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만남은 숙명적이다. 존 포드와 태그 갤러거의 만남이 그렇다. 때로 평론가와 감독의 관계는 분리하기 어려운데 성질과 상태가 다른 존재가 만났음에도 완벽히 하나로 융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평론가 감식안을 통해 본인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지점까지 발굴된다. 평론가의 입장에선 존경과 헌사를 바칠 만한 감독의 행적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세상과 마주하는 또 하나의 창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존 포드라는 대명사에 담긴 함의는 자연인 존 포드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존 포드가 걸어온 길, 팬들이 즐겨온 영화, 평론가들이 분석해온 말들의 합이 존 포드라는 단어 안에 응축되어 있다. 태그 갤러거는 팬으로서도, 평론가로서도 그 필두에 서 있다.
존 포드에 관한 저서는 꽤 나온 편이지만 아직까지 그 제일 앞줄은 태그 갤러거의 저서 <존 포드>의 몫인 것 같다. 1986년 태그 갤러거가 <존 포드: 그와 그의 영화들>이라는 연구서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미국의 비평가 조너선 로젠봄은 “태그 갤러거의 책이 존 포드를 말하는 다른 책들을 난쟁이로 만들어버렸다”고 평한 바 있다. 존 포드에 관한 애정이라면 뒤지지 않을 한국의 허문영 평론가 역시 “태그 갤러거의 견해를 참고하지 않고 존 포드를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찬사를 보냈다. 사실 80년대는 존 포드에게 우호적인 시기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영화학자들이 존 포드를 인종주의자, 군사주의자, 반동주의자로 분류할 때 태그 갤러거는 존 포드를 열렬히 변호하며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평가들은 존 포드라는 거대한 지성을 대부분 무시해버렸”기에 “존 포드를 미국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내세우는 건 현 시점(1986년)에서 조롱을 받을 가능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역할을 자청했다.
시류에 개의치 않는 자유분방한 기질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존 포드와 태그 갤러거는 닮은 측면이 있다. 동시에 이를 세련되게 포장할 줄 안다는 점도 닮았다. 존 포드와 태그 갤러거는 둘 다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표현하곤 했는데, 다혈질에 고집스러운 모습과 호방하고 순진한 일면이 뒤섞여 복잡다단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존 포드의 영화가 그렇고, 존 포드를 탐구한 책 <존 포드>가 그렇다. 이 책은 1986년 출간된 내용을 2017년 수정한 버전인데 거의 새로 썼다 해도 좋을 정도 내용을 추가하고 다듬었다. <존 포드>란 감독의 이름 외에는 어떤 수사도 이 책의 제목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을 한권의 책이 담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존 포드’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흔적에 대해선 접근 가능한 거의 모든 방향에서 훑어나간다. 때문에 이 책의 장르를 분류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이건 비평서이면서 일대기를 담은 전기다. 작가에 대한 방대한 분석인 동시에 영화의 역사,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냉정한 고찰이며 한편으론 열정적인 애정 고백이자 흥겨운 에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총체적이고 서로 충돌하는 모순적인 면모가 곧 존 포드가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존 포드라는 이름의 궤적은 모순의 연속이다. 당연하다. 한 사람이 평생에 한 가지 방향만을 추구하고 단일한 무언가로 정리된다는 건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정치적으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영화가 공존하고 심지어 거장의 괴작 취급을 받는 <도노반의 산호초>(1963)처럼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의 영화도 심심치 않게 끼어 있다. 대중적으로는 서부극의 대표자로 인식되는 감독이지만 실은 전쟁, 코미디, 멜로드라마,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기도 했다. 심지어 표현의 측면에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영화를 찍는 동시에 표현주의적인 연출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태그 갤러거의 연구가 특별한 점은 무엇보다 그 성실함에 있다. 이 책은 존 포드의 방대한 흔적들을 더하거나 보태지 않고 가능한 모두 담으려 시도한다. <존 포드>에는 140여편에 이르는 장·단편 영화의 궤적이 내성의 시대(1927~35), 이상주의의 시대(1935~47), 신화의 시대(1948~61), 죽음의 시대(1962~65)로 구분, 정리되어 있다. 각 시기의 영화들은 서로 충돌하고 반발하면서 역설적으로 존 포드라는 무기질의 용어에 인간의 숨결과 부피를 불어넣는다. 그야말로 한 감독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인 동시에 시대를 읽어내는 지표로 읽기에 손색이 없다.
본래 저자의 실물이 책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드물지만 개인적으로 <존 포드>를 펼쳐들 때면 존 포드보다 태그 갤러거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태그 갤러거는 2014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존 포드의 영화세계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운 좋게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던 나는 성성한 백발과 멋진 콧수염을 자랑했던 태그 갤러거의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 직접 만난 태그 갤러거는 냉정하고 엄숙한 평론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린아이 같았다. 약간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존 포드에 대한 애정을 전염시키기에 충분했다. 영화평론의 입구는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사회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영화를 도구로 삼고 산업적인 수치를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이는 정교한 텍스트 분석에 매달리기도 한다. 그 결과는 사후적이지만 좋은 영화평론의 씨앗에 대해 언급할 순 있을 것이다. 본래 정교한 논리는 마음을 빼앗긴 뒤 뒤져보는 변명에 가깝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은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다. 태그 갤러거 역시 책의 서문에서 “나의 말들은 영화들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그의 영화들을 음미하고 거기에서 쾌감을 이끌어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 생각한다”며 존 포드에 대한 호의적인 편향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 굳이 왜 존 포드냐고 묻는다면 존 포드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답하겠다. 물론 존 포드가 영화사적으로 차지하는 위치나 미국영화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측면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영감을 주는 감독이 존 포드 한 사람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 존 포드여야 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이 책을 권하려 한다. 존 포드는 그의 영화를 사랑하고 방대한 족적을 뒤따라간 뒤 압도적인 시간을 투자해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평자를 만나 새롭게 태어난다. 존 포드가 궁금하지 않을 순 있다. 하지만 존 포드에 대해 일말의 관심이라도 생겼다면 이 책이 펼친 촘촘한 그물을 피해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평론가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그걸 왜 좋아하냐는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 그것이 아름답고 멋지기 때문이란 답은 평론가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늘 어떤 구체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여기 존 포드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상대의 진가를 발견한 지음(知音)의 목소리를, 그렇게 자신의 들뜬 열기를 세상에 고요하게 퍼트린다.
존 포드로 향하는 또 다른 여정
생애를 훑는 방대함과 애정에 기초한 통찰만큼은 <존 포드>를 압도할 책을 찾아보긴 어렵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다양할수록 좋다. 게다가 가끔은 넓고 잘 닦인 길보다 좁고 에둘러 가는 길에서 뜻밖의 발견을 할 수도 있기에 길의 가치는 좋고 나쁨으로 구분되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존 포드에 관한 참고할 만한 책들은 꽤 많다.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쓴 <존 포드>는 작가이론에 입각해 존 포드를 탐색한다. <감독 존 포드>(1971)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기도 한 보그다노비치는 서부극을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로부터 자유로웠던 존 포드의 성향을 소개한다(여러 가지 이유로 1971년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보그다노비치는 마틴 스코시즈, 스티븐 스필버그 등의 인터뷰를 추가하여 2006년 재편집 버전을 내놓기도 했다). <오슨 웰스>의 저자로 유명한 조셉 맥브라이드의 <존 포드>는 읽는 맛이 있는 전기물이다. 영국의 영화감독 린제이 앤더슨의 <존 포드에 대해서>는 존 포드와 나눴던 우정을 회상하며 그의 작품을 오마주한 영화들을 정리했다. 존 포드가 남긴 유산을 통해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