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의 파리 상영에 이어, 노르망디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다리우스 콘지 감독과 전화로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를 기억하는 그가 다정하고 섬세하게, <옥자>에 대해서는 물론, 촬영감독이라는 여전히 미스터리한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1991), <세븐>(1995) 이후 많은 촬영감독들은 물론 시네필들에게 당신은 이름만으로도 영화를 선택하게 하는 존재다.
=나는 내 일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하지 않는다. 판단하는 것, 평가하는 것 그 수준이 어떻다라고 말하는 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대중의 몫이자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달린 것이니까. 만약 단 하나의 스타일이 영화에서 존재한다면, 그건 감독의 스타일일 것이다. <옥자>라면 봉준호의 스타일이 느껴지면 된다. 나의 스타일 혹은 인장을 남긴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다.
-<옥자>의 촬영은 어땠나.
=<옥자> 촬영현장 헌팅을 처음 갔을 때를 기억한다. 공항에서 내려 바로 그 다음날 차를 타고 강원도로 향했다. 깊은 산속이었고 날이 밝자마자 봉 감독과 함께 나는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옥자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미 시나리오를 다 읽었지만 시나리오에 쓰이지 않은 더 자세한 이야기 말이다. 미자(안서현)는 부모를 일찍 잃고 이 깊은 산속에서 오로지 옥자와 함께 지내는 산골 소녀라는 것, 맑은 물과 공기, 산줄기에 둘러싸인 마치 숨겨진 무릉도원과도 같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세상과 분리된 공간에서 할아버지(변희봉)와 함께 살아가는 미자에 대한, 미자와 언제나 함께하는 옥자가 얼마나 영리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짜고짜 바로 촬영을 어떻게 할지, 테크닉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정말 좋았다. 그렇게 산속을 걷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그 장소를 온몸으로 느끼고 미자와 옥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 세계에 완전히 몰입되어 들어가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으니까.
-처음 만난 한국 스탭들과의 작업은 순조로웠나.
=촬영이 시작되고 만난 스무명 남짓한 한국인 스탭들은 모두가 다들 총기로 눈이 반짝이고, 생기 넘치고, 똘똘해 보이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는 자세로 무장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옥자 이야기에 푹 빠지다 못해 마치 옥자를 실존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말끝마다 옥자, 옥자를 연발했다. 정말 신기한 에너지였다. 미국인 스탭들도 이미 와 있었는데 그들은 그만큼 옥자를 눈에 선한 듯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한국인 스탭들과 같은 에너지를 뿜어내지 않았지만 이미 옥자가 ‘실존’하는 초현실적인 상황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처럼 마치 나 혼자만 그 산속에서 사랑스러운 옥자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내가 시차를 느꼈다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옥자가 그 자리에 정말 있다고 믿으며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가는 그들에게 옥자는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질 가상의 생명체가 아니라 이미 미자의 유일하고도 완벽한 친구이자 가족이었고 그 현장에 와 있는 존재였다. 나도 몇주가 지난 후 옥자의 이야기 속에 완전히 들어간 이후로 그들처럼 옥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들에게 막 장난 섞인 말투로 물어봤다. 옥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지금 어디쯤에 옥자가 있는지? 그들의 대답이 너무 진지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 아래 혹은 우거진 수풀 안에 옥자가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처음 겪어본 한국의 산골 분위기에 어떻게 빠져들었는지 궁금하다.
=처음 헌팅을 위해 강원도에 갔을 때는 가을이어서 산은 온갖 색채로 가득 차 있었다. 빨갛고 노랗고 주홍빛과 갈색, 그 색채에 완전히 반해 봉 감독에게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했는데, 우리가 촬영해야 할 공간은 이런 색채가 아니라 초록이라고, 초록으로 가득 찬 세상이라고 답했다. 한국의 여름이 얼마나 무덥고 습한지, 견디기 어려운지 그때는 몰랐다. 제임스 그레이의 <잃어버린 도시 Z>를 촬영하고 난 뒤라 어지간한 기후에도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좋은 일인 것 같다. 영화를 경험하면서, 촬영을 계속해가면서 내가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새로운 감독들을 만나 그들과 영감을 나누고, 젊고 열정으로 가득 찬 스탭들의 태도에 감동받고, 새로운 장비와 기술에 도전하고 실험하고, 촬영감독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나도 작품마다 다른 사람이 된다. 마치 한 송이 꽃이 봉오리에서 피어나듯, 혹은 어린 나무가 점점 자라나듯 성장하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가 <옥자>를 만드는 내내 느껴졌다. 어떤 현장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봉 감독은 아예 이 이야기에 빠지다 못해 완전히 들어가 있어서 그가 옥자에 대한 설명을 할 때면, 감동적인 이야기꾼이 되어 그가 가진 감정을 듣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웃음과 눈물, 기쁨, 슬픔, 환희와 안타까움…. 눈에 마치 별이 들어간 것처럼 눈동자가 반짝였다. 영어가 우리의 모국어는 아니지만 그는 필요한 언어를 아주 빨리 습득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영어가 아주 많이 늘어 있었다. 그가 언어를 빨리 익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눈빛으로 너무 많은 것을 전달하는 탓에, 가끔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통역을 거칠 때에도 그의 눈빛과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로 나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해 봉준호 감독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환상 동화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잔혹한 이 이야기에 대해,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배경과 그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봉준호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움직이는 이유와 논리가 이미 마땅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작은 디테일까지 다 ‘왜’에 대한 답이 있었다. 내가 할 역할은 단순했다. 그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가서, 그의 상상을 카메라로 실현시켜 주는 것이었다. 나는 <옥자>가 마무리된 지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그 여운을 느낀다. <옥자>처럼 강렬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바로 다른 영화를 들어간다는 건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계속 쉬고있고, 차기작을 천천히 염두에 두고 있으며 아주 많은 제안들을 거절했다. <옥자>와 같은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것, 봉준호와 같은 시네아스트와 함께하는 것은 흔히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색채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베네치아파 화가인 베로네세가 떠오를 만큼, 아름다운 초록빛의 향연이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옥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강원도 산 속 곳곳에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록빛을 다 담아내겠다는 듯, 초록이 가진 모든 뉘앙스를 살려가며 촬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몇주가 지나고 나서 드디어 내 눈앞에도 옥자가 어른어른하고, 한국 스탭들처럼 옥자, 옥자를 외치게 된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가 공들여 담아낸 부분이 관객에게 전달되었다면 가장 큰 기쁨이다. 나는 그림과 사진을 보며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한다. 정지된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많은 영감이 떠오른다. 베네치아가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에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되며 쉽게 외부 문명을 접할 수 있었고, 비잔틴 문명의 화려한 색감이 지중해를 거쳐 도달하며 베네치아 화가들이 색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아까 당신이 말한 <옥자>를 둘러싼 국적을 초월한 결합들처럼 말이다.
-국적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보면, 당신의 출신과 경력도 그러하다.
=나는 테헤란에서 태어나 만 3살에 로마에 왔다. 아버지는 이란 출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고 어린 시절 이후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에 와서 쭉 자라났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란 출신의 큰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영화를 수입하고 테헤란에 극장을 두개 소유하고 있었다. 집 안 곳곳에 영화 포스터와 사진들이 막 쌓여 있었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아버지의 사업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아는 상태로, 나이 차 나는 누나들이 나를 귀찮아했던 탓에 철 모르고 집 안에 쌓인 포스터와 사진들 사이에서 뛰놀며 멋지고 근사한 영화라는 장르를 그렇게 접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극장에 갔고, 늦은 저녁까지 이어지는 페스티벌에도 졸음을 참으며 참석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파리에 와서, 당시 나이 차가 좀 나던 누나의 손에 이끌려 라틴지구의 작은 극장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1970)를 봤던 것이다. 그때 10대 소년이었으니 영화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고 내용을 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영화가 대단한 힘을 가졌다는 걸 느꼈다. 외부세계에서 날아온 유성이 내 얼굴 위로 쏟아져 충돌한 것 같은 큰 충격이었다.
-<순응자>는 시각 이미지가 가진 힘이 엄청나다는 걸 깨달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나.
=그 이후로 여러 번 <순응자>를 반복해 보면서 줄거리도 이해하게 되었고, 장 루이 트랭티냥의 얼굴이 왜 나를 이토록 강렬하게 뒤흔들고 지나갔는지 복기했다. 이미지는 강력한 힘을 가졌고, 우리를 압도할 수 있다. 촬영감독으로 일하며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는 순간 비로소 서사가 지닌 에너지와 결합되며 이미지의 권력이 100% 이상 발휘된다는 걸 깨달았다. 권력이 악착같이 손에 쥐려고 애쓴다고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미지의 힘도 우리가 그에 연연하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 온전히 발현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렇다. 내 스타일이라는 흔적을 남기는 것도 그렇다. 드러내기 위해 뽐내는 것, 이런 것을 할 줄 안다고 드러내기 위해 기교적으로 뭔가를 한다면 이미지는 영화에 녹아들지 않고 겉돌 것이다. 그것이 ‘인장’이라면 그런 건 원치 않는다. 80년대부터 블리치 바이 패스 기법을 통해 강렬하고 진한 검은색을 현상해낸 것은 맞지만, 그건 그 검은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촬영감독이 감독 곁에서 완전히 그 존재를 지우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감독이 내면에서 상상한 시적인 이미지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신성한 통역자가 되고 (웃음), 때로는 기술자가 되며, 미치광이 과학자처럼 혁신적 결과물을 창조해내기 위해 새로운 조합에 도전하고, 감독의 제3의 눈이 되고, 영화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하고, 감독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면 된다.
강원도 산골, 서울, 뉴욕, 어떻게 다르게 찍었나
-이후 촬영감독이 되어 직접 현장을 경험하게 됐다.
=촬영감독의 역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건 마치 가장 아름다운 빛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도 같다. 가장 아름다운 빛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가 저물어갈 때, 빛에서 어둠으로 갈 때 그 연약하고 예민한 순간을 두고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동이 터 오는 시간, 혹은 강렬한 한낮의 햇빛을 찬양하기도 한다.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묻는다면, 시나리오에 묘사된 순간에 가장 적합한 빛이라고 답하겠다. 정글의 한복판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도, 저물어가는 석양의 끝자락도 시나리오에서 적절히 사용될 때, 이야기의 일부이자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로 적절히 사용될 때 가장 아름답다. 모든 색채는 결국 빛에 의해 결정된다. 빛을 마주할 때 방어적으로 겁먹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정면으로 응시하고 끌어안고 입맞춰야 한다.
-넷플릭스의 영화이자 카메라는 알렉사65로 촬영했다.
=넷플릭스가 완전한 자유를 봉준호에게 약속하면서 단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4K로 찍어야 한다는 조건이었고 그래서 디지털 촬영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이미 디지털 촬영을 두번 해봤는데, 봉준호는 단 한번도 디지털 촬영을 해본 적이 없는, <설국열차>까지 계속 필름으로만 작업한 순수한 필름 장인이었다. 물론 나는 필름을 선호한다. 그 필름만의 질감과 색감의 구현을 아직 디지털로는 열심히 흉내내는 수준이다. 디지털 촬영을 하면서 모두가 필름처럼 찍고 싶어 하고 흉내내려고 한다. 예산이 없어 디지털로 찍지만 필름의 효과를 흉내내려고 하면 빠지기 쉬운 덫에 걸린다. <아무르>(2012)를 디지털 촬영으로 한 이유는, 감독인 미하엘 하네케와 늙은 커플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다큐에 가까운 사실적 장면을 포착하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리바, 장 루이 트랭티냥처럼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 필름을 교체하는 환경에 노출된다면 그들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고, 맘 편히 연기하는 대신 필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할 테니 하네케가 포착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움이 담기기는 어려웠다. 미학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점과 디지털의 장점이 들어맞았으므로, 디지털로 진행했다. 새로운 기술은 단순히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계를 지니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새로운 가능성과 긍정적인 측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봉준호와의 작업이 필름이 아니게 된 건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디지털로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포맷의 영화를,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한 이 새로운 플랫폼의 첫 작가영화가 될 <옥자>를 찍는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먼저 알렉사65를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아무르>에 이어 당시 1년 전에 저예산영화를 뉴욕에서 촬영하면서 나에게는 이미 알렉사65가 익숙했다. 사람들은 내가 태연하게 디지털로 넘어와 쉽게 작업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새로운 기기와 장비, 기술을 따라잡느라 애를 많이 먹는다. 알렉사65의 대여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에게는 완벽히 우리의 예술적 고집을 이해해줄 수 있는 위대한 프로듀서 최두호가 있었다. 넷플릭스는 몰라도 최두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봉준호와 나)의 요구를 다 이해해주고 전적으로 우리 편에 서주었다.
-봉준호 감독과 알렉사65를 가지고 어떤 시도들을 해보았나.
=알렉사65로 과연 얼마나 우리의 세계를 구현해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LA 스튜디오 촬영에 이어 차를 가지고 멀리 나갔다. 다양한 대상을, 다양한 시간대의 빛 아래에서 시범촬영했고, 알렉사로도 얼마든지 우리의 상상을 구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하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내가 직접 파나비전 CEO에게 <옥자>를 위해 70mm 렌즈를 쓰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가장 최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알렉사65 카메라의 이미지 처리 능력과 맞물려 <옥자>의 세계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조합이었다. 보통 아리사의 카메라에는 아리사 렌즈를 쓰고, 파나비전의 렌즈는 파나비전 카메라에 써야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이런 변종의 조합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파나비전의 CEO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답을 주었다. 전세계에서 이런 조합으로 촬영한 영화는 전무후무하다. 독일 아리사 카메라인 알렉사65에 미국산인 파나 비전 렌즈를 단 것이다. 이미 그 자체로 유럽과 신대륙의 만남이다. 그 카메라를 잡고 한국 출신 봉준호와 이란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내가 영국과 미국, 한국 출신 배우들과 함께 찍는 넷플릭스의 영화. 이 조합이 결국 <옥자>의 정체성을 외부적으로 설명해주는 것 같다.
-촬영 당시 기술적인 측면이 궁금하다. 오페라에서 막이 내리고 무대장치를 바꾸는 것처럼 배경에 따라 느낌이 급격히 달라진다. 마치 변주곡을 듣는 것 같았다.
=작곡가가 한 테마를 가지고 조성과 리듬을 바꾸며 곡을 진행하듯 강원도 산골, 서울, 뉴욕 이렇게 세곳의 촬영 세팅을 아주 다르게 진행했다. 14살 소녀 미자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계속 녹색을 주로 담아내다가 마지막에는 빛이 거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미자의 눈앞이 그렇게 캄캄하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옥자를 구해내기 위해 한밤중에 결연한 표정으로 돼지 저금통을 깨부수고 할아버지를 밀쳐내고 길을 달려 서울로 향할 때 가장 진한 검은색이 화면을 차지한다. 서울에 온 미자는 트럭을 따라 쉼없이 달리고, 뉴욕에 와서 퍼레이드에 참석하며 옥자와 조우한다. 지옥도와 같은 도살장 풍경에서는 색을 최대한 배제했다. 강원도 산속에서는 카메라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거나 자연 풍광을 담아내며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대자연, 영원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영적인 기운이 서린 장소를 담아내려고 애썼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을 통해 이어지는 서울에서의 풍경과 강렬한 대조가 되기를 바랐다. 서울에서는 미자가 마주하는 진짜 도시의 불빛을 그대로 살렸다. 터널을 지날 때에도 터널 조명을 살렸고, 미란도 컴퍼니 본사 건물에서도 차가운 형광등 불빛, 동물해방전선(ALF)이 한강으로 사라지기 전 추격전을 벌일 때에도 한강 주변의 실제 조명,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경찰차들의 붉고 푸른 사이렌에서 뿜어내는 빛을 그대로 살렸다. 옥자를 향해 달리는 미자의 움직임과 함께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담아냈다. 렌즈도 바꾸고 어둡고 공격적이고 더 먼 거리에서 미자의 모습이 보일 수 있도록 망원으로 잡았다. 강원도의 초록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도시 곳곳의 회색빛, 창백한 도시의 색채에 주목했다. 차갑고 비정하며 공격적인 면면을 담으려고 했고, 이는 회현지하상가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형광등 불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천장이 낮은 공간, 좁고 구획이 많은 공간에 빈틈없이 들어찬 물건들 사이에서 옥자와 미자가 온몸으로 그 공간에서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친다. 이미 봉 감독의 머릿속에는 장소에 대한 이미지가 다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찍어야 할지 확신에 차 있었던 터라 촬영은 어렵지 않았다.
봉준호의 현장이 가진 특별함
-슈퍼돼지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유럽 관객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죽음을 앞둔 레지스탕스들이 부르던 그들의 노래가 떠오른다고도 했다.
=전세계 관객이 저마다 그들의 기억에 내재된, 그들이 지엽적으로 경험한 가장 참혹하고도 슬픈 학살의 순간과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까. 도살장에서는 일부러 어둡고, 색이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했다. 간헐적으로 배치된 빛을 통해서만 미자를 따라갔다. 어두운 공간, 상상 이상으로 잔혹한 지옥과도 같은 그곳에서 마지막에 모두가 한목소리로 울부짖는 장면은 감정적으로 영화를 통틀어 가장 고조되는 순간이다. 엄숙하고도 처참하며, 미자는 옥자를 구해 다행스럽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이 슬픔이 밀려온다. 모든 색채는 이미 감정적 요소가 있어서 색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가 있다. 일부러 색을 절제하고, 관객이 스토리의 절정 부분에서 시각적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고 옥자와 미자의 감정을 따라가기를 바랐다. 가장 강렬하게 끌어올려진 감정들이 발산되는 순간, 색채적으로 가장 미니멀해지는 것이 영화적 밸런스를 맞춰준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미지에 힘을 싣지 않는 것이 그 이미지를 가장 강렬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최소한의 색채와 조명만으로 어둠 속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슈퍼돼지들의 모습을 담았다.
-칸국제영화제 첫 시사에서의 사고는 어떤 사정이 있었나.
=칸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 사고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새벽 2시가 넘고 3시가 다 되어서 봉 감독과 내가 모든 세팅을 다 체크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다는 걸 수차례 확인하고 겨우 자러간 이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수상하다거나 일부러 그랬다든지, 음모라고 단정지을 마음은 없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영화제를 운영한다고 생각하면 더 끔찍한 일이니까. 봉 감독처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유례없는 이런 사고를 겪으면서도 그는 허허 웃으면서 가장 공들인 영화의 오프닝을 두번이나 관객이 본 거니까 좋은 일이라고 넘겼다. 화를 내거나 분노해야 할 최악의 상황에서도 봉 감독은 가장 긍정적인 면을 보고 넘어갔다.
-꼬박꼬박 ‘디렉터 봉’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 깊다. (웃음)
=봉 감독에게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면이 있다. 그는 언제나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고,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머릿속에 담겨진 상상과 이야기가 진행되는 세계는 그에게 이미 실존하는 세계다. 함께했던 거장들과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역시 봉 감독처럼 비정상적인 수준의 집착과 강박을 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그 몰입과 강박의 정도가 일련의 평범한 감독들과는 차이가 난다. 게다가 봉준호는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그 세계에 타인들을 불러들인다. 최선과 진심을 다해, 꾸밈없이 애정이 가득 찬 목소리로 그의 세계에 대해 말하고 그걸 믿게 만든다.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달뜬 목소리와 반짝이는 눈으로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에 가장 빠져들어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인데, 꾸밈없는 순도 100%의 열정과 사랑이 말이 통하지 않는 나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그는 대단한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꾼이고 동시에 독재자가 아닌 리더이다. 현장에서도 단 한번도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목소리를 높이고 강압적으로 굴지 않는다. 현장에서 그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스탭들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한다. 스탭들이 언제나 마음에 쏙 들 수만은 없고,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아주 뛰어난 거장들조차 그 순간에는 대부분 듣기 싫은 소리로 스탭들을 다그친다. 폭군이나 독재자처럼 행동하면서 그 방식이 밭은 촬영 일정에 쫓기는 상황에서 효과적이며, 내 영화는 내 왕국과도 같다고 믿기도 한다. 봉 감독은 그런 순간에도 가장 간결하고 짤막하게, 분명하게 잘못과 실수를 지적하고 인격적으로 수치심을 느끼거나 공격적이라고 느끼지 않도록 말한다. 그렇게 뉴트럴한 톤으로 말하고 지시해주면 스탭들도 스스로 오류를 깨닫고 수정하며,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스탭에게도 수용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런 여유롭고 관대한 화법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재능이다. 군주로 치면 성군이고, 장수로 치면 덕장이며 지장이다. 이런 자질은 아무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도 걸작이지만 봉 감독 스스로가 타인에게 관대한 매우 훌륭한 인간이며 보기 드문 젠틀맨이다.
-그의 현장 지휘를 지켜본 느낌은 어떤가. 그에 대해 달리 알게 된 지점이 있다면.
=봉 감독은 경이로울 정도로 완전히 준비된 상태로 현장을 지휘한다. 무얼 찍어야 할지, 어떻게 찍어야 할지,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장면이 다 완성되어 있고 영화 전체에 대한 시각도 완성된 상태다. 그냥 현장에 나오는 감독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봉 감독은 이미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대로 아주 꼼꼼하게 촬영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즉흥적인 순간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예기치 못한 햇빛과 우연히 발견된 앵글이 놀랍도록 매혹적일 때가 있다. 우연히 마법처럼 다가오는 즉흥적인 순간들도 그는 놓치지 않는다. 보통 감독들이 한쪽으로만 발달한다. 철저하게 예측하고 계산하며 꼼꼼한 준비로 이미 구축해놓은 세계를 완벽히 재현하며 촬영하거나, 즉흥적으로 감에 의존해 현장에서 일어나는 마법을 부린다.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기가 쉽지 않은데 봉 감독은 두 가지를 다 가졌다. 거장 영화감독들의 다양한 특성을 한 몸에 다 갖춘, 특별한 조합으로 완성된 거장이다. 함께 작업하면서 봉 감독은 거의 본능적으로 소리와 음악에 반응하며 영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음악을 듣고, 음악가들은 악보를 떠올리겠지만, 봉 감독은 그걸 시각적 이미지와 장면들로 치환해나간다. 강원도에서 촬영이 끝나면 봉 감독과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좋았다.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나가 그레고리 소콜로프 음반을 듣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봉 감독을 통해 소콜로프를 발견했고, 지금도 그의 연주를 자주 듣는다. 이렇게 유일무이하게 특별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함께 듣는 순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서로가 어떤 순간을 함께 살아낸 것처럼 매우 친밀해진다. 서로의 영혼이 음악을 통해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는 순간이다. 나는 한국어를 모르지만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눈을 바라볼 때면 다 헤아려지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을 공유한 한가족의 울타리에서 자라난 동생처럼 느껴졌다.
-당신과 같은 좋은 촬영감독이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할까.
=경청하는 능력과, 좋은 영화의 오프닝을 유심히 보는 것, 흑백이면 흑백영화를 시대별로 섭렵하고 그다음 컬러 시대의 걸작들을 접하고, 이 영화라는 장르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과거 무성영화 시절부터 발전해 오늘날까지 왔다는 걸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소리가 없던 시절의 영화에 이어 유성영화를 본다거나, 흑백영화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순간을 순차적으로 경험하며 영화 속 세계가 어떻게 확장되고 변화하는지를 느껴야 한다. 영화만 계속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나 그림을 많이 접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지를 상상하는 훈련에도 큰 도움이 될뿐더러 완벽한 구도와 형태, 색채에 대해 체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도 너무 늦게 음악을 접해 후회스러운데, 좋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추상적인 음악언어에서 이미지를 연상하는 훈련을 하면, 위대한 작곡가가 고심하며 써내려간 음악을 따라가며 그 호흡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가장 차원 높은 추상의 언어를 구체화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거장들은 이미 이런 음악적 호흡을 체화한 사람들이었다. 이만큼 한 인간에게 예술적 깊이를 더해주는 훈련이 없다. 나는 거의 매주 한번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는다. 첼로 한대가 뿜어내는 음표들이 무한한 세계와 만나, 저 너머의 차원을 향해 가며 자유롭게 춤추는 것 같다. 같은 곡인데 연주자에 따라 해석에 큰 차이를 보인다. 폴 토틀리에와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가, 파블로 카잘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바흐뿐 아니라 베토벤, 비발디… 음악을 통해 나는 호흡하는 법을 터득했다.
-넷플릭스가 보장했던 완전한 자유는 어땠나.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두려워하며 영화산업을 파괴할 것이라는 스트리밍을 합법화하며 등장한 새로운 플랫폼인 넷플릭스가, 미국 업체가 다른 스튜디오에서는 주지 못하는 자유를 허락했다. 프랑스는 언제나 느린 나라다. 프랑스 배급사들이 나서서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며,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접하는 행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시대는 빠르게 변해가는데, 아직 영화산업이 그걸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진 느낌이다. <옥자>는 큰 상영관의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영화지만 먼저 컴퓨터나 TV로 접한다고 해서 영화의 격이나 가치가 훼손되는가? 이 지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먼저 컴퓨터나 TV 화면으로 영화를 경험한 다음 다시 한번 영화를 접하기 위해 극장에 간다면, 대중에게 우선 영화를 손쉽게 만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춘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 않을까? 21세기 들어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일상을 얼마나 변화시켰나. 영화에도 그 여파가 미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넷플릭스 덕분에 봉 감독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영화적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사실 불가능한 이미지란 없다. 우리의 상상력에 한계는 없으니까. 그 무한한 상상력에 자신들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건 이렇게 자르고 이건 저기에 붙이고 이건 늘려라, 나서서 우리의 영혼이 담긴 작업을 난도질하는 간섭이 우리에게 제약으로 작용한다. <옥자>에는 그런 제약과 간섭이 없었다. 봉 감독의 <옥자>라는 여정에 나도 얼마 안되지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게 뿌듯하다. 한국에서의 <옥자>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 알려달라. 우리의 눈앞에 계속 어른거리던 옥자를 한국 관객이 어떻게 만났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