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⑧]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한국영화들의 경향에 대하여
2019-04-24
글 : 김영진 (전주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세상과의 불화에 맞서는 응답들
<굿바이 썸머>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인 <굿바이 썸머>(감독 박주영)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자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 화면은 나른할 만큼 몽환적이다. 당장 생사가 촌각에 달려 있는데 당사자 본인은 그게 남의 일인 것처럼 초연하다. 그 일이 주변 친구들에게 알려지면서 자그마한 파장이 일어나긴 하지만 주인공을 포함한 그들 모두는 눈앞에 흘러가는 사건보다는 지금 흘러가는 시간을 감각하는 것만으로 충만해 보인다. 또는 이런 것도 있다. 경쟁부문 상영작 <뎀프시롤>(가제, 감독 정혁기)의 주인공, 펀치 드렁크에 시달리는 나이 든 복서는 재기를 도모한다. 소속된 체육관의 관장을 비롯한 지인들은 그의 재기에 회의적이지만 본인은 열심이다. 그는 판소리의 리듬을 응용한 동작으로 자신만의 복싱 스타일을 가꾸어 링에 오르려 한다. 가당치도 않아 보이는 이 시도는 웃음을 유발하지만 상황이 전개될수록 묘한 슬픔이 아지랑이처럼 화면에 피어오른다.

자기만의 태도로 세상을 접수하다

굳이 올해의 경향을 요약하는 게 가능하다면, 전주에서 보게 될 한국영화 목록은 어떤 방향에서든 자기만의 태도로 세상을 접수하고 나름의 초식을 시도한 영화들로 채워진다. 이걸 직접적으로 소재화한 다큐멘터리도 있다. 목포의 어느 마을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되는 ‘괜찮아 마을’ 프로젝트에 참여한 젊은이들을 다룬 <다행(多行)이네요>(감독 김송미)는 기성세대의 질서가 강요하는 상투형이 싫어 각자 내면의 망명정부를 만들어 도피했던 젊은이들이 그들 각자만큼이나 예민한 동료들을 만나 조심스럽게 부대끼면서 마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다룬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게 무의미한 이 공동체 프로젝트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조화를 의심하는 가운데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조화를 이뤄낸다.

<다행(多行)이네요>는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의 이상을 의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그 밖의 대다수 한국영화들은 공동체 내의 조화보다는 불화에 더 주목한다. 김민경의 <리메인>은 무정자증인 남편과 살면서 성 불감증을 갖고 있는 여자주인공이 하반신 마비 상태인 남자에게 무용치료 강습을 하면서 알게 되는 몸의 소통 과정을 다룬다. 그가 새로 알게 된 삶의 감각과 기쁨은 이미 균열돼 있던 결혼생활의 파탄을 불러오고, 그의 삶은 어떤 형태의 봉합도 불가능한 상태를 맞는다. 이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얘기를 극적 문맥으로 강조하기보다는 시간을 감각하려는 절실한 카메라로 대한다. 아버지의 묘 이장을 앞두고 모처럼 모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장>(감독 정승오)에서도 사람들 사이의 불화는 지긋지긋할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진다. 서로 거울과도 같은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난을 어느 누구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장이라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관습을 억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떨쳐내고 싶어도 떨쳐내지 못하는 봉건적 가족주의의 의무를 증오하면서도 실행한다. 이 집단 자해극과도 같은 소동극의 일단에서 그들은 연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들 각자의 존엄을 긍정한다.

<다행(多行)이네요>

실업과 가난의 악순환을 겪으며 가족이 멸망한 가운데 홀로 남아 악전고투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애틀란틱 시티>(감독 라주형)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조국의 현실을 부정하고 미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맞이하는 아메리칸드림의 폐허를 어둡게 그려낸다. 욕창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둔 집안에서 벌어지는 내용을 그린 <욕창>(감독 심혜정)은 죽음을 앞둔 가족의 육체를 늘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가족들이 벌이는 욕망의 난장판을 다루지만 그것 역시 사람 냄새 나는 인생의 단면임을 역설적으로 긍정한다. 이혼을 결심한 부모 밑에서 어린 남매가 겪는 혼란을 다룬 <흩어진 밤>(감독 김솔, 이지형)은 핵가족을 지탱할 명분도 의지도 잃어버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최소 존재 근거인 양육받을 권리를 일부 상실하게 될 아이들이 감당할 슬픔을 아이들의 가냘픈 몸과 행동을 통해 격렬하게 증거한다. 어떤 해답도 제시될 수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무력감이 가슴을 내리누른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 <내가 사는 세상>을 출품한 최창환의 두 번째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은 노동착취가 일상화된 세상과 불화하는 주인공을 다루면서도 전작과 달리 자기만의 놀이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다짐을 강조하는 결말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의 시스템만큼이나 개인에게 방점을 찍는다. 정다운의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는 일본에서 귀화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았던 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을 조망한다. 어느 쪽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가 살았고 살고 싶었던 공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그 공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품는 건축물을 설계했던 그의 성취를 마치 그 공간을 직접 걸어보고 체험하게 하는 듯한 카메라로 화면에 새겨놓는다. 이 과정은 퍽 감동적인데 정치와 역사가 강제했던 세상과의 불화를 자기만의 이상 실현에 매진하는 노력을 통해 조화를 구현하는 결과로 바꿔놓은 흔적을 이타미 준의 건축물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애틀란틱 시티>

사회의 내적 갈등의 영화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되는 한국영화들은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비관적인 내적 갈등으로 요동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영화적 응답들이다. 그런 내적 갈등의 복판에 들어가 극단을 경험하게 하거나 그것들을 우회하거나 초월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헬조선으로 상투화된 한국 사회를 내밀하게 횡단하는 경험을 맛보게 한다. 다큐멘터리로는 사회적 의제를 공격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 <삽질>(감독 김병기), <김복동>(감독 송원근)이나 과거의 역사와 사회적 경험들이 내밀한 개인의 삶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다룬 <언더그라운드>(감독 허욱), <까치발>(감독 권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극영화 역시 파멸적 사회 시스템을 개인의 불행으로 껴안는 <세트 플레이>(감독 문승욱)부터 세상의 근심에 맞서 개인의 놀이 정신으로 돌파하는 <죽도 서핑 다이어리>(감독 이현승)까지 고루 망라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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