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옥자>는 내게 이전까지 몰랐던 그의 작가적 관심사를 새로 알게 해주었다. 그가 현실의 어둡고 부패한 구석에 예민한 비평적 안테나를 들이대는 것만큼이나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킬킬거리며 즐기는 명랑만화의 세계 비슷한 것을 즐기는 취향이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된다. <옥자>는 양립하기 힘든 두 세계를 양립시킨다. 자연친화적이고 목가적이며 결핍을 결핍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세계와 자본주의적이고 탐욕적이며 소비 지상주의로 치닫는 육식주의 세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비극적 페이소스를 끌어내며 전자의 세계로 안전하게 퇴각하는 결론을 담고 있다. 전자의 세계는 판타지에 가까우며 지금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우화처럼 보이는데도 지극한 위로를 준다. 후자의 세계는 현실에 가깝지만 전형적이며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에 짓눌려 과도하게 희화화된다. 봉준호는 전자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후자의 세계를 끌어들인 것 같은데, 영화를 보는 동안 전자의 세계를 보는 즐거움이 쏠쏠한 대신 후자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하이 코미디 톤을 장착했는데도 억지로 엔진을 가동한 듯 부드럽게 탄력받아 나가는 전개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옥자가 사는 강원도 산골 장면들과 처음 옥자가 추격전을 벌이는 한국의 어느 도심 복판의 공간을 묘사하는 봉준호의 연출 감각은 펄펄 뛰는 생선을 대하는 것 같다. 별다른 사건 없이 미자(안서현)와 옥자가 뛰노는 산골 깊숙한 풍경들의 시각적 정보가 차근차근 세밀하게 나열돼 있는 화면 속에서 인물이나 사물의 질감이 빼곡하게 느껴지는 초반 화면들은 거기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관객의 집중력을 자연스레 끌어낸다. 한국 도심의 어느 산동네 주택가를 횡단하며 미자가 옥자를 태운 트럭을 쫓는 추격전을 벌이는 중반 단락에서 그 동네의 지형지물은 강원도 산골을 닮아 있다. 추락과 하강의 현기증을 감내하게끔 설계된 로케이션을 무대로 봉준호가 의도한 카메라의 종횡 움직임은 공간 자체를 칼로 쓱싹 경쾌하게 베어내는 쾌감을 준다. 곧이어 지하철과 연계된 지하상가에서 옥자를 둘러싼 추격 소동극이 벌어지는 동안 수평과 수직의 면을 분방하게 교차시키며 감독이 꼼꼼하게 배치한 면들과 그 면들에 위치한 인물의 움직임이 시각적 화음을 이루는 것은 장관이었다.
그에 반해 뉴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대다수 인물들이 감정적 동요가 심한 크레이지 희극에 어울리는 연기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밋밋하고 전형적으로 다가온다. 친환경 기업가를 연기하는 루시가 집전하는 중반의 회의 장면 같은 건 예외적으로 재미있지만 그 밖의 다른 장면들은 극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기능적 소모 이상의 느낌을 주지 못한다. 심지어 미자와 옥자의 재회를 극적으로 의도한 뉴욕의 집회 장면은 재앙으로 귀결되는 극의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내적 활기가 약한데, 한국 배우들과 외국 배우들의 연기와 행위의 뉘앙스가 다른 것도 있겠지만 공간을 수평, 수직으로 나눠 재구성하는 봉준호 특유의 감각이 이 장면들에선 위축됐기 때문일 것이다. 집단농장에서 사육된 슈퍼돼지들이 도살장의 생산라인에서 죽어가는 후반부 재난 장면에서 미자가 달리고 보는 행동의 단위들을 능숙하게 이어붙이면서 공간의 입체감을 부각시키는 대단원의 장면은 그때까지의 처진 화면의 긴장감을 다시 끌어올리는데 여기서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서의 존엄을 지닌 동물을 살덩어리로 제시하며 그 살덩어리들이 미자를 위협하는 듯 다가오거나 미자의 시야에 느닷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한 침입감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봉준호만의 독특한 수사
이 모든 장단점을 포함해 <옥자>가 봉준호의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일급 오락영화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봉준호의 이전 영화들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숏의 ‘잉여’적 존재감을 찾을 수 없어서 다소 혼란스럽고 허전하다. 이에 관해 뭔가 생각을 정리하려고 봉준호가 남긴 인터뷰를 찾아 읽다가 <옥자> 개봉을 앞두고 <씨네21>에 실린 김혜리 편집위원과의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김혜리가 “봉준호 영화에는 기능 없이 ‘노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장르영화에 대해서는 대단한 칭찬이기도 한데요. 시나리오를 퇴고할 때 어떤 장면부터 삭제하는지 궁금해지곤 해요”라고 묻자 봉준호는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잉여의 숏이 없다는 말씀 같은데,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촬영 단계에서도 전 회차를 줄이려고 해요. (중략) 제 영화는 숏 안에서 움직임이 많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숏으로 신을 만들까 강박적으로 생각해요. <산딸기>(1957) 같은 잉마르 베리만 초기작이나 로베르 브레송 영화를 봐도 불필요한 숏이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것이 궁극의 리듬을 만드는 거죠. <조디악>(2007)은 긴 영화이고 <펀치 드렁크 러브>(2002)는 짧은 영화지만 영화적 리듬이 둘 다 완벽하고요. 과연 잉여의 숏을 구사해서 그런 리듬이 나올지는 의문입니다. 영화의 리듬 중 숏과 숏의 경계는 일부에 불과하고 숏 내부에 아주 많은 리듬이 있죠. 그걸 딱 손에 넣는 순간 감독으로서 개안할 텐데 전 대체 그날이 언제 올지.”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잉여의 숏’의 부재에 관해 봉준호는 말하고 있는데 나는 좀 다른 얘기를 덧붙이고 싶다. 모든 훌륭한 영화들이 그렇듯이 봉준호의 영화는 장면 전환이 치밀하고 군더더기가 없는데, 이는 그가 장면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단단히 묶고 상호 연계시키며 그만큼 인서트컷의 효과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봉준호는 그렇게 빡빡하게 연결시키는 숏들의 연결 리듬 내에서도 내 기준으로는 잉여의 순간을 곧잘 만들어냈다. 영화이론에서 ‘잉여’(excess)의 개념은 영국 이론가 스티븐 히스가 1970년대에 쓴 <영화와 체계: 분석의 용어들>에서 처음 사용됐는데 지독하게 난삽하게 쓴 내용에도 불구하고 대략 요지를 추스르면 영화를 대할 때 유용한 흥미로운 통찰이 거기 있다. 히스는 영화에 있는 이미지가 작품의 통일성을 뛰어넘을 때 또 다른 하나의 드라마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미국의 크리스틴 톰슨은 스티븐 히스의 이 개념을 받아들여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를 분석할 때 도구로 사용했는데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숏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도 그 밖의 것을 품고 있을 때 이 잉여를 지각하는 것은 영화의 구조에 대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봤다. 내러티브에 충실한 할리우드영화들에서 히치콕이나 포드의 영화에는 이야기 전개의 기능적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고서도 내러티브에서 튕겨나와 홀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숏들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것이 잉여의 숏일 것이다. 거꾸로 내러티브 전개에는 무심한 듯 길게 이어지는 숏들을 통해 잉여로 내러티브를 대치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스타일의 영화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내러터브에 충실하면서도 고유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대다수 장르 이야기체 영화에서 이런 잉여적 숏의 유무는 특정 영화의 고유성을 식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데이비드 보드웰도 비슷한 얘기를 하는데 영화 속의 잉여는 정확히 단호히 하려는 충동을 피하는 요소이며 잉여를 의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화를 더 깊이 볼 수 있게 하고 그 낯섦에 이끌려 우리의 호기심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잉여적 순간의 절정을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에서 이미 충분히 느낀 바 있다. 이 영화에서 인물의 시선과 그 시선을 이어받아 연결되는 반응화면들은 첫 도입부 장면부터 ‘숏A+숏B=AB’라는 고전적인 편집도식을 벗어난다. 형사 박두만(송강호)이 논두렁에 있는 시체를 현장 검증할 때 그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하는 주변 꼬마와 박두만이 시선을 교환하는 장면에서 박두만은 꼬마를 보고 그 꼬마의 행동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데 이런 식의 화면 연결은 영화 내내 되풀이된다. 경찰서에 온 강간 가해자와 강간 피해자의 오빠에게 카메라가 줌인하는 화면 위로 누가 범인인지 알아맞혀보라고 박두만에게 내기를 거는 서장의 말이 깔릴 때,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자기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용의자를 다그치다가 모르겠다고 독백하는 박두만의 클로즈업이 잡힐 때, 에필로그에서 나이 든 박두만이 오래전 살인사건 현장이었던 논두렁에서 어느 소녀를 만나 수상한 남자를 봤다는 진술을 들을 때의 그의 반응화면이 주는 느낌은 정반합의 숏 연결의 규칙에서 장쾌하게 벗어나는, 지속적으로 연결체계를 거스르며 잉여의 감정과 의미를 쌓은 봉준호만의 독특한 수사법이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변희봉이 연기하는 아파트 경비원이 지하실에서 오래된 아파트 괴담을 장황하게 얘기하는 장면이나 휴지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놓고 논쟁하며 주인공 부부가 휴지를 실제로 거리에 펼쳐놓는 장면 같은 것은 이야기의 전개를 잠시 멈추고 굳이 잉여의 장면들로 가지를 치는 의식적인 장치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살인의 추억> 이후 봉준호는 이야기를 지체시키면서까지 잉여의 순간을 연장하는 수사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괴물>에서 숱한 잉여의 순간들은 포식자와 어미의 정체를 오가는 듯 혼란을 주는 괴물의 몇몇 장면에서의 이미지들과 괴물의 아가리를 닮은 듯한 한강 저변의 풍경 이미지를 느닷없이 제시할 때 생겨난다. <마더>에서 모성의 정체에 숨어 있는 광기를 포착하면서도 굳이 그걸 명시적인 이미지로 제시하는 대신 그림자에서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는 마지막 장면은 봉준호의 연출이 가장 심원한 곳까지 가닿은 잉여의 순간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인물들의 명확히 지시되지 않는 비정상성의 단서들 외에 그들의 괴물성과 나란히 붙어있는 인상을 주는 것들은 공간, 이를테면 주인공 혜자가 비오는 날 폐가 옥상에서 보는 곳곳에 불이 꺼져 있는 산동네 마을의 이미지였다.
이런 것들을 상기해보면 <옥자>에서는 대다수 장면들이 명확하고 기능적이다. 예외로 거론할 것이 있다면 미자를 연기한 안서현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옥자의 눈이다. 옥자를 보살펴주고 동시에 옥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미자는 옥자가 미란다 그룹의 상품으로 끌려간 후에 옥자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얼굴과 몸을 보여준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학교도 가지 않고 옥자처럼 자연에서 뒹굴고 놀며 먹을 것을 채집하는 문명 이전의 삶을 사는 이 소녀가 오로지 몸에 의지해 도시의 여러 구조물이나 자동차와 같은 문명의 산물에 직접적으로 부딪치며 생채기를 얻는 물리적 증거들이 화면에 시연되는 동안 옥자의 눈은 천진한 것에서 핏발 선 것으로 바뀌며 얌전한 순둥이에서 광폭한 괴물로 변해간다. 이야기의 장치 속에 자리한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이들의 수난과 구원을 보조하는 기능인들에 불과할 것일진대, 이 복합적인 현실의 착취 시스템 안에서 놀랍도록 순진무구한 소녀와 디지털 돼지를 사랑해 마지않는 봉준호의 탈현실적 판타지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기
나는 봉준호가 20세기의 영화 전통을 21세기에 되살리는 몇 안 되는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시도하는 디지털 영화의 경계 확장 모험에 조마조마한 심정을 갖고 있다. 옥자의 눈, 옥자의 피부 질감, 그의 눈을 쳐다보고 소통하며 그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행복해하는 미자, 이런 광경은 무에서 유로 디지털 기술을 통해 창조된 것이다. 현실에서 물리적 과정을 통해 재현된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 화면의 질감이 생생한 만큼이나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영화 말미에 미자가 옥자에게 뭔가 말을 하고 있을 때 화면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결국 이 미지의 영역에서 봉준호가 그간 시도하고 성취했던 잉여의 결정물들을 대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시도는 영화의 미학적 시도의 핵심이다. 나는 여전히 봉준호의 지지자이기 때문에 지금 봉준호가 시도하고 있는 디지털 재현의 시도들이 과도기라고 여기며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다만, 그가 좀더 현실적 공간에서 실제 인물들의 재현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더 자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