같다. 그럼에도 똑 같은 기억은, 내 눈앞에도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서 결기 있는 눈빛으로 나타나셨다는 거다. (웃음) 처음 만났을 때가 모호필름을 막 세우고 <친절한 금자씨>를 준비하던 즈음이었다. 불공정한 처우를 개선하려고 회사를 직접 만드셨다는 얘기도 하셨고. 또 시나리오작가 출신이셔서 그런지 ‘시나리오 쓸 때 진도가 잘 안 나가더라도 미안해하지 마라’ 같은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입금이 안 되면 한 글자도 쓰지 마라’는 얘기도 하셨다. 다들 얘기하신 박 감독님 특유의 냉혹함? (웃음) 그래서 마감 날짜를 맞추지 못하고 감독님의 의도와 다른 부분이 많아져도 나중에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참아주셨는지 죄송하기도 하다. 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 ‘감독님, 그때 저 때문에 힘드셨죠?’하고 물었더니 기억을 못하시더라.

박찬욱_처음엔 <박쥐>(2009)를 하려고 정서경 작가와 만났다. 그러다 잠시 미뤄두고 <친절한 금자씨>를 하게 되었는데, 단편 심사를 하면서 만난 정서경 작가의 세계에는 이상야릇한 동화 같은, 그런데 또 묘하게 멜랑콜리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 점에 흥미가 생겨서 같이 하자고 했다.

류승완_그때 감독님이 모호필름에서 같이 한번 해보자고 한 적 있다. 그때 보여드린 시나리오가 <짝패>(2006)다. 판단이 빠르시더라. 바로 “이게 뭐니, 너 액션 포르노 찍으려고 그러는 거니?” 그러셨다. 너무 상처가 커서 밤에 줄담배를 피웠다. (웃음)

박찬욱_야, 난 ‘액션 포르노’ 그런 표현을 알지도 못해. 거짓말 아냐?

류승완_역시 과거를 한방에 부정하는 이 냉혹함. (웃음) 그러면서 나중에 나온 영화를 보시고는 “이런 영화인 줄 알았으면 같이 할걸” 하시며 장문의 문자를 보내셨다.

박찬욱_오해인 게 <짝패>는 시나리오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시나리오는 좋았다. 주인공이 문제였다. 류승완하고 정두홍, 자기네들이 직접 한다고 하니까 그만뒀던 거다. (웃음)

류승완_이렇게 때린 데를 또 때리시다니. (웃음) 아무튼 모호필름에서 <짝패>를 했다면 내가 ‘외유내강’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게 있어서도 인생에 있어 나름 분기점이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서경_다른 분들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박 감독님은 매번 다루고 싶은 금기, 또 도전하고 싶은 어떤 영역 같은 게 있다. ‘복수 3부작’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뭔가 형식적인 복수를 다 끝냈다고 해야 하나, 익숙한 복수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도전이었다. 그래서 뭐랄까, 나는 쓰면서도 결말을 모르고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한신 쓰면 그다음 신을 쓰는 거지, 열신 뒤를 모르고 앞의 다섯신만 아는 느낌으로 썼다. 그러다보니 관객이 영화를 보고 느낀 당혹감이 어땠을까 싶다. 다른 장르영화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그런 것들이 맞아가는 데서 오는 쾌감 같은 것도 있는데, <친절한 금자씨>는 관객에게 계속 잘모르겠는 뭔가를 던져주는 느낌이었다.

류성희_그건 <친절한 금자씨>뿐만 아니라 박 감독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얘기다. 박 감독님과 함께 영화를 하면서 재밌다고 느끼는 부분은 묘하게도 다른 감독님들과 일할 때 ‘그래서 싫어’라고 느낀 부분과 닮아 있다. (웃음) 늘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함께 여행가는 기분이다. 어떻게 보면 그게 영화의 매력 같기도 하고.

정서경_어쨌건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신뢰가 없으면 안 된다. 내가 이처럼 한 사람과 오랫동안 작업하게 될 줄 몰랐다. (웃음)

김상범_현실의 박 감독은 딱히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탐험이라고 할까, 안 가본 곳을 가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다. 남들이 당연시하는 생각을 제쳐놓고 저기로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 길로 가면 그냥 여행이지만 저기로 가면 탐험이 된다.

류성희_박 감독님한테 컨펌받기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감독님, 이건 좀 다른 것 같아요”라고 하면 바로 통과된다. (일동 웃음)

류승완_예전에도 연출부들에게 콘티 숙제를 내주실 때가 있는데 “이건 어디에 나온 거잖아” 라며 익숙하고 반복되는 것들을 싫어했다. 그만큼 영화든 미술이든 오래도록 본인에게 체화된 것들이 있으니 아예 다른 쪽에서 볼 수 있는 거다. <올드보이>도 얼핏 보면 탐정소설 플롯과 같지만 도달하는 지점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최민식과 유지태 사이의 균형감이라는 게 없다. 어떨 때는 연기의 앙상블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복수는 나의 것>과 비교해보면 더 그렇다. 여기 편집을 맡은 김상범 선배님도 계시지만, 숏과 리버스숏의 문법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는데 영화 전체가 그 이상한 힘으로 끌려가게 만든다.

김상범_<올드보이>는 그런 관계성을 무시하고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다른 장르영화의 컨벤션처럼 흘러가지 않아도 되리라고 봤다. 편집을 할 때도 상식적인 컷 연결을 거부하려고 했다. 대수(최민식)가 혀를 자른 뒤 우진이 자살하기까지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아주 큰 사이즈의 클로즈업에서 롱숏으로, 거기서 다시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오갔다.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기보다 이미지 중심의 편집이었다. 그 둘의 관계성에서 오는 오대수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지도록 하는 거다.

류승완_<친절한 금자씨>를 처음 봤을 때도 어디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예측도 안 되는 데다가 내가 붙들고 싶은 패턴이나 줄기가 희미하게라도 없어서. 그런데 그 디테일의 힘이 어마어마한 거다. 그런 점은 봉준호의 영화와도 비슷하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힘써서 연출한 장면과 아닌 장면의 균형감도 있는데, 두 사람은 묘하게 그로부터도 비켜나 있는 이상한 균형의 영화를 만든다.

정서경_매번 시나리오를 보실 때도 ‘다르게’ , ‘새롭게’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보다 간결해진 것도 느낀다. 얼마 전 <아가씨> 현장에 갔다가 디렉션을 주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간결하고 수학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언제나 배우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끌어낸다.

김상범_대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우들이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 감독의 영화에는 그것이 주가 아니다. 전에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얘기하려고 만났을 때도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의 경우, 금자씨의 심리나 뭐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고 “형, 금자씨 눈화장 색깔, 이게 좋아요 저게 좋아요?” 그걸 물어보더라. (웃음) 그런데 그런 지점들이 어떨 때는 상황이나 장면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건 소설이 아니라 영화니까. <아가씨>에도 의상이나 미술로부터 얻게 되는 캐릭터의 감정 같은 것들이 있다.

정서경_나도 박 감독님처럼 철학과를 나왔는데, 대학 때 배운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구별이 떠오른다. 감독님의 관심사는 바로 후자에 있다.

박찬욱_연기지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 때 리딩을 하러 모였는데 영애씨의 말투가 좀 이상했다. 처음 해보는 강한 캐릭터고 복수하는 사람이니까 나름 무게를 잡고 한 거다. ‘저건 아닌데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정서경 작가가 “<대장금> 같은데요?”라며 한마디 했다. 사극 말투 같다는 거지. 순간 실내가 싸해졌다.

정서경_나도 그런 자리가 처음이라… 감독님 표정을 보면 분명히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왜 말씀을 못하시지? 그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명랑한 말투로. (웃음)

박찬욱_영애씨의 표정도 살짝 굳었고, 그런데 문제가 한번에 해결됐다. (웃음) 순간 기분이 나빴을지 몰라도 스스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때로는 명쾌한 포인트를 짚어주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나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아가씨>

미국의 <스토커>, 한국의 <아가씨> 사이에서

<씨네21>_미국에서 드라마 촬영 중인 정정훈 촬영감독을 제외하고는 김상범, 류성희, 정서경, 세분 모두 <아가씨>에 참여했다.

김상범_<아가씨>를 보면 박 감독의 세계가 보다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영화를 좋아해주는 관객층도 함께 두터워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거다. 상업영화가 허용하는 선과 악, 그리고 도덕의 경계 위에서 주는 통쾌함이 컸는데 그를 진심으로 영화적 쾌락으로 느끼는 관객이 더 늘어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박 감독도 하고 있을 것 같다. 이전 영화와 비교하면 일단 드라마가 재미있다. 아마 그런 점이 박 감독 영화에 호의를 가진 관객의 외연을 더 넓힐 수 있으리라 본다. 그게 한국영화로서도 의미 있는 지점이기도 하고.

박찬욱_(오달수를 바라보며) 그런데 하필 이번에 천만요정이 없어서 불안하다. (일동 웃음) 오달수가 출연하지 않은 걸 나중에야 알았다.

정서경_박 감독님과 함께 작업한 지 10년이 지나니까 느끼는 게 있다. 함께 일해온 스탭들이 정말 많이 변했다는 거다. 사람이 교체되었다는 게 아니라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좋은 쪽으로 변하고 성장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감독님 스스로도 미국에서 작업한 <스토커>(2013) 이후 많이 바뀌셨다고 느꼈다. 감독님 스스로도 ‘새로 태어났다’는 말씀을 했다. <아가씨>가 새로 태어나고 만드는 첫 번째 작품 아닌가. (웃음) <스토커>를 작업하며 스튜디오와 타협을 많이 하셨다고 했는데 나는 어쨌건 그 결과물이 좋았다. 그리고 <아가씨>를 통해 다시 만난 느낌은, 그때 그 타협의 긍정적인 효과를 체험하고 변하신 것 같다는 거다. 나 또한 김상범 감독님 말씀처럼 이야기 자체만 보면 박 감독님 영화 중에 가장 상업적이고 재미있다.

박찬욱_<스토커>는 전반적인 과정이 다 힘들었다. 당시에는 공개적으로 말하기 힘든 스튜디오와의 싸움 때문에. 촬영 개시를 하루 앞두고 중단될 뻔한 적도 있었고, 촬영일수는 너무 적었으며, 촬영이 끝난 다음에는 편집 때문에 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불면증에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투쟁 과정에서 영화가 더 나아지는 부분도 있었다.

정서경_만약 한국에서 작업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은 장면들이 보였다. 그래도 영화는 정말 좋았다.

박찬욱_그렇게 나아진 부분들은 타협도 아니고 부딪히면서 제3의 결론에 다다른 거다. 내가 스튜디오를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고 그냥 새로운 걸 만들어낸 거다. <스토커>를 통해 다른 의견과 충돌하는 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긴 했는데, 그 과정은 힘들었다. ‘싸우지 않을 다른 좋은 아이디어는 뭘까’ 그걸 고민하는 것도 나름 공부가 됐다.

정서경_<아가씨>가 다시 태어나고 만든 첫 작품이라는 게 농담이 아닌 게, <박쥐>는 정말 박 감독님이 오랫동안 준비하셔서 기어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때 박 감독님에게서 완성한 기쁨보다는 ‘이제 뭘 해야 하나’ 하는 허탈한 기분을 더 크게 읽었다. 그런데 새로 <아가씨>를 준비하면서 이전과는 뭔가 다른 패턴으로 해보자, 하는 게 보였다.

박찬욱_그래서 미국에 간 것 같기도 하다. <복수는 나의 것>과 더불어 <박쥐>는 내가 가장 오래 품고 있었던 작품이었으니까. 오래전 명필름과 만났을 때도 그 두 작품 중 하나를 하고 싶었는데, 둘 다 안 된다고 해서 <공동경비구역 JSA>를 하게 된 거였다. (웃음) <박쥐>는 능력이 되는 한은 제일 잘한 것 같고, 오래 숙성시킨 만큼 가장 애착이 큰 작품이다. 같이 일해 온 스탭들의 호흡도 최고조에 달했기에 ‘이들과 함께한다’는 만족도 컸다. 그래서 ‘뭘 더 해야겠다’는 흥미도 떨어진 상태에서 타이밍 좋게 미국에 가게 됐고, 다시 한국에서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가씨>를 붙들었다.

류승완_제작 측면에서도 <아가씨>는 확실히 <스토커>의 영향을 받았나? 박찬욱 일단 촬영일수가 적다. 70회 예상했다가 더 줄였다. <올드보이>는 73회였다.

류승완_와, <주먹이 운다>가 75회 정도 됐다.

박찬욱_정말?

류승완_최민식 선배가 자꾸 말을 길게 하셔 가지고. (일동 웃음) 아무튼 그때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뿐만 아니라 나도 독일에서 <베를린>(2012) 촬영 중이었다. 힘들 때 언제나 박 감독님과 상의하니까 그때 카톡을 드렸는데 “야, 나도 죽겠어”라는 문자가 돌아왔다. 그러면서 “나에 비하면 김지운은 왕자야. 나 말고 김지운하고 얘기해. 그냥 아이 분윳값 번다고 생각해. 아니면 다시 찍고” 그렇게 왔다. (웃음) 그래서 다시 김지운 감독님한테 힘들다고 보냈더니 “나 요즘 외로워” 그렇게 답이 왔다. 자기가 감독인데도 현장에서 서열 4위쯤 되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나는 여기서 일개 고용감독일 뿐이야. 익스펜더블이지. 그래도 우리 중엔 봉준호 현장이 가장 낫지 않을까?”라고 계속 혼잣말을 하시기에 별 도움이 안 돼서, 그냥 두 사람하고 더이상 문자를 안 했다. (웃음)

박찬욱_야, 내가 성의 있게 메일로 긴 답장도 해줬는데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고. (웃음)

류성희_<아가씨>를 작업하면서, 박 감독님이 좀 달라졌다, 라고 막연하게 느꼈던 부분들이 오늘 많이 해소되는 것 같다. (웃음) 연출자로서의 판단이 흔들리는 여러 일들이 작용하지만 감독님은 반복, 허비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다른 감독들보다 훨씬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감독님과 여행을 떠나는 것이, 영화를 같이 하는 것이 재밌는 거다. 우리가 이 큰 돈으로 뭘 한다고 하면 자유로운 예술 이전에 직업적인 책임감이라는 게 생긴다. 그 안에서 지도를 그리는 게 경력 있는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인데, 감독님의 영화 안에서는,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감독님만의 배려가 있다. 그래서 나 같은 스탭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뭘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더 저질러도 좋을 것 같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는 거다. 그런 느낌은 영화현장에서 정말 귀한 거다. 오늘 이런 이야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웃음)

<씨네21>_지난해 박찬욱 감독은 배우 송강호와 그 친구 감독들이 모인 자리에도 참석하여 ‘손발이 오그라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러지 않아 좋았다’고 했는데, 오늘도 이런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그런 풍성한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 뜻깊다.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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