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주에서 만난 한국 감독들①] <흩어진 밤> 김솔·이지형 감독 - 소리를 포함해 현실을 영화에 살려낸다는 것
2019-05-22
글 : 이주현
사진 : 박종덕 (객원기자)
김솔, 이지형 감독(왼쪽부터).

“흩,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설마 우리가?’ 싶어 이지형 감독과 눈을 마주쳤는데….”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작으로 <흩어진 밤>이 호명되던 순간에 대한 김솔 감독의 기억이다. 앞서 <흩어진 밤>에서 10살 수민을 연기한 아역배우 문승아가 올해 신설된 배우상까지 받은 상황이라 두 감독은 ‘2관왕을 할 리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시상식장에 착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수상소감에서 다 전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가 있냐 했더니 이지형 감독은 대뜸 “영화를 만드는 동안 발생한 우연한 사고들, 우연의 순간들에 감사한다”고 했다. 의도한 상황에 끼어든 의도치 않은 우연들. 통제할 수 없었던 촬영장 주변의 생활 소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 너머에 있었던 아역배우들의 연기. 통제의 영역 밖에 있던 것들을 영화적 우연과 생기로 끌어안은 두 감독의 내공은 신인감독의 것이라고는 쉽게 믿기 힘들다.

<흩어진 밤>은 이혼을 앞둔 한 가족의 초상을 10살 수민을 중심에 놓고 그린다. 엄마와 아빠는 성격 차이로 이혼을 결심하고, 14살 진호(최준우)와 동생 수민은 부모 중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좋아한다고 꼭 함께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한다고 꼭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어른의 말을 이해하기에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부모의 이혼으로 자신들의 삶이 변할 것이고, 그 미래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수민은 중학생이 되어야 배우는 ‘경우의 수’를 가족의 해체에 대입해본다. 네 식구가 한집에서 살 수 없다면 자신은 누구와 함께 살게 될 것인지. ‘아빠랑 사는 것은 재밌을까?’ ‘오빠와 일주일에 한번밖에 보지 못하면 서먹해질까?’ 정답이 없는 문제를 떠안고 해답을 구하려는 수민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안쓰럽다.

이지형 감독의 말대로 <흩어진 밤>은 “고난에 처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영화다. 그렇다고 가족의 해체가 결핍의 상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이혼은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일 중 하나일 뿐이다. 단지 어른의 거짓말과 무책임과 이기적 행동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아이들은 조금 일찍 어른이 될 뿐이다. 아빠가 일하는 박물관에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 유물을 바라보다 ‘정착’이란 단어의 뜻을 알게 된 수민이 자신은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서서히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한편 이지형 감독은 “아이들이 그 나이대 아이들 같지 않아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조숙한 아이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조숙한 아이들이 나온 것 같은데, 직관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어른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조숙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솔 감독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보아오던 아이들의 모습은 지양하려 했다”면서 “부모의 이혼이 슬프고 눈물나는 일일 수 있지만 그런 감정은 의식적으로 피했다”고 영화의 덤덤한 톤을 설명했다.

과잉의 감정으로 인한 피로도가 없다는 것은 <흩어진 밤>이 가진 미덕 중 하나다. 이혼을 목도하는 아이들이라는 설정은 자극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과장된 슬픔과 절망의 제스처를 대신하는 건 일상의 조각들이다. 일상의 한 토막을 옮겨놓은 듯한 시퀀스들이 모여 영화는 현실감을 획득하고, 자연스러운 생기와 온기가 영화에 스며든다. 이러한 원칙은 사운드와 음악의 사용에서도 일관되게 지켜진다. 두 감독은 감정에 호소하는 구태의연한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고 인위적인 사운드도 피했다. 김솔 감독은 사운드 연출과 관련해 “현실의 소리를 많이 살리려 했고, 자연히 앰비언스(현장의 공간음)에 대한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

수민을 연기한 문승아 배우의 연기 또한 영화의 리얼리티와 생기 확보에 큰 몫을 차지한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건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른다. 장편영화 경험이 전무한 아역배우 문승아는 슬픔과 외로움과 답답함과 불안함 사이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자연스런 화법과 태도로 표현한다. “아이들이 이 감정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지만 그건 우리의 기우였다.”(이지형 감독) 아역배우들의 연기나 심리묘사를 보며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5)을 연상하는 이도 있을 텐데, 두 감독이 <흩어진 밤>을 만들며 참고한 영화로 언급한 것은 노아 바움백의 <오징어와 고래>(2005), 카를라 시몬의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2011)이다. “<오징어와 고래>를 여러 번 봤다. 부모의 이혼 선언 이후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다는 점에서 비슷한 지점도 있고, 이야기의 구조나 리듬 등을 참고했다.”(김솔 감독)

김솔, 이지형 감독은 2017년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 나란히 입학한 동기다. 이지형 감독이 쓴 <흩어진 밤>의 시나리오가 학교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됐고, 김솔 감독이 이지형 감독에게 용기내 공동연출을 제안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두 감독은 모두 영화와는 무관한 공부를 했다. 김솔 감독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며 사진동아리 활동을 하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지형 감독은 간호학과를 졸업한 뒤 창작활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의 세계로 진로를 틀었다. 첫 영화를 만들기까지 “숙성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하는 이지형 감독과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는 김솔 감독은 <흩어진 밤>이 받은 칭찬을 동력 삼아 각자의 두 번째 영화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지형 감독은 “어떤 환경에서도 영화 만들기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라 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아릿하고 저릿한 삶의 단면을 보여준 두 감독이 공동의 작업이 아닌 개인 작업을 했을 땐 또 어떤 색채의 영화를 만들지 궁금하다. 내년 촬영을 목표로 각자의 이야기를 준비중이라는 김솔, 이지형 감독이 과작의 감독이 아니라 다작의 감독이 되길 희망해본다.

● <흩어진 밤>의 이 순간!

“운동하는 아빠와 수민이 얘기 나누는 밤 장면을 좋아한다. 벤치에 앉아 있는 수민의 표정에서 이 배우의 진가를 느꼈다. 그냥 무념의 상태인 건지, 무슨 생각을 하며 연기한 건지 감독으로서 궁금했다.” _이지형 감독

“집 나간 수민을 찾으러 다니는 엔딩에서, 수민과 진호가 대화를 나눌 때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하며 고민하는 모습이 배우들의 표정에 잘 담겼고, 그 여운이 엔딩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_김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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