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주에서 만난 한국 감독들③] <아무도 없는 곳> 김종관 감독, “말로 옮겨지지 않는 느낌을 전달하는 게 언제나 내 목표”
2019-05-22
글 : 송경원
사진 : 박종덕 (객원기자)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설가가 책 출간을 준비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묘령의 여인 미영(이지은), 출판사 후배 유진(윤혜리), 아내가 아픈 사진작가 성하(김상호), 과거 기억이 없다는 바텐더 주은(이주영) 등 사람들을 만날수록 작가 창석(연우진)의 마음속 그림도 조금씩 변해간다. 김종관 감독의 신작 <아무도 없는 곳>은 그간 보여줬던 자신의 스타일의 총합이자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모험이다. 짧은 옴니버스들의 연결, 대화의 향연으로 인식되던 김종관 감독의 스타일은 여전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감지된다. “한 테이크 갈 때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재미가 있었다”는 김종관 감독의 고백처럼, 그는 기꺼이 우연과 기적의 순간을 받아들인 후 이른바 ‘영화적인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영화 속으로 길을 떠난다. 허구와 현실, 이야기와 이미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렇게 영화는 지속된다.

-한명이 5명의 등장인물을 차례로 만나는 구성이다. 주제와 구조를 쌓아나간다는 점에서 여느 옴니버스와는 차이가 있다.

=에피소드별로 독립된 병렬식 구성이지만 종국엔 하나의 감흥, 장편의 호흡으로 완결하고 싶었다. <더 테이블>(2016)이 공간이 인물을 바라보는 영화이고 <최악의 하루>(2016)가 하루라는 시간이 중요한 테마였다면, 이번에는 한명의 인물이 여러 사연을 통과해나가는 이야기다. 기억, 상실, 죽음, 늙음과 같은 소재를 뭉치고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대화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늙음과 죽음을 테마로 한 대사와 상황, 이미지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반복된다.

=늙어가면서 생기는 인간적인 결함들에 관심이 많다. 물론 경험이 쌓여 나아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구멍들이 생기는 것 같다. 창작자로 살아오면서 벽에 가로막히는 기분도 느껴봤고 무력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무게들이 자연스레 침전되어 그쪽으로 관심이 쏠리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주인공 창석을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영화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넓혀나가보고 싶었다.

-또 하나의 테마는 이야기에 대한 고민들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미영과의 대화에서 소설가 창석은 “잘 만든 이야기는 믿게 된다”고 하고 미영은 “가짠 걸 다 아는데 뭐가 신기하냐”고 반문한다. 이후로도 유사한 상황들이 반복, 변주된다.

=현실과 이야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펼쳐봤다. 각 인물들의 목소리는 어쩌면 모두 나의 내면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다. 내 영화가 늘 그렇듯 이번에도 대화가 많은데, 그 자체가 마음의 심상이 변해서 사람을 보는 시선까지 바뀌는 과정이라고 봐주면 좋겠다. 특히 이번에는 액션보다 리액션, 이야기를 듣는 쪽의 반응에 더 공을 들였다. 그런 면에서 창석 역을 맡은 연우진 배우의 공이 컸다. 상대의 미세한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고 말하는 쪽의 맛을 최대로 살려준다. 강한 연기가 주를 이루는 한국영화의 남성 연기자 중에서 귀하고 감사한 재능이다.

-넷플릭스 영화 <페르소나> 중 감독이 연출한 <밤을 걷다>가 떠오른다. 이지은 배우가 나와서 그런 게 아니라 분위기나 무드가 흡사하다.

=이지은 배우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행간의 공백이 많은 시나리오를 읽고도 정확히 이해를 해준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웃음) 이지은 배우가 대본 리딩하는 걸 보고 이 영화는 관객에게도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전체적인 비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줬고, 그의 연기를 보고 내가 오히려 캐릭터에 공감하기도 했다. 배우로서 장편영화 데뷔인 셈인데 흔쾌히 응해줘 고마울 따름이다.

-<아무도 없는 곳>이란 제목은 직접적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이다. 영화 전반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인상이다.

=영화는 제목 따라간다며 주변에선 다들 불안해했다. 관객이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냐고. (웃음) 그간 다뤄왔던 상실의 심상, 그 끝자락에 가 있는 영화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제목으로 밀고 나갔다. 영어 제목은 ‘셰이드 오브 더 하트’(Shades of the Heart)다. ‘마음의 음영’이라고 할까. 여기 있는 것 같기고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상태를 잡아내려 했다. 그래서 어두운 부분을 묘사하는 디테일에 특히 공을 들였다.

-집, 골목길, 해가 진 공원 등 어두운 장소에서 조명을 거의 쓰지 않고 실루엣만 활용한다. 때때로 흑백영화처럼 보일 정도다.

=전체적으론 인물들이 대화하며 서서히 어둠 속에 잠겨가는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그림자 속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할까. 불확실하더라도 예전에 해봤던 것과는 다른 과감한 시도를 하고자 했다. 어떻게 보면 욕심을 부린 셈인데 <사바하>(2018)의 김태수 촬영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좋은 장면들을 잡아주어 감사하다.

-10회차 촬영을 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장면의 밀도가 높다.

=사실 그 반대다. 10회차 안에 완성해야 했기에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웃음) 내가 언제 이런 도전을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절박함이 있었고 하루하루 쉬운 날이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작업한 것 중 가장 재미있는 현장이었고 그만큼 뭔가를 만들어나간다는 성취감도 컸다. 물론 상업적으로 안전하게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독립영화이기에 허락되는 시도, 지금이 아니면 어려울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가능성과 필요를 보고 기회를 준 전주국제영화제쪽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전작들의 연장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방식과 연출을 시도한 부분도 많다. 꿈과 현실, 영화와 사실, 이야기와 환상, 심지어 빛과 그림자까지 모든 경계들을 지워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영화를 통해 그동안 쌓아왔던 것들에서 한발 더 나아가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무엇이 영화적인지에 대한 고민이랄까. 그런 흔적들이 영화에서 보였으면 했다.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감흥. 말로 옮겨지지 않는 그 느낌을 전달하는 게 언제나 내 목표이고 내 영화의 핵심이며 내 마음이다. 때문에 여러 가지 상징을 비롯해 모호한 지점도 일부러 비워뒀다. 그러나 한편으론 큰 흐름을 벗어나고 싶진 않았다. 감독 혼자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진 않다. 나의 감흥과 관객의 해석, 그 적정선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 <아무도 없는 곳>의 이 순간!

창석(연우진)은 출판사 직원인 유진(윤혜리)과 어스름한 저녁 무렵 담배를 나눠 피운다. 주변은 이내 어두워지고 두 사람은 어둠 속에 잠겨 실루엣으로만 구분된다. 그때 담배의 빨간 불빛 두개가 마치 점처럼 허공에 찍힌다. 유진의 외국인 남자친구가 남기고 떠났다는 그 담배는 유난히 타들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물건이다. 어둠 속에 두점의 빨간 꽃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화면을 가득 메우는 그 장면은 좀처럼 잊기 힘든 순간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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