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 매김이 목적이 아닌 이상, 20위권 밖의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언급은 계속돼야 한다. 전통적 성역할에 균열을 내며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에 관해서라면 손희정 평론가가 선택한 <사방지>(감독 송경식, 1988)부터 말해야겠다. “외로움 속에 남겨진 여성들을 구원하는 섹스의 화신”이라는 선정의 이유처럼 흉악범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방지(이혜영)가 과부 이소사(방희)와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격을 뛰어넘는다. 다른 한편 <우묵배미의 사랑>(감독 장선우, 1990)의 공례(최명길)처럼 “남성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파괴한 전복적 캐릭터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천민 자본주의에 희생당한 우리 언니, 이모, 엄마들의 잔혹사다. 하지만 실질적 가장인 그들은 적어도 영화 속 남자들처럼 무능하거나 폭력을 일삼지 않는”(장건재 감독) 담지자로서의 여성도 있다. 여성 캐릭터들이 직면한 ‘현실’은 여전히 두터운 장벽임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1990년대, 가부장제를 넘어
현대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1990년대,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뛰어넘는 여성들의 방식에도 변화가 인다. 여성의 육체성에서 비롯된 욕망 드러내기보다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변화를 주목한다. <결혼 이야기>(감독 김의석, 1992)의 지혜(심혜진)에 대한 이지현 평론가의 평은 새겨둘 만하다.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적 양식은 ‘신파적 전개’로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 캐릭터의 역할을 개인 관계, 특히 ‘가정’이라는 영역과 관련시킨다. 이 영화에서 지혜는 전통적 멜로드라마의 계급대립적 성향을 유유히 멋지게 벗어난다. 현대적 여성 캐릭터의 지표 격이다.” <거짓말>(1999)의 와이(김태연)처럼 “교복을 입고 곡괭이 자루를 휘두르던 혁명적 여전사”(김우형 촬영감독)가 돼 전복을 시도하는 경우도 등장하던 때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멜로드라마 속 여성들을 주목하는 분위기다. <접속>(감독 장윤현, 1997)의 수현(전도연), <8월의 크리스마스>(감독 허진호, 1998)의 다림(심은하), <미술관 옆 동물원>(감독 이정향, 1998)의 춘희(심은하), <봄날은 간다>(감독 허진호, 2001)의 은수(이영애)가 대표적이다. 이들 모두 당대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서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이현승 감독)로서의 제 목소리를 낸다. ‘현실적’ 여성들의 또 다른 경우로는 <처녀들의 저녁식사>(감독 임상수, 1998)의 29살 동갑내기인 호정(강수연), 연(진희경), 순(김여진)과 <싱글즈>(감독 권칠인, 2003)의 나난(장진영)을 들기도 한다. “나난은 그 시대를 살던 ‘여자’를 완벽하게 드러냈다”(이주연 스콘 대표), “<결혼 이야기>의 지혜와 함께 나난은 영화의 중심으로 주체적으로 들어와 트렌드를 이끈, 한국에서도 <섹스 앤 더 시티>가 가능함을 보여줬다”(어지연 CGV아트하우스 영화사업팀)고 평가된다. 근작들 가운데서는 <무뢰한>(감독 오승욱, 2015)의 김혜경(전도연)과 <한공주>(감독 이수진, 2013)의 공주(천우희)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조영욱 음악감독은 “김혜경을 보면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카지노>(1996)의 샤론 스톤이 자꾸 생각난다. 혜경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이끌려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운명의 사슬 속에 갇힌 여인처럼 보인다”고 전한다. 권지원 리틀빅픽처스 이사는 “잔혹한 현실에 피해자가 보여주는 아픔과 희망의 감성을 리얼하게 그렸다”며 공주를 기억한다.
눈에 띄는 리스트를 보내준 이들과 특별 언급을 덧붙인 경우를 소개해야겠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감독 김태용·민규동, 1999), <고양이를 부탁해>(감독 정재은, 2001)처럼 “캐릭터 1인이 아닌 앙상블로서의 여성들”(조계영 필앤플랜 대표)에 애정을 보낸 경우가 많았다. 김혜리 기자는 <표적>(감독 창감독, 2014)의 영주(김성령), 수진(조은지) 형사를 꼽으며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TV드라마의 여성 캐릭터보다 현실의 여성을 못 따라잡는 게 보통인데 <표적>의 선후배 형사는 그렇지 않고 TV가 못 보여주는 수위까지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어서 “두 형사의 직업 규율과 상호 신뢰는 <대장금>의 한 상궁과 장금 어머니 이래 가장 끈끈한 파트너십을 보여준다. 이 밖에 일하는 여성 캐릭터로서 좋은 예로 역시 김성령의 <의뢰인> 속 역할, <더 테러 라이브>의 전혜진, <감시자들>의 진경 캐릭터 등이 있다”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 주인공들을 꼽은 경우도 있다. 신은실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과 원신연 감독이 택한 <낮은 목소리>(감독 변영주, 1995~99)의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다. “윤두리, 김복동, 심미자, 박두리, 박옥련, 강덕경, 이용수 선생님 등이 일깨워주신 삶을 위한 싸움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 한다”(신은실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며 다시는 있어서는 안되는 캐릭터다”(원신연 감독)라고 전했다. 한편 여성간 관계성에서 사랑에 방점을 찍은 <연애담>(감독 이현주, 2016)의 윤주(이상희), 지수(류선영)의 경우는 장르물의 외피에 의존하지 않고 사랑의 일상을 살아낸 여성들로 볼 수 있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도 잊지 말아요
봉만대 감독의 리스트도 눈에 들어온다. 본인의 연출작이자 2000년대 들어 메인 스트림에 진입한 에로영화라 할 수 있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의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는 신아(김서형)를 제일 먼저 꼽았고, <고래사냥>(1984)의 춘자(이미숙)와 <무릎과 무릎 사이>(1984)의 자영(이보희)도 리스트에 올렸다. 같이 언급해두고 싶은 건 이현경 평론가가 끝까지 고민했다는 <애마부인>(감독 정인엽, 1980)의 애마(안소영)다. “1980년대 에로영화의 출발점이자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생산된 시리즈의 원조다.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김조광수 감독은 <천하장사 마돈나>(감독 이해영·이해준, 2006)의 동구(류덕환)를 택하며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여성 캐릭터”라고 정확히 짚었다. 마지막으로 <봄날은 간다>(감독 허진호, 2001)의 은수(이영애), <사랑니>(감독 정지우, 2005)의 인영(김정은), <혜화,동>(감독 민용근, 2011)의 혜화(유다인)를 언급하며 긴 이유를 덧붙여온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을 옮겨야겠다.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들은 인물을 세밀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오히려 인물이 생기를 잃어간다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마주하고 고심했는데 그 문제를 최초로 해결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는 인물의 특정 부분을 불분명하게 처리해야 (<모나리자>의 눈가와 입매가 그러하듯이) 그 인물이 더욱 생생한 실물감을 갖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이를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라 한다. 어쩌면 영화 속 캐릭터를 조형할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딘가 조금씩은 매력적인 방식으로 불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건 가장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그 캐릭터들(은수, 인영, 혜화)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 당장 그 영화들을 다시 플레이해서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