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게임 원작의 영화화가 어려운 이유
2017-01-09
글 : 송경원

기대에 미치지 못한 원작 영화를 두고 몇몇 팬들은 ‘~닦이’란 표현으로 실망감을 드러낸다.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2011)의 불법 자막 중 번역 오류(shine을 ‘닦다’로 번역했다)에서 비롯된 이 말은 어쩌면 팬들의 분노를 웃음으로 비튼 저항일 것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볼 때의 좌절감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원작 팬들은 해당 콘텐츠를 새롭게 접할 이들이 걱정된다.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뺏겨버린다는 것을 염려하고 세계관을 망친 장본인들을 원망한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은 바로 이것이다. 원작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저항감은, 단지 뭐가 더 재미있는지 이상의 문제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것은 애초에 패배를 전제로 한 게임이다. 어떤 재창작물도 원작을 넘어설 순 없다. 이건 단순히 완성도나 매체적 특성을 넘어서는 첫 경험에 관한 질문이다. 재창작물이 원작의 각인을 넘어서는 경우는 세계를 완전히 재창조하는 혁신에 가까운 일이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매우 드문 기적이랄 수 있다.

<어쌔신 크리드>의 아쉬운 도약

원작과의 비교는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개별 영화로 봤을 때 <어쌔신 크리드>의 해외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지나치게 가혹한 건 아닌지 반문해볼 필요는 있다. <어쌔신 크리드>는 영화로 처음 접하는 이들조차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어쌔신 크리드>는 ‘암살닦이’인가. 일정 부분 동의한다. 장점보다는 단점을 찾기 쉬운 영화이고 수준 높은 원작의 스토리, 매력적인 캐릭터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영화 <어쌔신 크리드>는 조상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기계 애니머스를 통한 과거 탐색, 템플기사단과 어쌔신간의 세력 대결이라는 큰 컨셉만 차용하고 오리지널 스토리와 캐릭터를 내세웠다. 제한된 상영시간에 알맞게 각색을 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작업이었을 것이다. 게임과 영화의 매체적 차이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름 아닌 시간이다. 압도적인 체험과정이 주어진 게임에 비해 영화는 제한된 시간 안에 정보를 전달하고 효과를 이끌어내야 한다. 때문에 얼핏 영화에 걸맞은 오리지널 스토리를 개발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문제는 그것이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보다 난망하다는 점이다. 영화 <어쌔신 크리드>는 이야기의 주요 무대를 현대로 가져오면서 몇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선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던 칼럼 린치가 어쌔신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꽤 많은 설명이 필요해졌다. 영화는 거의 중반까지 칼럼 린치가 폭력성을 지니게 된 배경을 상술하고 그를 통해 어쌔신들이 숨겨놓은 ‘에덴의 선악과’를 찾으려는 템플기사단들의 배경과 목적을 제시한다. 해외 평단은 대체로 이 지점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지나치게 설명 위주라 지루하다는 건 둘째치고 설득의 당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류의 ‘자유의지’를 설계한 유전자정보가 들어 있다는 에덴의 선악과나 애니머스의 위용, 그리고 너도나도 읊조리는 ‘암살자의 신조’(어쌔신 크리드)는 영화에서 공허한 주문처럼 반복될 뿐이다. 자유의지를 놓고 캐릭터들이 갈등과 충돌을 빚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로 명명된 사물이 제시되는 인상이다. 깊이 있게 파들어갈 여지가 충분했던 화두는 이 순간 얄팍해진다. 영화는 액션의 전시 혹은 철학적 주제의 탐색 양쪽을 서성이다 둘 다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게임에서도 애니머스 등 세계관의 설정에 그리 공을 들이지 않는다. 과감하게 설득을 포기했다고 봐도 좋다. 게임에서 이러한 생략이 가능한 이유는 압도적으로 긴 플레이 과정에서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메커니즘을 설명하기보다는 일단 제시한 후 그 효과에 집중한다. 플레이어가 어쌔신이 되어 과거를 체험하는 시간 자체가 설득의 도구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상영시간 내에 관객을 설득해야만 한다. 때문에 게임 <어쌔신 크리드>는 과거로 돌아가 있었던 일을 체험하는 과정을 주요 플롯으로 설정해도 충분한 데 반해, 영화 <어쌔신 크리드>는 템플기사단의 음모와 이에 실험쥐가 되어버린 암살단의 후손의 현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현재를 중심으로 칼럼 린치의 조상인 암살단원 아귈라가 활약하는 1492년이 곁가지처럼 제시되는데, 불행히도 설명이 넘쳐나는 현대(현실) 부분은 지루하고 오로지 직진하는 액션으로 채워진 과거(애니머스에 의한 기억의 재현) 부분은 외려 흥미롭다. 그 결과 관객은 물론 칼럼 린치 자신과 템플기사단까지 다 함께 신기한 기계 애니머스를 통해 암살단 조상 아귈라의 활약을 감상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영화 전반 서사가 산만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패착은 캐릭터다. 영화는 설명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데 비해 각 캐릭터의 심리를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다. 템플기사단이 기치로 내거는 평화와 통제는 피상적이고 연구소의 수장인 앨런 라이킨(제레미 아이언스)은 그저 대상으로 제시된다. 유전자지도를 분석하고 애니머스를 만든 과학자 소피아 라이킨(마리옹 코티야르)의 갈등과 변심은 이해하기 힘들고 기억과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모아놓은 암살단들의 관리는 엉성하기 그지없다. 설정상의 구멍이 곳곳에 드러나는데도 이를 메우려는 별다른 시도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쉽다. 전반적으로 캐릭터가 기능적으로 주어졌을 뿐 디테일한 감정묘사는 부족하다. 서사와 떨어져 단독으로 설득력을 지닌 건 마이클 파스빈더의 집중력 있는 연기와 아귈라의 액션 정도인데,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고뇌하는 파스빈더의 표정 연기는 (비록 클리셰에 가까울지라도) 가히 <어쌔신 크리드> 최고의 스펙터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 이야기되어야 할 미완의 도전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성공적으로 각색되기 어려운 이유는 당장이라도 몇 가지 꼽아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 압도적으로 짧은 상영시간 안에 무엇을 취사선택할 것인지가 문제다. 대개 게임의 세계관이 흥미로워 보이는 건 게임의 포맷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세계관과 설정에 매혹되어 그것만을 따로 떼어왔을 때 다른 토양의 서사에 제대로 이식되기 어렵다. 여기서 게임 원작의 영화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오리지널 스토리로 완전히 새로운 창조를 보여줄 것이냐, 아니면 게임의 스토리를 유지한 채 다른 장점을 부각시킬 것이냐. 어설픈 오리지널 스토리를 내세울 바에는 원작의 특정 부분, 예를 들면 영상의 질적 수준 등을 끌어올리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적어도 그 경우 원작 게임 팬들의 호응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다.

다만 기본적으로 게이머와 영화 관객층이 겹칠 거라는 건 환상에 가깝다. 일부 그럴 수는 있지만 매체가 바뀐 이상 게임은 게임이고, 영화는 영화다. 때문에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리려 했던 덩컨 존스 감독의 <워크래프트>나 저스틴 커젤 감독의 <어쌔신 크리드>의 선택은 지지받을 가치가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원작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독 영화로 봤을때 <어쌔신 크리드>는 여전히 실패작인가. 원작 게임의 후광이 도리어 가혹한 잣대가 된 건 아닌가. 지루하고 혼란스러운 서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충분히 재평가받을 만한 미덕들이 있다. 빼어나다고 하긴 어려워도 기본적인 만듦새는 수준 이상이고 아귈라 등 과거 암살자들의 액션 짜임새는 육중한 쾌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시리즈의 상징이랄 수 있는 ‘신뢰의 도약’을 중심으로 한 하강의 운동은 영화 전반의 서사와 궤를 같이하며 일관성을 유지한다. 비평적으로 재평가, 재해석할 여지가 충분한 셈이다. 앞서 헐거운 서사와 설정상의 구멍, 설득력 없는 캐릭터들은 지적받아 마땅한 부분이다. 다만 그 아쉬움과 분노에 영화가 일궈낸 선명한 장점들까지 함께 쓸려 내려가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의 게임 원작 영화들을 위해서라도 <어쌔신 크리드>의 시도는 여러모로 뜯어볼 여지가 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