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만 보면 루키노 비스콘티의 필모그래피를 순서대로 훑어나가는 얌전한 비평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리된 챕터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실은 ‘루키노 비스콘티’라는 이름으로 수렴되는 한 덩어리다. 저자는 비스콘티의 영화들을 끊임없이 환기하며 전체 필모그래피 속에 개별 영화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밝혀내려 한다. “전체 영화의 맥락 속에서 개별 작품이 맺는 관계에 기초”해 영화를 판단해야 한다는 작가주의에 관한 저자의 태도는 책 속에 그대로 녹아든다.
제프리 노웰 스미스라는 필터를 통해 본 비스콘티의 특성은 ‘거리두기’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루키노 비스콘티는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작가이면서도 민중운동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 제프리 노웰 스미스는 비스콘티의 “귀족적이고 초연한 기질”이 그가 만든 상황들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주요 이유라고 말한다. 이런 거리두기가 아마도 비스콘티에 관해 “리얼리즘적인 이상을 구현한 전형적인 인물”과 “리얼리즘의 가장 강력한 배신자” 혹은 “리얼리즘 미학의 한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넘어선 인물”이라는 복합적인 평가가 공존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비스콘티의 접근법이 전적으로 분석적이고 상황과 거리를 두는 객관적인 방식”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왜냐하면 비스콘티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재와 밀접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스콘티의 거리두기는 좀더 면밀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비스콘티가 영화 속에서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이다. 저자는 동성애적 요소는 비스콘티의 자전적인 반영이기도 하면서도 “그 주제들이 대개 부정적으로 다뤄”졌다고 지적한다. 동성애 캐릭터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거나 내러티브상 죽음 혹은 고통을 동반하는 것으로 동성애를 그려왔는데, 이 때문에 “비스콘티가 진보적인 영화감독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성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보적이기를 기대했던 1970년대의 비평가”들이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비스콘티식 ‘거리두기’의 한 측면에서 동성애 묘사를 바라보면 다른 지점이 도출된다. 비스콘티는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듯 동성애에 거리를 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동성애에 관한 부정적인 묘사를 동성애 자체에 관한 부정이나 비판으로 읽는 것은 중단되어야 한다. 비스콘티가 “후기 영화들에서 공공연하게 동성애적인 주제와 모티브를 드러”내는 선택을 한 것도 단순히 “용기 있는 행동”이기보다는 스스로 거리를 두며 자기비판을 시도하는 그의 기질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스콘티는 자신의 영화 만들기 방식을 ‘의인화’라고 설명했다. 이는 “하나의 역사적 상황의 총체는 어떤 인간의 형상화를 통해서 그리고 인간 드라마의 전개를 통해서 구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인화가 사회와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 개인을 몰아세우는 방식이 아닐 것임은 자명하다. 이런 태도는 종종 비스콘티가 자신의 의도에 맞춰 배우를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때로는 배우의 개성에 따라 작품 의도가 변형되거나 모호해지는 것을 받아들인 지점에서 드러난다. 저자는 <레오파드>(1963)에서 비스콘티가 버트 랭커스터가 연기한 살라나 왕자와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분석한다. 다만 살라나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가능한 한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기에 묘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에서 원래 중심인물이었던 치로의 비중은 줄어든 반면, 알랭 들롱이 연기한 로코와 카티나 팍시누가 연기한 어머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커졌는데, 이는 비스콘티가 주제의식을 희석하면서까지 배우의 개성을 영화에 적극 반영한 결과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서론에서 저자는 인터뷰를 위해 비스콘티와 만난 일화를 서술하는데, 그 만남은 그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모양이다. “대화는 특별히 흥미로울 것이 없었고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인 성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한 대목은 다소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라 읽힌다. 그러나 글을 읽어나갈수록 비스콘티가 자신의 인물이나 상황과 거리를 뒀던 것처럼 저자 역시 비스콘티에게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표시해둔 것 같다. 저자는 때때로 비스콘티와 그의 작품에 관한 열렬한 지지가 아닌, 냉정함에 가까운 분석을 내놓는다. 저자가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 대해 “토마스 만의 구조화된 담론을 저속한 유물론으로 환원한 결과로 비스콘티가 원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고 힐난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마지막 챕터까지 읽고 나면 이와 같은 비판이 누군가의 무한한 지지와 찬사보다 더 큰 애정과 존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비스콘티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작가였다”라거나 “비스콘티의 영화들은 할리우드 감독뿐 아니라 이탈리아 감독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오로지 그의 영화였다”라는 평가는 지극히 건조한 표면 속에 뜨거운 존경이 숨겨져 있다.
가차 없는 비판 뒤에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반성하고 보완한다. 그렇다고 주장을 철회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작가주의에 관한 생각의 변화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관해 다소 박한 평가를 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 작품이 ‘노년의 태작’은 아니더라도 비스콘티의 영화세계에서 “어떤 퇴행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몇번의 개정을 거치면서 제프리 노웰 스미스는 자신의 글을 다시 읽고 자신의 평가를 되돌아본 흔적을 조금씩 남겨둔다. 그 흔적은 영화 비평이 결국 시간을 반영하는 것이고, 영화를 비평하는 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행위임을 인지하게 한다. 영화가 한 시기를 지나면서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발견되어야 하는 것처럼 비평 역시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다시 쓰이고 발견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만 같다. 이 글이 비스콘티에 관한 작가론인 동시에 작가 비평에 관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판단하게 된 이유다. 작가론은 작가에 관한 무조건적인 애정을 표한 글이거나 객관적 서술로만 이뤄진 전기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적절한 균형감이 다른 길을 제시해주리라 믿는다.
이탈리아영화의 매력
이탈리아영화와 문화에 관한 연구모임인 이탈치네마에서 펴낸 <이탈치네마: 이탈리아영화의 역사와 루키노 비스콘티>는 <루키노 비스콘티: 역사와 개인의 변증법>과 상호보완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총 세개의 파트로 나눠 이탈리아영화 전반과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세계 그리고 이탈리아의 문화를 조명한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비스콘티와의 인터뷰가 번역, 수록된 것이다. 제프리 노웰 스미스의 저작에는 감독의 육성이 거의 생략되어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감독의 생각이 궁금해진 이들이 참고할 만하다. 비스콘티의 전작을 꼼꼼히 짚는 제프리 노웰 스미스의 방식과 달리 <이탈치네마: 이탈리아영화의 역사와 루키노 비스콘티>는 비스콘티 초기 영화에 중점을 두며, 특히 <흔들리는 대지>(1948)에 초점을 맞춘다. 네오리얼리즘의 조류 속에서 비스콘티를 조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이런 방식에 흥미가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