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편의 영화로 섣불리 감독의 스타일과 세계를 말하긴 어렵지만 최창환 감독의 경우는 그게 가능할 것 같다. 첫 장편 <내가 사는 세상>(2018)에서 대구 청년 예술가의 가난한 삶을 통해 노동문제를 제기했던 최창환 감독은 두 번째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에선 서핑에 빠진 이주노동자 2세대 소년 김수(곽민규)의 행복에 주목한다. 사회문제에 대한 통찰, 공간이 묻어나는 이야기, 거리를 둔 채 정지한 카메라 등 특징적인 요소는 여전하다. 같은 이유로 대구에서 제주로, 무대를 옮기고 나니 전혀 다른 색깔의 영화가 완성되었다. 제주를 배경으로 서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을 따라가는 이번 영화는 현실 문제에서 눈 돌리지 않으며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나간다.
-한국경쟁부문 특별언급에 선정됐다. 두편의 영화를 연출해 두번 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고 두번 다 수상했는데.
=전주는 내게 특별한 도시다. 2년 연속으로 불러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파도를 걷는 소년>은 출품까지 시간이 조금 촉박했던지라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편집을 마쳤고 후반작업을 완벽히 마치지 못해 기술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관객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심사위원들도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얘기했다. 일반상영 때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술적인 부분들을 개선할 테니 좀더 나아진 영화를 기대해도 좋다. 최종편집 때는 감정적으로 조금 넘친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을 단순하게 가져가 한층 미니멀해지지 않을까 싶다.
-각박한 환경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전작 <내가 사는 세상>의 연장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전반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이번엔 흑백이 아니다.
=처음엔 서핑이 주제가 아니었다. 사회에서 배척당한 이주노동자 2세대들이 모여 학교를 제압해나가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이주노동자 2세대는 분명히 사회에 존재하지만 지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대 취급을 받는다. 겉모습으로도 구분이 가능한 1세대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은밀하게 소외당한다. 이들이 만약 응집력을 가지면 재일동포 3, 4세대처럼 사회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는 훨씬 거칠고 폭력적인, 폭력으로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는데 한편으론 이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게 아니라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 제주에서 서핑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고 이게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핑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삶의 태도까지 바꿀 수 있나.
=서핑 자체가 특별한 게 아니다. 그건 단지 계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제로 제주에 사는 서퍼들을 보면 다른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온 분들이 많다. 생업을 포기하고 어느 날 갑자기 서퍼가 된다든지. 제주에 살면서 그들과 이웃이 되고 실제 서핑도 배우면서 ‘어느 날 문득’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를 걷는’이란 제목도 실제 서퍼들이 하는 용어에서 따온 거고 영화에도 실제 서퍼들이 출연한다. ‘소년회’라는 서핑 그룹인데 그 이름 그대로 소년 같은 삶을 살고 계시다. (웃음)
-<내가 사는 세상>이 대구를 무대로 빈곤한 예술가 청년들의 삶을 다뤘다면 이번엔 제주로 무대를 옮겼다. 늘 공간이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 같다.
=예전부터 장소를 보지 않으면 시나리오를 쓰지 못하는 편이다. 골목 냄새도 맡고 직접 살아봐야 ‘여기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된다. 원래 제주를 좋아해서 언젠가는 가서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조금 일찍 왔다. 밴드 허클베리핀의 이기용 형님과 친분이 있는데 그분이 제주에 사신다. 잠깐 놀러갔는데 “우리가 도시에서 살면서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잖아” 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일주일 정도 고민하다가 짐 싸서 바로 내려갔다. 원래 별로 짐도 없어서 홀가분하게. (웃음) <파도를 걷는 소년>도 도시가 배경이었으면 흑백에 좀더 우울한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밝은 분위기와 긍정적인 방향이 느껴진다면 그건 온전히 제주라는 공간의 힘이다.
-한편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 서핑이 소재이니 바다에 들어갈 법도 한데 카메라가 멀찌감치 떨어져 인물을 정면에서 풀숏으로 바라본다. 그게 최창환이라는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거리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있는 것들이 좋다. 어떤 행위가 일어난 뒤 일어나는 반응들을 응시하는 순간이 나에게 있어선 영화적인 시간들이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시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차이밍량 감독이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일어나는 파장을 찍고 싶지 날아가는 돌을 찍고 싶진 않다”고 말한 적 있다. 나 역시 사건이 아니라 그 뒤에 오는 감정들에 더 끌리는 것 같다. 바다에 직접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일단 스펙터클하게 보이는 게 싫었다. 파도에 직접 몸을 맡기는 순간 내가 인물을 바라보던 마음도 함께 사라질 것 같았다.
-롱테이크, 롱숏을 사용하는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딱히 의식한 적 없는데 비결이 있다면 아마 쉽고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작에는 심지어 8분짜리 롱테이크도 있는데 나 역시 나중에 시간을 재기 전까진 그 정도로 길다고 인식하지 못했다. 이번 영화에선 배우들과 비전문 배우들이 함께 나오는데 그 차이가 묘한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한편으론 그렇게 다른 톤의 연기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카메라가 그만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의식하지 않아도 나의 리듬이 배어나오기 마련이고 다행히 그게 관객에게 지루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면 감사한 일이다.
-전작에 이어 곽민규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남자배우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페르소나 같은 낯 간지러운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웃음) 곽민규 배우의 얼굴을 보면 마냥 순하고 착해 보인다. 영화에 “착한 얼굴 하지 마라!”는 대사도 있다. 저렇게 착한 얼굴을 한 인물이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궁금했다. 이번에도 원래는 인물 조감독을 부탁해서 작업하다가 주인공을 바꿔서 부탁한 케이스다. 의식적으로 멀리해야지 싶다가도 나도 모르게 ‘저 얼굴이 필요한 장면이 있나’ 상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흠칫 놀라곤 한다. (웃음)
-차기작은 또 다른 도시에서 찍을 예정인가.
=이번엔 제주에서 한번 더 찍을 생각이다. 호금전 감독 스타일의 무협을 현대로 옮겨오려 한다. 정적인 부분이 많은 무협영화일 것 같다. 여자주인공이 단도를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무협을 그려보고 싶다.
● <파도를 걷는 소년>의 이 순간!
‘파도를 걷는 소년’이라는 타이틀이 뜨는 장면, 소년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반 토막인 난 서핑보드를 발견하고 주섬주섬 챙겨 걸어간다. 영화는 주인공이 왜 서핑에 관심이 생기는지를 길게 설명하는 대신 이 한 장면으로 모든 상황을 납득시킨다.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소년의 눈에 서퍼들은 신기한 존재처럼 보였을 것이다. 저들은 돈도 안 버는데 어떻게 저렇게 생활을 할까. 그 궁금증이 소년의 첫 걸음이다. 다만 이걸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관심 없는 듯 까칠하게 굴다가 보드를 챙겨가서 고치는 장면이면 그 관심이 충분히 이해될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