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급할 영화가 너무 많다. 의미로 따지면 한편도 뺄 영화가 없지만 시대 제한을 두지 않은 까닭에 부득이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한 고전영화들(1990년대 이전)을 몇편 골라 소개한다. 이 영화들을 잊지 않고 뽑아, 이렇게 소개할 기회를 준 영화인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여기 한국영화 여성 캐릭터의 발자취가 있다.
- 1990년대 이전 기억해야 할 배우 3인 -
1. 문정숙
<검은 머리> 감독 이만희, 1964 <마의 계단> 감독 이만희, 1964
1960년대를 대표하는 성격파 배우라면 문정숙을 빼고 논할 수 없다. 이만희 감독의 <귀로>(1967)를 첫손가락에 꼽은 이들이 많았지만 사실 문정숙에게 좀더 특별한 한해는 1964년이 아니었을까 싶다. <검은 머리> <마의 계단> 등이 차례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정숙은 이만희 이전 내성적인 순응형과 이만희 이후 적극적 자아실현형 캐릭터로 나뉜다”는 김종원 평론가의 평처럼 이만희 감독이 문정숙의 진취적인 모던걸 캐릭터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선 굵은 페이스에 서구적 체격을 기반으로 심약하고 지적인 남성을 압도한다. 묘하게 퀴어적인 매혹을 지닌 배우다.” (송효정 평론가) 나락으로 떨어진 뒤에도 기품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여성, ‘한국의 마리아 셀’로 불리던 카리스마는 그렇게 탄생했다.
2. 도금봉
<목없는 미녀> 감독 이용민, 1966 <또순이> 감독 박상호, 1963 <산불> 감독 김수용, 1967 <삼인조> 감독 박찬욱, 1997
1957년 <황진이>로 영화계 데뷔를 한 도금봉은 40여년, 200여편에 달하는 오랜 경력만큼 특정 캐릭터로 대변 불가능한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여왔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매서운 요부와 순진한 아낙, 쾌락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등 두 가지 극단의 얼굴을 한몸에 담아내 왔다는 점이다. <황진이>에서 이른바 ‘1대 황진이’로 자리매김하며 풍만한 관능을 선보이는가 하면 <또순이>에서는 “버스안내양으로 출연해 어리바리한 남편 대신 회사를 일으켜 세우는, 똘똘하고 가난하지만 자수성가하는 여성의 전형”(오승욱 감독)을 소화하기도 한 것이다. 60년대 초 전성기를 보낸 이후로도 <산불> <토지>(감독 김수용, 1967) 등에서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1997년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에서 맡은 금은방 노파 역은 “클래식 한국영화와 현대 한국영하를 가로지르는 캐스팅”(최진성 감독)이라 할 만하다.
3. 이화시
<이어도> 감독 김기영, 1977 <흙> 감독 김기영, 1978
“영화적 얼굴이 있다면 바로 이런 얼굴이 아닐까. 그로테스크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기이한 얼굴이다.”(김소희 평론가) <이어도>에서 술집 작부 손민자를 연기한 이화시는 영화의 기묘한 분위기를 한몸에 오롯이 담아낸다. 원작의 서사를 벗어나 이미지로 차별화한 영화 <이어도>에서 배우 이화시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이었다. 김기영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흙>에서는 불륜을 저지르고도 당당한, 나아가 불륜을 통해 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했다. “춘원 원작이 지닌 이중적 남성성을 꿰뚫고 남성(허숭)의 이야기를 여성(선영) 주체의 이야기로 바꾸는 이화시의 힘”(박유희 평론가)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영화 침체기였던 70년대가 아니라면 시대를 앞서간 그 독특한 매력을 훨씬 더 발산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 1990년대 이전 주목할 만한 캐릭터 5 -
1. <자유부인> 감독 한형모, 1956 대학교수 아내 선영 김정림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진보한 여성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최초이자 진짜인 여성 캐릭터라 할 만하다. 선영은 멜로적 캐릭터로 소비되던 기존의 여성상에 갇히지 않는다. “전통적이고 고정화된 가정의 아내라는 역할로 살던 선영이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생활을 찾게 되는 과정은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흐름을 대변한다.”(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 당시엔 불륜이란 소재가 화제의 중심이었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존의 패닉 같은 논쟁을 벗어나, 영화 서사 표면을 따라 스스로 사회적 재현을 위한 장으로 변신하는 여성 캐릭터”(이지현 평론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2. <영자의 전성시대> 감독 김호선, 1975 영자 염복순
“시대를 살아냈던 당시의 여성들의 삶을 경험케 한 소중한 기회로 기억한다.”(한지승 감독) 주체적인 삶을 살거나 진취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 영자가 창녀로 전락한 후 자신을 이해해주는 청년을 통해 생의 의지를 회복해나가는 방식은 전형적인, 당대 유행했던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맥락이다. 여성 캐릭터가 부각되는 쪽보다 사실 소모되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영자가 식모, 버스안내양 등 당시 시대를 반영한 상징들을 한몸에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염복순 배우는 몸을 사리지않는 연기로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3. <충녀> 감독 김기영, 1972 명자 윤여정
“<화녀>(1971), <충녀>(1972)는 여필종부, 일부종사, 모성희생으로 일관하던 당시 영화의 통념을 완벽하게 깬 여성을 선보였다. 장르영화 자체가 드문 시절에 장르적 색채까지 쥐고 가는 여성 캐릭터들이다.”(박혜경 앤드크레딧 대표) 김기영 감독의 영화 안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여성 캐릭터들의 우열을 가리는 건 무의미하다. 취향에 따른 선택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표가 분산된 이유이기도 했다. <충녀>에 대해 임필성 감독의 고백을 들어보자. “<충녀>의 여주인공이야말로 김기영 월드의 백미다. 근대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전복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캐릭터라 생각한다.”
4. <삼포 가는 길> 감독 이만희, 1975 백화 문숙
백화는 “의지하나 종속되지 않는 찬란한 삶의 에너지”(박석영 감독)를 뿜어낸다. 문숙은 이 작품 한편으로 1970년대 기억해야 할 배우가 되기 손색이 없다. 이용철 평론가는 “한국형 로드무비가 로드무비를 대표하는 미국의 그것과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는 점은, 여자와 남자의 동행이다. <삼포 가는 길>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한국식 로드무비의 원형이다.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든 건 그녀, 백화였다. 그녀는 <고래사냥>의 춘자와 <바보선언>의 혜영의 언니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세파에 찌들었지만 순수를 잃지 않은 술집 작부의 이미지는 이후 70, 80년대 한국영화의 전형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5. <갯마을> 감독 김수용, 1965 마을 아낙들
한국영화에서 여성들은 함께하며 서로의 존재를 완성시킨다. 2000년대에 <고양이를 부탁해>가 있다면 1960년대에는 <갯마을>이 있었다. 풍랑에 남편을 잃은 과부들은 갯벌을 터전 삼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들의 생을 잇는 건 단지 노동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지지대가 되어주는 공동체 관계다. “남자들이 사라진 <갯마을>의 아낙들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입도 맞춘다.”(유성관 한국영상자료원 경영기획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연대의 순간. 아름다운 것들은 애초에 분리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