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를 향한 책의 여정③]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신비의 근원을 찾아서
2018-05-09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사진 : 최성열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왕가위, 존 파워스 지음 / 성문영 옮김 / 씨네21북스 펴

외로운 남자 아비, 그는 두 여성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차례로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내 그녀들에게 무관심해진다. 이런 그의 태도가 상대방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그를 냉정한 마음을 가진 자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영화 <아비정전>(1990)이 꼬집는 감정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이 말을 전한다. 아비가 바라보는 대상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있는 먼 곳의 장소를 바라본다고 말이다. 그 어딘가의 장소는 꾸준히 변주된다. 현재 그가 머무는 건물의 입구나 어두운 복도들, 혹은 시야가 흐려진 골목길과 같은 중간 어드메의 공간들이 그 상상적 이미지를 대체하게 된다. 홍콩이란 도시를 지탱하는 모난 장소들 곁에서, 왕가위의 영화가 갈망하는 욕망도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20세기 말의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며 ‘영국의 홍콩 반환’이라는 역사적 이벤트를 떠올렸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가항력적인 망명과 덧없는 기억 사이에서, 당대의 관객은 스스로 채우는 것이 불가능한 공허 이면의 불안함을 거대한 스크린에 투영했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존 파워스가 바라본 왕가위 인터뷰집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은 감독으로서 왕가위가 스스로의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책자이다. 첫장을 열자마자 독자들은 압도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의 스틸사진들을 통해 이 책이 현장에서 출발해 감독의 개인적인 어린 시절 사진까지, 그야말로 왕가위의 팬들에게 ‘매혹되는 순간’을 안겨줄 것이란 걸 직감하게 된다. 여섯 차례 대화를 통해 완성된 왕가위 영화에 대해 그들이 나누었던 심도 깊은 대화는, 과거 트뤼포가 히치콕 특유의 ‘감정의 언어’를 조명하려 노력했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존 파워스는 이번 인터뷰집에서 왕가위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가로지르는 ‘신비함의 원천’을 재단하려 노력한다. 아마도 그가 찾아낸 핵심은 표면이 아닌 내면에 있는 것 같다. 37개의 작은 단위로 나눈 오프닝의 비평 에세이에서 그는 ‘시간, 기억, 유배, 실연, 홍콩의 각기 다른 얼굴들’이란 다채로운 주제를 분할해 왕가위가 결국에는 “아름다움으로 시작해 마지막은 감정으로 끝맺게” 되는 연출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시간에 대한 애착과 노스탤지어를 향한 간절함, 그리고 기다림에 대한 운명성이 왕가위 영화의 키워드가 된다. 감독 스스로 이르듯 “마음의 기나긴 방황보다 더한 대하드라마는 없을 것”이란 동감이 찰나의 집적을 통해 형성된다.

관객이 현실 너머에 있는 황홀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불투명한 통로로서 왕가위의 영화는 우리 가슴에 자리잡고 있다. “제 영화는 전부 홍콩에 대한 겁니다. 설사 아르헨티나가 배경이라 해도 말이죠.” 생각해보면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탱고를 추던 홍콩의 작은 아파트를 벗어나서도 이러한 이미지는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주의 깊게 보면 모든 이야기가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게 보일 겁니다. 다양한 방향 감각에 그만큼 다양한 방향의 가능성이 더해지는 거고요.” 시간이나 공간의 경계선 전략만으로 이를 묶어둘 필요는 없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떠올린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중경삼림>(1994)의 낮과 밤의 이미지, <해피 투게더>(1997)의 절단되는 거대한 폭포수의 이미지, 그리고 <화양연화>(2000)의 남편도 부인도 아닌 관계들에 대해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는 바로 ‘중국인의 디아스포라’라 표상되는 왕가위 자신의 개인적이고도 시대적인 상황과도 맞아떨어진다. 과거 왕가위가 진행했던 즉흥적인 촬영현장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완성된 영화의 흐릿한 이미지들과 겹치는 것 같아 보인다.

오랜 기간 왕가위 영화에서 의상과 세트를 담당했던 미술감독 장숙평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왕가위를 정의한다. “그 친구, 흐릿한 거 너무 좋아해요”라고. 실상 왕가위는 사랑의 상실과 어긋남 같은 내적인 감정을 계산하거나 법칙을 지닌 것으로 표현하지 않는 연출자이다. 초당 12프레임으로 촬영된 뒤 더블프린팅되는 중첩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행동이나 리액션이 아닌 시선 자체의 롱테이크를 통해 그는 과거지향주의자로서 자신이 지닌 ‘60년대 홍콩’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90년대 후반, 당시의 관객은 무언가 느껴야 했고 스스로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시대가 지닌 경계에서의 불가사의함이 왕가위 영화에 전방위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가 직접 영향 받은 60년대 뉴웨이브의 영화들에서부터, 그가 즐겨 읽던 남아메리카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주제와 방식이 서로 햄 앤드 에그처럼 맞아떨어질 때 최고의 효과를 낸다”는 그의 취향은 이후에 믿음으로 바뀐다. 놀랄 만큼 충격적인 시각적 충만함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게 된다. 인물이나 장소, 혹은 장르라고 하더라도 왕가위 영화에서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렇게 그의 영화는 확실한 장치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다. 완벽한 과거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장벽이 왕가위 영화를 최대한 경계에서 가까운 곳으로 끌어다놓는다.

약 250장의 스틸사진으로 장식된 304쪽 분량의 이 깔끔한 하드커버는 2016년에 완성되어 국내에서는 올해 4월 발매됐다. 성문영이 번역한 한국어판은 원서와 거의 동일한 속도로 내용이 진행되며, 사진의 배치는 완전히 똑같다. 데뷔작 <열혈남아>(1987)부터 2013년 개봉한 <일대종사>(2012)까지 중요한 작품 전체를 아우르기에 회고전의 뉘앙스로 받아들여도 된다. 영화가 현실보다 과장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연출자로서 감독의 태도가 책장 사이사이에 배어 있다.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 혹은 히치콕처럼 왕가위가 불안증에 사로잡힌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그는 관객에게 여전히 ‘오랜 시간 남게 되는 감정’이 담긴 작품을 제공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연출자다. 과정의 반복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결과물은 우연한 조합이나 운 좋은 기적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마음의 교차점을 왕가위의 영화는 매혹적 구조물로 채운다. 그가 창조하는 아름다움의 과정에는 과장이 없다. 오직 진실한 내면의 깊이가 존재할 따름이다.

왕가위와 <포지티프>

존 파워스는 왕가위 영화가 “결코 최신 유행이라 부르는 것에 중독된 적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이론에서 출발해서 영화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작가 일을 습득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간 그를 오해했는지 모른다. 실상 왕가위는 <카이에 뒤 시네마>보다 <포지티프>에 더 잘 어울리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 이론을 제작에 활용하기보다는, 단편영화에서 출발해 고전적 완성도를 발전시킨 좌안파의 부류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영화잡지 <포지티프>는 비평가 얀 토빈의 주도로 <왕가위 Wong Kar Wai>라는 제목의 비평집을 내놓았다. 그간의 기사와 비평 그리고 장만옥, 양조위, 크리스토퍼 도일, 장숙평과의 인터뷰를 통해 책은 직접적 대면이 아니라, 주변부의 역설적 반응을 통해 연출자 왕가위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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