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옥자>에서 발견한 봉준호 감독 특유의 활력과 기이한 감수성
2017-07-17
글 : 정지연 (영화평론가)
거짓의 체계, 오인의 체계

거짓말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오인’의 서사도 작동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봉준호의 영화적 세계가 다시금 시작된 것이다. 영화 <옥자>는 ‘착한 자본주의’로 위장한 육가공 업체 미란도의 화려한 기업 설명회로 시작된다. 흡사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듯한 경쾌하고 빠른 편집의 이 시퀀스에서 미란도의 새 CEO 루시는 선대의 사악하고 착취적인 메뉴팩처링 생산 방식을 비난하며 자신은 자연과 과학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돼지 축산산업을 시작할 것임을 선언한다. 동물복지와 생태주의와의 결합. 그러나 아름다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날 슈퍼돼지에 대해 그녀가 덧붙이는 마지막 말 한마디. “맛도 끝내주지요.” 틸다 스윈튼의 클로즈업이 빚어내는 이 순간의 거짓과 그로테스크함이야말로 <옥자>의 기이한 풍자와 해학을 압축하는 이미지이다.

‘추적’을 모티브로 하는 봉준호 감독의 모든 영화들에서 오인의 코드는 서사의 중요한 분기점 혹은 동력이 되어왔다. 아파트 단지의 개 도난 사건을 추적하는 현남은 눈앞에서 진범과 가짜를 오인하고(<플란다스의 개>), 척 보기만 해도 누가 범인인지 잡아낼 수 있다고 장담했던 화성의 베테랑 형사들은 무수한 용의자를 범인으로 오인하고 나서야 결국 ‘나도 모르겠다’를 선언해버린다(<살인의 추억>). 다른 아이의 손을 현서의 손으로 착각해 붙잡고 달리던 아버지 강두는 결국 괴물에게 딸을 잃고, 심지어 총알의 개수를 오인해 아버지조차 잃는다. 이 와중에 국가는 괴물을 바이러스 숙주로 오인하고, 엉뚱하게도 괴물의 피해자를 사태의 가해자로 지목해 추적한다(<괴물>). 엄마는 아들이 진범이 아닐 거라 오인하고(<마더>), 미래세계 기차 꼬리칸에 살아남은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는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길리엄의 실체를 오인하고, 죽음밖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간주했던 기차 밖 세계도 오인한다(<설국열차>).

<옥자> 역시 바로 이러한 오인들로 구조화된 작품이다. 물론 모든 오인 이전에는 거짓말이 존재한다. 음모와 기만에 관한 거짓, 소소하고 일상적인 거짓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거짓들 말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루시 미란도는 슈퍼돼지에 관한 이상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이것은 탐욕스런 자본의 위장이자 육식동물들에게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학살에 대한 은폐적 행위이다(루시는 이것을 선의의 거짓이라 말한다). 또 다른 거짓은 얼핏 미란도 기업의 반대극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동물해방전선’의 거짓과 기만이다. 사람을 해하지 않고 폭력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내세운 그들은 집단 내 리더에 의한 린치를 묵인하고, ‘옥자와 산으로 돌아갈래요’라고 말하는 미자의 언어를 거짓으로 왜곡한다(케이의 거짓말에 그들은 미자의 의지를 오인한다).

의도적인 기만과 속임수 혹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실수와 거짓들이 야기하는 오인의 체계는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 치밀한 서사적 스릴러 게임이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그 과정에 선의와 악의, 우연과 필연, 장르적 허구와 현실의 기시감들이 절묘하게 결합되면서, 종국에 영화 속 주인공 혹은 관객이 목도하게 될 세계는 주체의 윤리적, 정치적 불안 그리고 영화라는 허구적 체계가 은유하는 현실 사회의 잔혹한 모순들이다.

나쁜 공동체 vs 상상적 낙원

<옥자>에서 미자와 옥자가 등장하는 두 번째 시퀀스는 미란도에 관한 첫 번째 시퀀스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라,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곳으로 설정된 이 시퀀스에서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가 포착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속도는 보다 넓어지고 천천히 움직인다. 강원도 정선 등지에서 촬영된 아름다운 산중 풍광들이 만들어내는 장엄하고도 평화로운 자연의 이미지는 흡사 미자와 옥자의 상상적 거주지이자 낙원처럼 보인다. 더불어 이 공간을 이기적 집합체인 공동체나 사회의 풍경으로부터 확연히 고립되고 분리된 공간으로서 제시한다. 이 낙원의 완전성과 안전함이 깨지는 것은 미란도 직원들이 도착하면서이다.

옥자를 제품(product)이나 가축이 아니라 철저히 가족으로 간주하고 애착했던 미자로부터 미란도 기업은 제품 경연대회를 빌미로 옥자를 앗아간다. 미자를 다독이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자는 옥자를 찾아 질주하기 시작한다. 이때 미자의 질주는 딸을 되찾고자 사투를 벌여야만 했던 <괴물>의 강두 혹은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폭주했던 <마더>의 혜자의 분투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애착하는 대상에 대한 간절함(혹은 집착과 광기)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내달려야만 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나쁜 공동체(국가나 기업)의 음모와 기만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 또한 사랑하는 대상을 잃거나 분리되는 주인공들의 곤경은 철저히 고립된 개인들의 분투로서만 묘사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봉준호 감독이 희생자 주인공들을 그 어떤 대안적 정치공동체나 이념적 실천에 연루시키거나 위치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운동 세력들은 <옥자> 속 동물해방전선의 그들처럼 자기모순적이거나 무능하며, 더러는 주인공들에게 상처조차 남기게 된다. 켄 로치 영화에서라면 필연적으로 귀결하게 되는 계급적 연대나 공동체적 치유가 봉준호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뢰되지 않는다. 그래서 봉준호 영화에는 사건의 완전한 봉합, 질서와 정상성의 회복이 아니라 ‘불안’의 감각이 서사의 마지막을 장악한다. 가령 <플란다스의 개>에서 무겁게 강의실 창밖을 내다보는 윤주(이성재)의 시선과 <살인의 추억>에서 은폐된 범인과의 공존을 상기하며 객석을 바라보는 주인공 두만(송강호)의 클로즈업, 그리고 <괴물>에서 한강변 어둠을 응시하며 한손에 총을 움켜쥐어야만 강두(송강호)의 시선이 그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더>에서 죄의식과 불안을 떨치기 위해 스스로 망각의 침을 놓고 절규에 가까운 춤사위를 보여줬던 엄마(김혜자)의 몸부림이 그러했으며 <설국열차>에서 살아남았으되, 환각과 실제가 경계가 모호한 그곳에서 과연 생존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던 두 아이들의 현실이 불안했다.

<옥자>에서 옥자와 미자는 결국 그들만의 이상적 공간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들은 사건 이전의 상태와 흡사한 모습으로 툇마루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한다(봉준호 영화에서 돌본다는 것은 밥을 먹인다는 것이다. <괴물>의 마지막 순간 강두는 현서 대신 어린 소년의 식사를 챙긴다. <마더>에서 혜자는 도준에게 백숙을 삶아 먹인다. 그러나 초반과 후반의 식사에서 둘의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옥자>에서 관객은 이들이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옥자와 미자의 서울-뉴욕을 가로지른 여정은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여느 소녀들이 치러야만 하는 성장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학대와 상처를 남긴 것이며, 일상의 표면은 회복되지만 심리적 내면은 카메라의 거리만큼이나 더 멀어져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 즉 옥자와 미자가 다시금 고립무원과도 같은 산속으로 귀향하는 것은 정상성의 복귀가 아니라 상상적 도피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공동체 혹은 사회는 안전하지 않은 것이다.

활력과 우울

봉준호 감독에게 공간은 언제나 중요하게 영화를 지배하고 캐릭터화 되었다. <옥자> 역시 세곳의 공간으로 구조화된다. 먼저 미란도 본사와 실험실, 그리고 슈퍼돼지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뉴욕이 있다. 이곳은 첨단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화려한 마천루와 아름다운 야경을 과시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강제로 이송되는 옥자의 눈에는 무수한 묘비들로 가득 채워진 죽음의 공간, 혹은 외부와는 고립된 잔혹한 도살장과 실험실로만 인식될 공간이다(흡사 수용소 풍경과도 같은 도살장 외부. 특히 철책으로 가로막힌 이 공간은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반체제적인 인간을 격리하는 공간인 교도소와 겹친다). 이곳과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공간은 역시 미자와 옥자의 자연으로서의 산골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서 서울이 있다. 봉준호 특유의 활력이 가장 뛰어나게 연출된 서울 장면에서 미자의 첫 도착 신은 인상적이다. 지하철 계단의 붐비는 인파들의 빠른 움직임 속에서 산골 소녀 미자가 붉은옷을 입고 홀로 멈춰 있는 부감숏인 것이다. 그리고 이내 유달리 부감숏을 많이 쓴 이번 영화에서 미자의 첫 번째 추적극은 첨단 빌딩 옆에 존재하는 빌라들로 구성된 주택가의 골목들, 서울에서 무수하게 접하게 되는 터널들, 그리고 지하상가로 이어진다.

지하실이나 터널처럼 고립되고 폐쇄적인 공간들을 기이한 영화적 공간으로 해석해내는 봉준호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다만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의 터널이나 한강변 공간들이 잔혹한 범죄가 은폐되고 죽은 자의 시체가 악취를 풍기는 공간이었다면 <옥자>에서 터널과 지하상가는 카니발과 난장의 활력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공간으로 해석된다. <플란다스 개>의 옥상 위를 가득 채웠던 노란옷의 상상적 응원단처럼, <옥자>에서 옥자와 미자의 공포에 사로잡힌 탈주와 동물해방전선의 교조적 규율과 전략들은 한데 맞물리면서 카오스적 활력과 페이소스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바로 이 공간에서 봉준호 감독의 활력을 지배하는 요소들 중 하나는 ‘토착성’이 작동된다. 그는 분명 매번 장르적인 이야기를 구성하지만 그 이야기를 채우는 사람들과 공간은 장르적 관습이나 전형성으로부터 탈구된 존재들이었다. 그 자리에는 한국 사회 일상에서 접하는 서민들의 지리멸렬한 모습들이 새겨지거나, 그들이 경험하는 사건과 공간에는 대한민국의 동시대성을 통과해온 관객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조리하고도 폭력적인 사건들의 기억이 포개어졌다. 실패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시민적 캐릭터들은 한편으론 희화화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민과 공감을 자극하는 인물들이었다.

<옥자>는 분명 봉준호 감독의 오리지널한 인물과 공간들의 활력이 작동하는 작품이다. 자기 패러디와 독창적 재해석을 감행하는 감독의 날인은 미자, 단 하나의 캐릭터에만도 무수하게 중첩된다. 미자에게선 아파트 단지를 질주하던 현남의 모습(<플란다스의 개>)과 곤경 속에서도 어린 사내아이를 보호하던 현서의 모습(<괴물>), 그리고 아들의 무고함을 밝히겠노라며 타협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던 혜자의 집착(<마더>)이 보인다. 동시에 <옥자>는 그 자체만으로 <괴물>의 역전된 버전처럼도 보인다. 유전자 변형으로 조합된 생명체가 때로는 ‘괴물’로, 생산품으로, 가족으로 호명되며 서사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가장 국제적인 프로젝트인 만큼 보편적인 장르포뮬러를 가장 많이 차용한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 스스로 말하듯 이 영화는 ‘옥자와 미자의 러브 스토리’를 전면화했다. 그런데 이 러브 스토리를 조금만 뒤집어 이해하자면,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육식이 야기하는 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버전은 (유전자 변형 괴물) 옥자와 미자의 불가해한 소통과 분리 불안, 집착에 관한 사이코드라마처럼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후자의 코드에서 봉준호 감독 특유의 활력과 기이한 감수성을 발견한다. 그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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