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부터 2018년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1992편 중 최다 관객을 동원한 코미디영화는 순서대로 이일형 감독의 <검사외전>(2015, 970만명)과 황동혁 감독의 <수상한 그녀>(2013, 865만명)다. 우선 <수상한 그녀>를 중심으로 정통 코미디영화를 나열하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한국 코미디영화 흥행사를 새로 쓴 이환경 감독의 <7번방의 선물>(2012, 1291만명)부터 언급해야 한다. 이 이례적인 흥행을 시작으로 2년 주기(개봉 연도 기준)의 바통 터치를 시작한 2010년대 코미디영화는 <수상한 그녀>, <럭키>(2015, 696만명), <완벽한 타인>(2018, 529만명)으로 이어진다. 지난 20년간 한해에 제작되는 코미디영화의 편수와 다양성은 날로 침체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히트작들의 간헐적인 등장이 코미디영화의 생명력을 다시금 증명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요양원행을 앞둔 70대 할머니가 20대의 몸으로 돌아가는 설정인 <수상한 그녀>는 베트남, 중국으로 수출돼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고 현재 북미 리메이크 제작도 준비 중이다. 한편 기억을 잃은 킬러가 바뀐 목욕탕 열쇠로 인해 자신을 배우로 착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럭키>는 범죄, 누아르, 액션 등 센 영화에 지친 한국 영화계에 오랜만에 나온 무해한 코미디의 저력을 확인시켰다. 이탈리아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스>를 리메이크한 <완벽한 타인>은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만 있다면 대사 중심의 실내극에도 500만명 이상의 관객이 반응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며 코미디영화의 높은 가성비를 증명했다.
한편 <검사외전>을 필두로 범죄 및 액션 장르를 내세운 대형 상업영화에 코미디가 부분적으로 결합된 작품들을 꼽아볼 수 있다. 코믹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 <검사외전>과 달리 지난 5년간 코미디영화에 편입시키기엔 애매하지만 웃음 코드가 강하게 강조된 장르영화들이 대두했다. <베테랑>(2014, 1341만명)은 류승완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보편적인 유머를 구사하며 폭넓은 관객층을 노린 호쾌한 범죄영화다. 흥행 순으로 살피면 이석훈 감독의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866만명), 김성훈 감독의 <공조>(2016, 781만명), 강윤성 감독의 <범죄도시>(2017, 688만명), 김주환 감독의 <청년경찰>(2017, 563만명), 강형철 감독의 <타짜-신의 손>(2014, 400만명), 김형주 감독의 <보안관>(2016, 257만명)이 대표적이다. 이들 영화는 규모가 큰 오락영화에서 흥행 공식의 일환으로 적용된 코미디의 예를 보여준다.
여전한 위기, 의외의 가능성
<수상한 그녀> <럭키> <완벽한 타인>과 액션 및 범죄 코미디영화를 제외하고 지난 5년간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한 10편의 코미디영화를 추려봤다. <조선명탐정: 놉의 딸>(2014, 387만명),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 (2017, 242만명), 그리고 <탐정: 더 비기닝>(2015, 262만명), <탐정: 리턴즈>(2018, 314만명)라는 검증된 탐정 코미디가 각 2편씩 순위권의 절반 가까이를 채웠다. 브러더 코미디인 <형>(2016, 298만명)과 <그것만이 내 세상>(2017, 341만명), 로맨틱 코미디인 <너의 결혼식>(2017, 213만명), <나의 사랑, 나의 신부>(2014, 214만명)는 제각기 장점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뚜렷한 내러티브 공식과 캐릭터의 전형성이 도드라진다. 흥미로운 건 나머지 2편이다. <스물>(2014, 304만명)의 출현은 이병헌 감독의 본격적인 등장과 함께 정통 코미디를 지향하는 감독의 세대 교체를 알렸고,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2017, 328만명)는 2017년 한해 한국영화계의 활력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완전정복>(2003)을 연상케 하는 일상 코미디의 틀 안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픈 역사를 결합한 <아이 캔 스피크>는 로컬 코미디 장르가 어떻게 도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신선한 통로를 제시했다.
순위권 바깥에서는 정통 코미디 장르로 분류되던 하위 장르들이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절대적인 제작 편수 면에서만 보아도 로맨틱 코미디(<오늘의 연애>(2014), <좋아해줘>(2015), <그날의 분위기>(2015) 등)나 섹시 코미디(<위대한 소원>(2016) 등)의 약세는 여전했고, 여성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 <관능의 법칙>(2013), <워킹걸>(2014), <미쓰 와이프>(2015), <굿바이 싱글>(2016) 등이 명맥을 유지했다. <헬머니>(2014), <비밥바룰라>(2018) 같은 중·장년 배우들의 코믹물, <사랑하기 때문에>(2016), <아빠는 딸>(2016) 등 제2의 <수상한 그녀>를 노리고 보디 스위치 코미디를 시도한 작품들도 있었다. 이 가운데 청년필름이 제작하고 김석윤 감독, 이남규 작가 콤비가 3편 모두 견인한 <조선명탐정> 시리즈는 사실상 절멸하다시피 한 프랜차이즈 코미디영화의 부활을 성공시키면서 <조선미녀삼총사>(2013), <봉이 김선달>(2016), <임금님의 사건수첩>(2016) 등 사극 코미디 바람으로 이어졌다. 역학 3부작(<관상> <궁합> <명당>)의 2부인 <궁합>(2018) 또한 코미디 정서를 짙게 배합한 작품이다. 한편 김상진 감독의 <쓰리 썸머 나잇>(2014), 전편의 전지현 대신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의 빅토리아가 출연한 <엽기적인 그녀2>(2015), 최성국이 재기를 노린 <구세주 리턴즈>(2017) 등이 관심을 받지 못하면서 과거 한국영화계를 사로잡았던 검증된 브랜드들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유해진의 굳히기, 마동석의 등판
다 된 영화에 유해진을 뿌리면 웃겨진다. 이 시기 유해진은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보여준 걸출한 감초 연기와 tvN <삼시 세끼>(2015~18)에서 얻은 인기로 강력한 기세를 이어 나갔다. <럭키>의 원톱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정점을 찍은 그는 <공조>(2017)에서 액션과 코미디가 차진 공조를 이루게 했고, 흥행과 평가 모두 저조했지만 <레슬러>(2018)도 원톱 주인공으로서 그의 재능을 새삼 확인시켜줬다. <완벽한 타인> 개봉 후 자주 회자되었던 개그 포인트 역시 대체로 유해진의 화려한 언변과 애드리브에 힘입은 것들이었으며, 그런 존재감은 2019년 들어 <말모이>로까지 이어졌다.
한국 오락영화의 새 유니버스를 선포한 마블 영웅형 배우도 있었다. <베테랑>에서 명동 거리를 사로잡은 그의 애드리브 한마디, “나 아트박스 사장인데”는 천만 영화에 걸맞은 센세이션을 자아냈다. 10, 20대가 선호하는 팬시잡화 가게의 주인으로 90년대 조폭영화의 스테레오타입이라 할만한 거구의 사내가 등장했을 때, 관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짧은 모먼트가 자랑했던, 외모와 취향 사이의 괴리 혹은 반전매력은 이후 마동석이 시전하는 주요 코믹 플레이가 됐다. <베테랑>, <굿바이 싱글>, <범죄도시>, <부라더>(2017), <챔피언>(2018), <원더풀 고스트>(2018)까지 바야흐로 마동석표 액션 코미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착한 코미디를 넘어 참신한 코미디로 가는 길
지난 5년간 사랑받은 코미디영화에서 대단히 발칙하거나 전복적인 상상력을 발견했다고 보긴 어렵다. 어둡고 자극적인 영화를 피해 휴식처가 될 만한 코미디들이 오히려 각광을 받았다. <수상한 그녀> <아이 캔 스피크>의 나문희, <수상한 그녀>, <걷기왕>(2016), <궁합>의 심은경, <피끓는 청춘>(2013), <돌연변이>(2015),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2015), <너의 결혼식>의 박보영이 주목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순수한 B급에의 열망, 사회 풍자 그리고 헝그리 정신이 코미디와 만나 독립영화계에서 최적의 시너지를 일으키기도 했다. 일명 고봉수 사단을 세상에 알린 <델타 보이즈>(2016), <튼튼이의 모험>(2017)이 있었고, <족구왕>(2013), <범죄의 여왕>(2016), <소공녀>(2017)로 이어지는 광화문시네마의 넉넉한 유머 감각이 영화계에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참신한 기획, 다양성의 부재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화두이지만 착하고 따뜻한 코미디가 극장가를 찾은 관객에게 꾸준히 위로를 안겨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다행스럽다. <극한직업>이 이룬 기분 좋은 출발을 시작으로 향후 5년간 한국영화계의 답답함을 해소시킬 무지갯빛 코미디영화가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흥행 공식에 기반한 안전한 코미디가 아닌, 관객의 취향과 기호를 선도할 만한 용기 있는 코미디의 출현이 절실히 기다려진다.
● 2014년
최고 흥행 한국영화: <명량> 1761만명 _해상전의 거친 파도로 1700만을 휩쓴 김한민 감독의 다음이 궁금하다.
최고 흥행 한국 코미디영화: <수상한 그녀> 865만명 _할리우드 보디 스위치 코미디의 적절한 한국화.
최고의 코미디 배우: <수상한 그녀> 심은경 _배우 심은경이 스무살에 찍은 영화, 순진한 코미디 재능을 발견하다.
최고의 신스틸러: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라미란 _명품 조연 라미란의 완숙한 존재감. 원작인 이명세 감독 영화보다 주인아줌마의 코믹한 요소를 맛깔나게 살려냈다.
● 2015년
최고 흥행 한국영화: <베테랑> 1341만명 _강한 타격감까지 갖춘 반골 기질. 그해 최고의 사이다 영화.
최고 흥행 한국 코미디영화: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 387만명 _코미디 시리즈의 부활, 코미디 배우 김명민의 발견.
최고의 코미디 배우: <탐정: 더 비기닝> 권상우, 성동일 _잘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 잘 맞을 줄은 몰랐다. 두 배우의 능청스러운 완급 조절이 돋보인 탐정 콤비의 시작.
최고의 신스틸러: <베테랑> 마동석 _<베테랑>의 명동 신을 훔쳐간 배우. 돋보이는 피지컬로 군중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 2016년
최고 흥행 한국영화: <부산행> 1156만명 _부산행 폭주 기관차, 부성애를 결합한 한국형 좀비영화의 성취.
최고 흥행 한국 코미디영화: <검사외전> 970만명 _강동원 매력 모음집. 사기극에 코미디를 적당히 경쾌하게 배합한 설 연휴 시즌 영화.
최고의 코미디 배우: <럭키> 유해진 _배우, 킬러, 그리고 삼시 세끼 잘 챙겨 먹는 남자를 지켜보는 건강한 즐거움으로 원톱 영화를 견인한 유해진.
최고의 신스틸러: <족구왕> <위대한 소원> <굿바이 싱글> <범죄의 여왕> <걷기왕> 안재홍 _궁금한 신예에서 믿음직한 조연을 거쳐 주연으로 안착.
● 2017년
최고 흥행 한국영화: <택시운전사> 1218만명 _역사의 비극과 기획영화의 신파 사이 어딘가에서.
최고 흥행 한국 코미디영화: <아이 캔 스피크> 328만명 _어려운 주제를 밝고 단정하게 풀어낸 좋은 예.
최고의 코미디 배우: <범죄도시> <부라더> <신과 함께> 시리즈 마동석 _지나치게 빠르게 소비되는 측면도 있지만 한국영화계에 그 존재감을 거대하게 불어넣은 건 분명하다.
최고의 신스틸러: <보안관> 배정남 _“행님, 한 코푸(컵) 하실랍니꺼?” 구수한 사투리의 경상도 아재를 완벽히 소화했다.
● 2018년
최고 흥행 한국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 1227만명 _1편보다 나은 속편 보러, 피서지 대신 극장으로.
최고 흥행 한국 코미디영화: <완벽한 타인> 529만명 _리메이크면 어떤가, 배우도 만듦새도 훌륭하다. 관객은 좋은 아이디어에 반응한다는 증거.
최고의 코미디 배우: <너의 결혼식> 박보영 _로맨틱 코미디의 절멸 속에서 심폐소생술을 도맡은 배우. 90년대생 최고의 로코퀸이라 할 만하다.
최고의 신스틸러: <탐정: 리턴즈> 이광수 _큰 키와 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가 슬랩스틱을 선보일 때면 감초 이상의 장악력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