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숨을 돌린 오후, 인터뷰 장소에 들어선 봉준호 감독은 7월 독감을 앓고 있는 운 없는 사람 치고는 매우 밝았다. 아니, 3년 만에 새로운 장편을 공개하고 열흘째를 맞이한 영화감독 치고는 대단히 명랑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스코어라는 유령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감독의 활기는 첫주 박스오피스 성적이라는 괴물이 얼마나 영혼을 좀먹는지 반증을 보는 듯했다. 대화를 통해 기자는, 동물권 문제가 단순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그리기 위해 <옥자>에 끌려들어온 소재가 아니라 봉준호 감독이 현재 세계의 중요한 이슈로 통감하고 감독으로서 구현할 수 있는 영화적 아름다움을 그 안에서 발견한 주제임을 확인했다. 카페에서 상주하는 고양이 후추가 무심한 척 덧문에 등을 대고 우리의 인터뷰를 엿들었다. 주차장에서 구조된 후 3kg이 늘었다는 몸으로 끙차 돌아눕는 태가 옥자 같았다. 넷플릭스 영화는 블루레이 발매가 늦는 편이라고 한다. 그때까지 감독 코멘터리를 소박하게 대신하자는 마음으로 상세히 물었다.
-<괴물> <설국열차> 때보다 오히려 관객과 만남이 많은 것 같다.
=극장에서 가늘고 길게 버텨보려고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7월 28일에는 ‘감금틀 사육 반대 서명운동’을 <옥자>와 함께하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회원을 위한 특별상영을 하고 8월 5일에는 <옥자>와 내가 좋아하는 조지 밀러의 <꼬마돼지 베이브2>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동시상영한다. (웃음) 최대한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일 기회를 만들자고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 프로듀서와 한 다짐을 실천하려고 한다. 제시된 손익분기점이 없으니 솔직히 마음 편하다. 덕분에 1895년 개관한 인천의 애관극장도 가보고 대구 만경관도 가봤다.
-극중 미자의 여정이 봉 감독 자신의 할리우드 경험과 평행선 아니냐는 짐작이 있다. 말하자면, 하이브리드의 존재(영화)를 만들어 미국에 갔는데 쌍둥이 형제를 만나 고초를 겪는다는 설정에서 루시와 낸시가 (<설국열차> 배급권자로서 최종편집을 두고 감독을 압박했던) 웨인스타인 형제에게서 힌트를 얻은 건 아닌가 하는 가설이다. (웃음)
=과도한 해석이긴 하지만 하비 웨인스타인의 흔적이 하나 있긴 하다. 제이(폴 다노)가 처음 미자에게 장광설로 미란도 기업의 거짓말을 설명하며 옥자가 태어난 지하 실험실 영상을 보여주는데 위치가 뉴저지 파라무스라고 나온다. 실은 파라무스의 거대 쇼핑몰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웨인스타인이 30분을 잘라낸 90분짜리 <설국열차> 테스트 스크리닝(관객 반응을 최종편집에 반영하기 위한 시사.-편집자)이 있었다. (좌중 폭소) 사지 잘려나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아무 생각 없는 10대들이 팝콘을 먹으면서 “왓 더 퍽 이즈 고잉 온?” 하고 있는 광경을 프로듀서와 맨 뒷줄에서 지켜봤다. 시사가 끝나고 대행사에서 관객 설문지를 집계했는데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반짝이 양복을 입은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봉. 아임 소 소리. 스코어 이즈 베리 배드” 하더라. 속으로 ‘아 당연히 안 좋지, 영화를 30분이나 쳐냈는데’라고 구시렁거리다 오히려 점수가 낮으니 잘된 건가 하고 있는데 웨인스타인이 다가오더니. “봉, 이츠 베리 배드. 레츠 컷 아웃 모어” 하는 거다. (좌중폭소) 남의 일이면 모든 상황이 너무 웃기고 재밌는데 불행히도 그것이 내 영화였다. 다행히 계약서에 감독판도 유사 조건에서 테스트 시사를 1회 가질 권리가 명시돼 있었고 결과적으로 감독판 점수가 훨씬 높게 나와 디렉터스 컷으로 미국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웨인스타인의 가위손에서 살아남은 감독 두명 중 한명이라는 말도 들었다. 다른 한명은 <모노노케 히메>를 미라맥스를 통해 미국에 배급한 미야자키 하야오다. 웨인스타인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열어보니 사무라이칼과 ‘노 컷’이라고 쓴 종이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옥자>가 올해 시드니영화제 폐막작이었다. <매드맥스> 시리즈, <꼬마돼지 베이브>, <해피 피트>와 공통점이 있으니 당연히 호주 출신 조지 밀러 감독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것 같다.
=물론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가 70주년을 맞아 많은 감독을 초청한 덕분에 조지 밀러를 처음 만났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편집 중에 <설국열차>를 반복해서 봤다고 하셔서, <설국열차> 편집하며 <매드맥스2>를 반복해서 봤으니 스스로에게 영감을 받으신 것이고 나는 끼어들었을 뿐이라고 답하며 웃었다. 시드니에서 재회했다.
“정말 아름답죠?”
-<옥자> 안으로 들어가자. 영화가 시작할 때 울리는 여섯번의 종소리는 무엇인가.
=<플란다스의 개> 오프닝을 보면 개 짖는 소리가 중앙부터 극장 한바퀴를 빙 돈다. 스피커 상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넣은 일종의 테스터다. 이번에는 종소리로 여섯 방향 스피커를 체크한 거다. 시사회에 앉아 있다가 시작과 동시에 종소리 중 하나가 깨져 있거나 안들리면 내가 ‘스위치’를 빡 누르고 곧장 연출부가 퓽 총알같이 영사실로 달려올라가 “멈추어!”라고 외치는 거다. (웃음)
-그래도 영화의 오프닝을 상영관 테스트에 바치다니 상상 밖이다.
=난 모든 영화들 앞에 극장시설 점검 리더 필름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컨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안성기 선배를 캐스팅해 1분30초짜리 영상을 만드는 거다. 안 선배가 차트를 하나 들고 “지금 이 숫자를 읽으실 수 있습니까? 아니라면 보시는 상영관의 포커스는 나가 있습니다”, “다음은 스피커. 모든 종소리가 들렸나요? 그럼 안심하고 관람하세요” 하는 거다. 그래야 모든 극장이 긴장하지. 게다가 이번에는 스트리밍 공개인 만큼 인터넷 속도가 느린 나라에서도 틸다 스윈튼의 최초 숏을 종소리로 지연해 전송 상태가 정리된 다음 정상화질로 보게 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의 TED 토크는 자본주의의 탐욕이나 잔혹함보다는 변태성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먹는 것들에 대해 가지는 분열적 태도랄까.
=구구절절 아름답게 미란도 기업의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맨 마지막에 “무엇보다 X나게 맛있다”라고 한다. 극중 신문기사에서 루시 미란도는 사람들이 앞으로 먹게 될 동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는 구절이 해당 장면의 핵심이다.
-공동작가 존 론슨은 미국 대테러 첨단무기 회사의 레지나 듀간이 로봇 벌새 드론을 프레젠테이션하면서 “정말 아름답죠?”라고 했던 동영상을 참고했다고 하던데.
=틸다와 존과 함께 봤던 영상이다. 그 아름답다는 로봇 벌새가 독침으로 표적을 살상하는 무기 아니냐는 질문이 좌중에서 나오자 행사장이 썰렁해진다. 주섬주섬 나가는 사람도 있고.
-루시는 프롤로그에서 교정기를 끼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사인을 연습하는 장면을 보면 딱 아이들이 식탁에서 그림 그리는 자세이기도 하다. 틸다 스윈튼이 인터뷰에서 <옥자>에서 가장 성숙한 존재가 옥자, 정반대 극점이 루시라고 말했더라.
=<설국열차>에서는 메이슨 역으로 틀니를 했는데 틸다가 입에다 뭘 하는 걸 나보다 더 좋아한다. 대사하기도 불편할 텐데. 회의 장면에서 보면 루시는 어른이지만 징징거린다. 그래서 조금 가엾기도 하고 결국 실패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마지막에 미자가 찾아갔을 때도 낸시 정도 되니까 미자와 대결하지 루시는 깜이 안 됐을 거다. “너는 가고 김기춘 나와!”와 비슷한 상황 아닌가. (웃음)
외젖꼭지와 작은 눈
-옥자는 돼지 수명으로는 꽉 찬 10살 시점에 영화에 소개된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서사적으로 어떤 필요였나.
=즉, 공장형 축산 기준으로는 옥자가 상품성이 없다. 26마리 귀엽고 예쁜 아기돼지들은, 미란도가 지하 실험실에서 진짜 대량생산 유통을 위한 유전자 변형 돼지를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하는 동안 10년을 커버하는 장기 마케팅 도구다. 실제로 배설물에 인 성분이 적게 함유된 유전자 변형 돼지를 북미 산학협동으로 만들어내는 데 9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윤을 위해서는 대량생산이 중요한데 옥자의 젖꼭지는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개발된 돼지는 젖꼭지가 여럿인가.
=생산력을 제고하려면 생체주기가 짧고 많은 새끼를 낳아야 한다. 그래서 비육장의 돼지들은 외젖꼭지가 아니다. 화면이 어두워 자세히 안 보이지만 몸도 옥자보다 작고 피부에 얼룩도 있다. 기형으로 기어다니는 돼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도저 같은 낸시는 옥자까지 도축하려고 한다. 루시라면 살려서 왕관 씌워 마케팅에 더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옥자는 디즈니적으로 귀엽지는 않지만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스러워야 했을 텐데 외양과 움직임의 디자인에서 어떻게 해결책에 도달했나.
=첫눈에 귀엽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수하자고 장희철 크리처 디자이너와 논의했다. 개도 첫눈에 자지러지게 귀여운 애가 있는가 하면 종에 따라 퍼그처럼 뭉툭하지만 사나흘 보면 더 정드는 종이 있지 않나. 두툼하고 둔탁한 느낌과 디즈니 스타일과 다른 콧구멍만한 작은 눈을 생각했다. 눈이 크면 빨리 호소할 수 있지만 큰 덩치의 동물이 눈까지 크면 체구가 실감나지 않는다. 하마나 코끼리를 봐도 안구가 크진 않다. 눈으로 뭔가를 호소할 때는 카메라가 빅 클로즈업으로 다가가면 된다고 봤다. 대신 귀를 키웠다.
-옥자는 오른쪽 콧구멍만 인중과 연결돼 있다.
=자연스럽게 자랐지만 태생은 유전자 조작이라 불균형이 있다. 장희철 디자이너와 두 번째 작업이라 <괴물> 디자인 기간의 반 정도에 해냈다.
-절벽에서 미자를 구하는 장면을 보면 지능도 유전자 조작으로 올라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떨어져도 죽지 않음을 알뿐더러 행위의 논리적 결과를 예측하고 있다.
=다른 슈퍼돼지의 지능은 모르지만 옥자는 물리법칙을 아는 듯하다. 나야 오로지 옥자가 어떤 귀여운 자세로 추락할까만 고민했다.
-몸을 일으킬 때에도 단번에 안 일어나고 옆으로 한번 굴러 뭉기적거리고 일어나는 옥자의 모습에는 감독의 습관이 혹시 반영돼 있나. (웃음)
=비만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다. 내 주변에 비만인도 많고. 나도 117kg까지 나간 적이 있다. 우리는 결코 한번에 일어날 수가 없다. 90도로 한번 꺾어 팔에 의지하며 일어나야지 불쑥 일어나면 허리를 다칠 수 있다.
-추락 후 미자의 사과와 옥자의 반응은 둘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잘 보여줘서 재미있다.
=옥자는 “내가 죽을 뻔했구만 감 하나로 덮어?” 하는 토라진 태도고, 거기 대응하는 미자의 행동을 보면 둘 사이에 이런 상황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적 감수성이라면 미자가 울고불고했겠지만 무뚝뚝한 한국 산골 아이 미자는 다르다.
-미자와 옥자는 한쪽이 어머니 역을 하지 않는 수평적인 관계다.
=영화에서는 옥자가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 끌려갔기 때문에 미자가 분투를 벌이고 뛰어다니는 거지 대등한 솔 메이트다. 만약 브라질 아마존에 갔더라면 옥자가 미자를 지키거나 둘이 함께 헤집고 다녔겠지.
-<괴물>의 현서가 어머니 없는 가족의 어린 엄마 역할을 했다면 미자는 나이브하지 않은 시골 소녀다. 서울에 상경해서도 별다른 문화충격을 느끼는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시골이라고 순수하고 세속을 등진 것은 아니다. 컴퓨터는 군민회관 같은 곳의 바자회에서 가져왔을 법한 구형모델이지만 그걸로 인터넷 다 하고 ‘레티나 디스플레이’에도 관심이 있다. 서울 갈 때도 미란도 코리아 주소를 검색해 야무지게 찾아간다.
-<괴물>의 크리처가 참고한 인간 모델로는 배우 스티브 부세미, 다케나카 나오토가 있었는데 옥자의 경우는.
=(태블릿으로 <쉘 위 댄스>의 다구치 히로마사 사진을 보여주며) 영화에서 항상 땀에 절어 있고 되게 소심한데 춤출 때는 엄청 정열적인 귀여운 캐릭터다.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한국 문화를 연기시킨 것 아니냐는 반응도 많다. 제이크 질렌홀의 TV 동물박사 연기가 시끌벅적한 한국 예능 프로그램 진행과 비슷하다거나 낸시(틸다 스윈튼)의 의상이 한국 아주머니들의 취향과 비슷하다거나.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배우들이 그런 표현을 너무 좋아해 말리느라 힘들었다. 샤넬 한복도 틸다가 우겨서 졌다. 조니 윌콕스 박사(제이크 질렌홀)를 보고 노홍철씨 같다는 반응이 촬영 중에도 있었는데 존 론슨과 내가 제이크에게 보여준 영상은 1960년대 영국 텔레비전 동물쇼 진행자 조니 모리스의 방송이었다. 군복 입고 나와서 침팬지랑 서로 때리고 동물한테 밟히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하긴 낸시의 옷차림도 미국 평자들은 공화당 지지자 계열의 패션이라고 부르더라. 미란도 기업이 고용한 사병 블랙초크도 한국인에게는 백골단을 연상시키지만 비슷한 이름의 미국 민간 용병(보안컨설팅) 회사가 실존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금돼지 순도를 어금니로 깨물어 확인하는 행동은.
=존 부어먼 감독의 <제네럴>을 보면 아일랜드 장물아비가 같은 행동을 한다. 한국과 아일랜드만의 풍습인가? (웃음) 우리가 한국적인 요소라 생각한 것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 세계적이다. 현대의 도시적 생활세계는 그만큼 균질화돼 있다. 나도 낸시 의상을 보며 <마더>의 김혜자 선생님 옆에서 춤추던 아주머니랑 비슷하지 않은가 싶었다. 제일 좋았던 틸다의 아이디어는 목베개다. 베개를 덜렁거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걸 별로 창피해하지 않는 안하무인적 기운이 낸시에게 있다. 블랙초크의 모델은 유전자 변형 식품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에 의해 제3세계 농부들의 진압에 투입됐다는 보도가 나왔던 회사다.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찍은 <칠드런 오브맨>의 거리 풍경도 한국인에게 익숙한 참상과 다르지 않다. 결국 비슷한 거다.
-동물해방전선(ALF)은 실존하는 단체다. 연락을 취했나.
=두명을 만났다. 그들은 결코 공식 단원임을 인정하지 않고 서포터라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학 동물 실험실을 습격해 무단침입 죄목으로 실형을 살기도 했다. 헤드쿼터가 없는 점조직으로 기본적 프로토콜만 공유하는 조직으로 안다. 준비과정에서 <언더그라운드: 1990년대 ALF 후원자 그룹 매거진 모음>이라는 책을 구입했는데 미팅 자리에서 폴 다노도 슬그머니 같은 책을 꺼내놓더라. 근면성실한 배우다! 축산 대기업의 로비력이 막강하다 보니 미국에서는 ALF를 중동 테러리스트와 동격으로 치부한다고 들었다.
-현실의 ALF는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비폭력주의는 아니지 않나.
=창립자 로니 리의 원칙은 극중 폴 다노가 말하는 40년 원칙과 동일하다. 다만 현실에서 항의하다 보면 경비인력이 다치기도 하고 기물도 파손된다. 영화에서도 옥자를 트럭에서 떨어뜨리는 등 실수투성이다. 두 사람에게도 “당신들의 이상이 훌륭하고 그 이상에 동의하지만 슈퍼히어로로 그릴 생각은 없다”고 했고 “당연하다. 우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지나친 괴짜단체로만 그리지 말았으면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많은 영화에서 동물보호운동가들이 할 일 없는 사람들로 그려졌기 때문에 나온 우려일 거다.
-ALF 단원 중 실버와 블론드는 커플로 보인다.
=명확하지 않나? 서로 만지지 못해 안달이다. 어느 팀이나 서너명이 넘어가면 내부에서 연애를 한다. 유일한 여성 멤버 레드(릴리 콜린스)가 팀원과 사귀는 설정은 싫었다. 레드는 가장 냉정하고 정확하게 일을 진행하고 바주카포를 터뜨리고 운전을 맡는 역이기도 하다. 폴 다노의 제이는 조직 내에서 연애할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
순열조합의 묘와 깽판의 폭발
-봉준호 영화에서는 언제나 운동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격투보다 추격이 중심이다. 회현지하상가 추격전과 뉴욕 슈퍼돼지 축제의 ALF 시위 장면을 2대 세트피스로 본다면 각각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뉴욕 장면은 프로듀서들이 성취한 기막힌 순열조합의 묘다. 조립식 무대를 세번 짓고 해체하며 실제 뉴욕 파이셜 디스트릭트 촬영분과 브루클린 창고에 세운 블루스크린 촬영분, 밴쿠버 무역센터 지하 분량을 섞었다. 무대 정면 숏은 창고에서, 빌딩과 군중이 보이는 앵글은 실제 길거리에서 찍은 거다. 봉합이 감쪽같아 우리조차 헷갈렸다. 회현지하상가 장면은 질감 차이를 부각시켰다.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차갑고 광택나고 미끈거린다. 나무와 흙의 질감 속에 살아온 옥자와 미자는 도시에서 계속 유리벽에 막히고 미끄러지고 부딪힌다. 또, 도시에 와서 둘은 계속 박스 안에 갇힌다. 창 없는 복도에 갇히고 지하상가로, 지하주차장으로 계속 내려간다.
-내용의 긴박함과 비극성을 떠나 추격의 절정에서 카니발스러운 음악을 선호한다. 회현지하상가 시퀀스 막판에 흐르는 마케도니아 브라스 밴드 잠보 아구세프의 음악을 듣고 <괴물>의 <한강찬가>를 추억하는 관객도 있을 거다.
=무수한 물건이 있는 지하상가는 정보 과잉의 공간인데 그것이 깽판의 절정에 이르니 음악과 사운드도 완전 혼을 빼놓겠다는 방향으로 갔다. 그러다 조용해지면서 존 덴버 아저씨가 등장한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에도 존 덴버 노래가 나왔나? 몰랐다. 편집실에서 어릴 적 형이 즐겨 듣던 <Annie’s Song>을 넣었는데 잘 어울려서 결정했다.
-충돌의 종착점이 천원숍이어야 했던 이유는.
=혼란의 극점이니 색색의 온갖 물건이 있는 곳이어야 할 것 같았다. 레드가 우산을 집어들어도 어색하지 않고 옥자의 발바닥에 박힐 파편도 있어야 하고, 슬로모션이 걸릴 테니 사물들이 이리저리 튕기고 팔락였으면 했다. 예를 들어 행남자기 매장이었다면 곤란하다. (좌중 폭소) 옥자 목소리 연기를 한 이정은 배우가 휠체어를 타고 비명 지르고 옥자가 코너를 도는 순간부터 남양주 세트장 촬영분이다. 이하준 미술감독이 기막히게 지하상가를 복제했고 다이소 쪽에서 적극 협찬해줬다.
-옥자와 인간 배우가 뒤엉키는 장면에서 테니스 공을 연기의 기준점으로 쓰지 않고 실제 모형을 썼다고 들었다. 에릭 드 보어 시각효과감독이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어떤 도움을 줬나.
=(현장 사진을 보여준다. 옥자의 얼굴 모형이 몸크기만 한 틀에 붙어 있고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장치가 있다.) 미자는 만날 얘를 만지며 연기했다. 에릭 드 보어가 어디까지 손발이 들어가도 되는지 기술적 조언부터 나중에 CG로 커버가 가능한지 여부를 즉석에서 판가름해줬다. 그의 오른팔인 애니메이션 슈퍼바이저 스티븐 클리가 직접 연기하며 후반작업 CG애니메이션과 현장을 연결했다. 몸을 대신한 틀은 배우보다 촬영감독을 위한 것으로 앵글에서 옥자의 크기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스스로 미쳐가는 동물학자 조니 윌콕스는 대변하는 이슈가 많아 좀 벅차 보이기도 했다. 동물을 사랑해서 직업을 택했는데 기업의 후원이 공장 축산의 이윤을 늘리는 연구에 집중되다 보니 분열증을 일으킨 경우다. 여성 보스 아래에서 일하는 상황을 수용 못하는 면도 보인다.
=루시에게 모욕당하고 조니가 기도하는 옥자의 폭력적 짝짓기 장면을, 나는 동물이 실제 축산업에서 겪는 수난으로서 접근했지만 존 론슨 작가는 조니가 품은 여성에 대한 병적 감정도 은연중에 표현한 것 같다. 조니가 옥자를 루시와 동일시했을 수 있다.
-낸시와 루시의 관계를 묘사한 신이 삭제된 건 아닌가? ALF 단원을 비롯해 조연 캐릭터의 스토리도 덜 개발돼 시리즈의 첫편 같은 기분도 들었다.
=원래는 프롤로그 직후 낸시가 루시와 통화하는 숏이 있었으나 루시의 화려한 연설에서 조용한 강원도 풍경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좋아서 포기했다. 그 숏이 살아남았다면 처음부터 루시와 낸시의 이중 관계를 포석하는 장점은 있었을 거다. ALF에 대한 미니시리즈를 보고 싶다는 트윗도 봤다. 그러나 <옥자>는 미자와 옥자의 시점에 입각한 영화이니 둘의 관점에서 보이고 추측되는 만큼이면 적절하다고 봤다. 다른 누가 후속 시리즈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설국열차> TV시리즈도 관여하지 않고 있다. 스콧 데릭슨 감독(<닥터 스트레인지>)이 잘하겠지.
-원래 감성과 지성을 지닌 옥자는 도리어 인간에게 학대받은 후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한동안 ‘짐승’이 된다. 그런데 옥자가 물리적으로 해치는 인간은 미자뿐이다. 미자가 팔을 다치는 장면은 정확히 <모노노케 히메>의 멧돼지 공격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보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작은 동물이 소녀의 손가락을 물었는데 가만히 기다리자 귀를 내리고 할짝할짝 핥는 장면에서 더 영향을 받았다. 찍을 때도 생각했고.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공장식 축산업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을 사전에 배우들에게 보여줬다는 릴리 콜린스의 인터뷰를 들었다. 콜로라도 도살장 견학 외에 어떤 리서치가 있었나.
=허구한 날 도살장을 다닐 수 없으니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다. 내레이션이 일체 없는 독일 작품 <아워 데일리 브레드>가 큰 도움을 줬다. 특히 이마에 스턴건(충격총)을 써서 동물을 절명시키고 회전통에서 굴러나오게 하고 거꾸로 매다는 도살장 구조를 빌려왔다. 오스카 단편다큐멘터리상 후보였던 <리퍼>(The Reaper)는 스터너라 불리는 방아쇠 당기는 담당자의 일상을 “동물을 죽여 자식을 먹인다”라는 컨셉으로 지켜보는 영화다. 살해와 부양의 개념이 병치된다. 촬영도 훌륭하다. 그 밖에도 식품산업 실상에 관한 교육적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에도 많다. <푸드 인코퍼레이티드> 등등.
-동물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상품으로서 몸의 일부를 채취당한다는 설정이 <옥자>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해 보인다. 마블링을 추출해 검사하는 기구도 등장하는데.
=만든 소품이 아니라 업계에서 쓰는 물건이다. 찔렀다 빼면 고기가 뽑혀 나오고 소는 몸에 구멍이 난 채로 멍하니 서 있다. 쌀 수매할 때 농협에서 가마니를 쑤시는 도구를 살아 있는 소에게 쓰는 셈이다. 실제 도살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도 생명체에서 제품으로 전환되는 경계가 어디냐였다. 스턴건으로 절명당했을 때도 소는 여전히 동물이다. 목을 따서 거꾸로 매달아 피를 뽑을 때도 여전히 죽은 동물 같다. 그러다 0.1초 만에 소 전체의 가죽을 벗기는 거대한 기계가 다가오고 순식간에 붉은 살덩이가 출렁한다. 그 순간부터 제품이구나 싶었다. 동물의 가죽이 벗겨지는 사운드가 있다. 엄청난 기계음 소용돌이 속에 그 소리만 따로 들렸다. 정말 음향효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소리였는데 <옥자>에는 그런 장면이 안 나온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시장에 가면 닭을 잡아서 줬다. 그 울음소리와 닭털 냄새가 강력하게 몸 안에 남아 있다. 요즘 스티로폼 접시에 얹힌 정육을 사는 현대 소비자에겐 그런 과정이 완전히 가려져 있다.
=도살장을 유리벽으로 만드는 순간 전세계가 육식을 멈추게 될 것이라는 말도 있다. 바코드가 박힌 마트 제품으로 보니까 안전한 구역에 머물 수 있는 거다.
-<설국열차>의 양갱과 <옥자>의 육포는 휴대할 수 있는 식품이고 원재료를 상상하기 힘든 형태의 식품이기도 하다.
=루시가 육포 먹는 모습을 꼭 넣고 싶었다. 자기들이 생산하는 식품을 정작 먹지 않는 내부자들도 있지만 루시는 유전자 변형식품에 대한 공포가 과장이라는 믿음을 정말 갖고 있다. 미란도 기업 내부자들이 직접 먹지 않는다면 영화의 층이 너무 단순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최소한의 변명이랄까. 사실 유전자 변형 동식물에 관한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아무튼 공룡기업이 그렇게 돈을 퍼부어도 안전성을 입증한 연구는 아직 없지 않나.
=위험성을 입증한 프랑스의 실험이 있었는데 반박이 다시 나왔다. 그런데 반박한 과학자들이 식품기업의 장학생이었음이 폭로됐다. 위험성을 입증하라는 요구가 나왔고 “아니 당신네가 안전성을 입증해야지 우리가 왜 위험성을 입증해야 하는가”라는 대응이 있었다. 현재 유전자 변형식품에 관해 한국과 일본은 너그럽다. 참여연대가 금지는 못하더라도 알고는 먹도록 성분을 표기하라는 주장을 했는데 국회 통과가 안 된 상태다.
-<옥자>의 도살 장면은 다큐멘터리에서 본 현실보다 오히려 덜 끔찍하다. 강제수용소처럼 보이는 비육장의 풍경이 더 강력했다.
=콜로라도에서도 “우리 시스템이 가장 인도적”이라고 자랑하더라. 위생관리도 잘하고 스턴건 도살은 NGO도 추천하는 방식이다. 나 역시 도살장 내부를 볼 때는 압도적 냄새와 초현실적 이미지에 멍했고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 눈으로 사진을 찍겠다고 긴장해 있다가 바깥으로 나와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기나긴 소의 행렬을 마주쳤을 때 무너졌다. 소들의 경로는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이 고안한 선진적 방식에 따라 공포를 최소화하도록 디자인돼 있었지만 닥칠 일을 모르는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힘겨웠다. 6개월간 살이 찌워진 다음 단계적으로 도살장에 가까워질 수만 마리 소의 무리가 자동차로 30분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육장 디자인에 현대사가 남긴 이미지는 영향이 없었나? 클레이애니메이션이지만 <치킨 런>에도 2차 세계대전 수용소 같은 양계장이 나온다.
=당시엔 떠올릴 겨를이 없었고 다만 미술팀과 철조망 디자인은 2차 세계대전 수용소, 특히 아우슈비츠 자료를 참조하자고 이야기했다. 동물의 입장에서 상황을 간접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옥자의 시점숏도 있고 불특정 다수 돼지의 시점도 있다.
-결말에 아기돼지의 구조와 관련된 플롯이 몸속에 혈연 없는 어린 것을 품고 구한다는 면에서 <괴물>과 너무 비슷하다는 주저는 없었나.
=유사하다고 느꼈지만 상관없었다. 2고까지는 없던 설정인데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자세히 보면 제이와 미자가 도살장에 들어가도록 케이가 전기 철조망을 벌려줄 때 문제의 돼지 가족이 옆에 있다. 그 광경을 보고 학습한 아빠 돼지가 감전의 고통을 참고 철망을 벌리는 것이고 엄마 돼지가 아이를 밀어 내보내는 거다.
-<옥자>를 보면서 동물권 운동가들을 다른 영화처럼 놀림감으로 삼을까 봐 우려했던 입장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동물권 옹호와 채식주의를 유난 떠는 행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럴 거였으면 ALF 단원들이 햇살 속에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에필로그를 시나리오에 쓰지도 않았겠지. 미자는 옥자 때문에 울고불고하니 백숙과 생선도 먹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는데 동의할 수 없다. 우리 대다수가 동물을 사랑하면서 삼겹살도 먹는다. 육식하는 사람이 모두 동물을 학대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대량생산에 동물을 편입시킨 공장식 축산이다. 지금 같은 축산업을 유지하면 소요되는 물과 사료, 메탄가스와 폐수로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수학적으로 지탱이 불가능하다. IMF 때 금 모으듯 전 인류가 합의해 육식을 줄여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감정을 떠나 간단한 산수이고 더이상 ‘유난 떠는’ 동물 애호가들만의 이슈가 아니다. 완전채식을 하건 1년에 한번 개를 먹건 그것은 개인이 알아서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고기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산술적으로만 봐도 환경 재앙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윤리적 선택의 단계가 있다.
소녀의 거래
-미자네는 이웃이 하나도 없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옥자는 어쩌면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곳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고 조금만 사람이 주변에 많아도 문젯거리가 되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즉, 고립된 산골 말고 나머지 세계에서는 행복한 공존이 어렵다는 체념의 표현 같기도 하다.
=제작진끼리는 미란도 기업이 어떤 기준으로 26개국의 슈퍼돼지 사육자를 선정했을까에 대해 토의했다. 우수 축산농은 말뿐이고 정작 제품이 될 돼지는 따로 키우고 있으니 아마 마케팅에 도움될 지역색이 뚜렷한 경치 좋은 곳에 사는 농부를 선정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사실 주희봉(변희봉)도 그냥 동물을 산에 풀어놓는 것 외에 테크닉이 없다. (웃음)
-“옥자는 돈으로 살 수 없다더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미자의 여정을 시동하는데 결국 미자는 옥자를 산다. 가족을 포함해 살 수 없는 게 없는 세상이다. 어떻게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입장(동물은 상품이 아니라는 입장)과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입장의 투쟁이므로, 옥자를 되찾은 결말은 미자의 성공이지만 만물은 상품이라는 입장이 이긴 셈이다.
=미자도 인정하는 셈이 되니 씁쓸하다. 폴 다노의 파트너인 배우이자 작가, 연극 연출자인 조이 카잔(<빅 식> <루비 스파크스>)이 <옥자>의 시나리오를 읽고 미자가 금돼지로 낸시와 거래하는 장면에서 시나리오가 좋은 의미에서 다른 레벨로 올라간다는 감상을 줬다. 반면 이 허무한 귀결이 클라이맥스 맞냐는 반응도 내부에서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ALF가 고기 공장을 뒤집어엎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니지않나.
=북미 최대 규모 ALF 시위를 도살장에 소집해 모든 돼지를 해방시키는 아이디어를 약 이틀 반 정도 생각했지만 역시 싫었다. (웃음) 극과 극의 두 반응이 공존해서 나로서는 좋다. 촬영 당시에는 당연히 씁쓸한 이야기라 여기며 찍었는데, 아쉬워하는 반응을 접하다보니 요즘은 미자가 낸시 수준에 맞춰준 거라고 설명하고 다닌다. 낸시는 설득될 사람이 아니다. 죽여야만 팔 수 있으니 죽이고 자신의 자산이니 집에 돌려보낼 줄 수 없다. 방법은 상품으로서 사는 것 뿐이다. 미자가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고 맞춰주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중이다. (웃음)
-에필로그 전 마지막 숏이 아름답다. 미자와 할아버지가 밥을 먹자 아기돼지는 마루에 올라와 엉덩이를 들이밀고 마당을 향해 앉고, 원경 퇴창으로 옥자의 얼굴이 보인다. <괴물>의 매점 라스트신의 변주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끝내려 했다. 네댓개 레이어로 감싸인 숏이다. 새끼돼지가 궁둥이를 내려놓는 속도가 좋지 않나? 여기서 옥자 얼굴이 좀 어두운데 “옥자가 뒤끝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미자가 잘 때 자기를 미란도에 넘긴 희봉의 방에 들어가 앞발로 지그시 눌러준다거나. (좌중 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