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TV시리즈④] 사라 폴리 <그레이스> -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라
2017-11-13
글 : 장영엽 (편집장)

<그레이스> Alias Grace

감독 메리 해론 / 각본 사라 폴리 / 원작 마거릿 애트우드 / 출연 사라 가돈, 에드워드 홀크로프트 / 국내 방영 넷플릭스

마거릿 애트우드. 캐나다의 유명 여성작가이자 올해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자였던 그녀에게 20년 전 한 소녀가 편지를 보냈다. 애트우드의 소설 <그레이스>(1996)의 판권을 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답은 당연히 ‘노’였다. “그녀는 17살이었다고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애트우드는 거절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지만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젠가 <그레이스>의 판권을 획득해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기겠다고 결심했고 2017년, 넷플릭스를 통해 자신이 각본을 쓰고 프로듀서로 참여한 6부작 드라마 <그레이스>를 공개하며 자신의 오랜 꿈을 이뤘다. <어웨이 프롬 허> <우리도 사랑일까>를 연출한 캐나다의 감독 겸 배우, 사라 폴리 이야기다.

“나에 관한 모든 글을 떠올려본다.” 드라마 <그레이스>는 그레이스 막스(사라 가돈)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살인자다. 그녀는 무고한 희생자다. 그녀는 신경질적이다. 그녀는 교양 있어 보인다. 그녀는 교활하다. 그녀는 어리숙하다. 거울 앞에 선 그레이스가 스스로의 얼굴을 보며 되뇌이는 건 19세기 캐나다의 저잣거리에 떠도는 자신에 대한 ‘소문’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무성하지만, 누구도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집주인과 그의 정부인 하녀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레이스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신과 의사 사이먼(에드워드 홀크로프트)이 상담을 요청한다. 폭력을 사용하거나 행동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이먼에게 그레이스는 조금씩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사라 폴리는 알고 있었다. 내가 <다운튼 애비> 같은 작품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점을. 나는 겉치레 없이 잔혹하고 인정사정없는, 진짜 계급사회를 보여주고 싶었다.” 사라 폴리의 제안으로 <그레이스>의 연출을 맡은 메리 해론(<아메리칸 싸이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를 연출한 캐나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레이스>는 19세기 캐나다 사회에서 하류 계급으로 살아가야 했던 여성의 삶을 그 어떤 포장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병들어 죽은 어머니의 영혼조차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습하고 냄새나는 배를 타고 캐나다에 도착한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그레이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이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 그레이스는 절친한 친구 메리가 거리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불법 낙태 시술을 받고 피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민과 낙태, 차별과 폭력.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험의 순간 속에서 그레이스와 같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차별을 차별이라 말하지 않고, 폭력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이 침묵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인지 드라마 <그레이스>는 살인 용의자 그레이스 막스의 삶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그레이스를 시대의 희생자로 바라보는 것만은 아니다.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그레이스의 얼굴을 보여주는 <그레이스>의 인상적인 오프닝 신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교활한 살인자인지, 무고한 희생자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그레이스의 모호한 태도를 의미심장하게 그려낸다. 결국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그레이스>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레이스를 연기한 캐나다 배우 사라 가돈은 실제로 현장에서 ‘좋은 그레이스’와 ‘나쁜 그레이스’를 구분해 연기했으며, 그레이스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로 출연한 영국 배우 에드워드 홀크로프트(<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찰리가 맞다!)는 사라 가돈이 어떤 그레이스를 연기하는지 알지 못한 채 온전히 그녀의 연기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촬영했다고. 소설 <그레이스>를 집필한 마거릿 애트우드 역시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묘사해낸 그레이스의 모호함에 만족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최근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은 미국 드라마계의 뜨거운 감자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가부장적 사회의 지배를 받으며 아이 낳기를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조명한 <시녀 이야기>(미국 내 방영 훌루)는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시리즈 부문 최고상을 수상할 정도로 화제였고, <그레이스>는 낙태 반대를 공공연하게 지지하고 이민을 규제하려는 트럼프 정부의 행보와 맞물려 화제가 되고 있다. “<시녀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능한 미래에 여성의 인권이 약화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창이라면, <그레이스>는 여성이 어떤 권리를 가지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미래를 예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성의 권리가 믿을 수 없게 불안정하고 취약한 바로 이 시기에 말이다.” 사라 폴리는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레이스>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한 여성의 경고다. 그녀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다.

실존인물 그레이스 막스

<그레이스>의 주인공 그레이스 막스는 19세기 캐나다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드라마는 상당 부분 실화에 기반해 그레이스를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로, 12살 무렵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드라마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에서 숨을 거뒀다. 그녀는 1843년 7월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하인 제임스 맥더못과 공모해 주인 토마스 키니어와 그의 정부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이 살인사건에서 그레이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제임스 맥더못은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레이스는 변호사와 명사들의 도움을 받아 종신형을 받았다. 그 뒤 30여년간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오가던 그레이스는 1872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출소한 뒤 그레이스는 뉴욕의 북부 지역으로 향했다고 전해지며, 그녀의 말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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