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여성 캐릭터 열전
“한국영화사 전반에 대한 자료 발굴이 대체로 부진한 편이지만 특히 여성 영화인과 관련해서는 몇몇 유명배우를 제외하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1년 출간된 <여성영화인사전>(주진숙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펴냄)은 책의 서문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한국영화사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를 이와 같이 밝히고 있다. 자료도, 연구도 부족하니 채워넣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주목하고 싶은 건 서문의 말미에 밝힌 문구다. “이 작업은 이제 시작이며 아직 진행 중에 있다. 여성 영화인의 활동이 폭발하게 된 90년대 이후의 여성 영화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강이 시급히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슬프지만 같은 말을 그대로 긁어넣기해서 반복해야 할 것 같다. 90년대 이후 여성 영화인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시급히 이뤄져야만 할 대상이다.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성 영화인의 활약은 90년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지만 우리는 아직도 영화계 내에서 여성 영화인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다. 충무로에 여성배우를 위한 시나리오가 없다는 지적을 단지 푸념으로 듣는다면 당신은 현실에 무지한 것이고, 영화산업 시스템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면 문제가 있음에도 바꾸려 하지 않는 셈이니 게으른 것이다.
여성 캐릭터들은 반복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씨네21>에서 새삼 한국영화 여성 캐릭터 열전을 마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익숙하고 식상한 기획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안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아직 제대로 여성 캐릭터들을 정리한 목록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여성 영화인들의 이름은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호명되어야 한다. ‘흰 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부터 흰 곰이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이른바 사고억제의 효과처럼 우리는 여성 영화인에 대해 널리, 자주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빼어난 성취를 보인 배우들,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매번 목격하고 있지만 그냥 흐릿한 기억 속에 흘려보내고 만다. 정기적으로 활자화하여 정리해줄 필요가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때마다 돌아오는 리스트업은 여성 영화인들의 존재와 활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솔직해져보자. <여성영화인사전>과 같은 학술적인 작업 외에 한국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리스트를 본 적이 얼마나 있는가. 그들의 이름은 좀더 자주 오르내려야 마땅하다.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를 정리해보는 것은 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관객의, 영화인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활약상이 가지를 뻗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 설문은 기자, 평론가는 물론 감독, 스탭, 제작, 홍보, 영화제 관계자 등 각계각층의 영화인 208명을 대상으로 했다. <씨네21>에서 그들에게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영화 속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는 누구입니까?” 광범위하고 모호한 질문이라고 느낄 것이다. 설문에 답한 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각양각색의 대답을 보내왔다. 굳이 ‘최고의 캐릭터’라든지 ‘진취적인 캐릭터’ 등의 구체적인 수식어를 피하고 ‘인상적’이라는 주관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은 답변의 방향을 특정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성 캐릭터라는 방대한 범주 안에서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영화인들이 어떻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기억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영화인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솔직한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최고의 여성 캐릭터를 줄 세우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언급된 횟수에 따라 순위를 매기긴 했지만 완성도나 성취와는 무관하다. 차라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빈도, 그러니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의 뇌리에 자리잡은 강렬함에 대한 기록이라 생각해주면 좋겠다.
이야기에 정확히 부합하는 캐릭터가 빛을 발한다
전체적인 경향을 정리하기 전에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이번 설문은 시기에 제한을 두진 않았기에 아무래도 2000년대 이후 영화일수록 언급 횟수가 높았다. 연대별로 구분하면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첫걸음으로서 지금 현재 영화인들의 인식을 우선 확인할 필요가 있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리스트 밖에 있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는 고전영화와 소수의견들은 따로 추가해 언급하기로 했다. 1위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이영애)와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의 엄마(김혜자)가 꼽혔다. 평단에서는 <마더>에 대한 지지가 높았고, 연출 등 제작부문에선 <친절한 금자씨>를 주로 언급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마더>에 대해선 “가부장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모성의 생존 전략이 얼마나 질기고 동시에 허약한지 유감없이 보여준다”(변성찬 평론가)는 평처럼 모성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줬다는 점, 김혜자의 재발견이라는 점에 찬사가 이어졌다.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여’배우란 말로는 부족하다. 배우와 역할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보기 드문 예”(조상경 의상감독)라는 평가와 같이 캐릭터의 색을 선명히 드러낸 표현방식에 주목한 선정이 다수를 이뤘다. 범주를 최대한 열어놓고 진행한 설문이었던 만큼 전반적으로 표의 분산이 넓고 고르게 이뤄졌지만 <친절한 금자씨> <마더>와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만큼은 압도적이라 해도 좋을 지지가 이어졌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이창동, 홍상수, 허진호 등 200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감독들의 작품 속 캐릭터에 대한 언급이 집중되었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결국 좋은 캐릭터란 남녀를 불문하고 감독의 구상이 정확히 드러나는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확히 구현하는 배우의 존재감, 연기력을 굳이 남녀로 나눌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다. 결국 핵심은 남녀, 혹은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에 정확히 부합하는 캐릭터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쌍년들. 그들을 보면 여자의 진짜 역사가 보인다. 그런데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늘 남자라는 아이러니”라는 경순 감독의 말처럼(경순 감독은 <영자의 전성시대>(1975)의 영자(염복순), <파란대문>(1998)의 진아(이지은), <차이나타운>(2014)의 우희(김혜수)를 꼽았다) 대부분 남성감독에 의해 여성 캐릭터들이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도 되새겨볼 만한 지점이다.
그 밖에 주연보다 빛나는 존재감으로 뽑힌 조연 캐릭터의 면면도 흥미롭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공장 노동자 정순(김선재), <삼인조>(1997)의 전당포 노인(도금봉), <암살>(2015)의 안성심(진경) 등 분량과 관계없이 시선을 사로잡은 캐릭터들이 수차례 언급되었다. 여성 캐릭터 활용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한편 적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여전히 스테레오타입에 머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결과는 한명의 캐릭터를 꼽지 않고, 페어로 혹은 단체로 꼽은 답변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2006)의 가족들,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친구들처럼 전체 출연진을 꼽은 경우가 상당했고, <플란다스의 개>(2000)의 현남(배두나)과 장미(고수희), <피도 눈물도 없이>(2002)의 경선(이혜영)과 수진(전도연), <미쓰 홍당무>(2008)의 미숙(공효진)과 종희(서우), <도희야>(2014)의 영남(배두나)과 도희(김새론), <차이나타운>의 우희와 일영(김고은), <연애담>(2016)의 윤주(이상희)와 지수(류선영), <비밀은 없다>(2016)의 연홍(손예진)과 미옥(김소희), 민진(신지훈), <아가씨>(2016)의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 등 여성 캐릭터 커플로 답변한 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에 대해 김혜리 기자는 “여성 캐릭터는 관계성에서 특색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쌍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하나로 분리해서 뽑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란 견해를 밝혔다. 흥미로운 분석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하의 리스트들은 성적으로 매긴 순위가 아니다. 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영화와 여성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의 면면을 통해 한국영화와 여성 재현의 관계성을 발견해나갈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