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주에서 만난 한국 감독들⑦] <이타미 준의 바다> 정다운 감독 - 공간과 연결된 고리들의 중요함을 믿는다
2019-05-22
글 : 송경원
사진 : 백종헌

건축은 사람을 향한 마음의 형상이다. 건축가 이타미 준(본명 유동룡)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언제나 중심에서 한걸음 벗어난,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땅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탐색해왔다. 왜냐하면 그의 건축은 언제나 사람, 정확히는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라는 한 단어에 감히 담을 수 없는 그 지난하고 긴 시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이타미 준이 지은 건축물뿐인지도 모르겠다. 땅을,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깊숙이 이해하고 위로하는 이타미 준의 건물은 그렇게 공간에 뿌리내린 후 우리와 함께 늙어가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정다운 감독의 <이타미 준의 바다>는 이타미 준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중심에 놓고 그의 행적을 뒤따르는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2011년 이타미 준의 건축을 처음 만난 날의 감동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제주도의 시아버님께서 영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저희 부부에게 꼭 보여줄 공간이 있다고 데리고 가주신 곳이 수, 풍, 석 미술관이었다. 그 때 사람을 위로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따뜻한 건축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이타미 준 선생이었다.” 벅찬 울림과 별개로 정다운 감독은 처음엔 선뜻 이 건축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분이 재일동포로 살아온 시간, 고독과 싸워오면서도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용기를 내가 감히 담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왜 진즉 찾아뵙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함께 이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후 이타미 준 선생의 딸인 유이화 건축가를 찾아가 허락을 구한 뒤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했고 8년 만에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8년의 제작기간은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어떠면 운명처럼 필요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하면 공간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나는 공간과 연결된 고리들이 더욱 중요하고 믿는다. 이를테면 공간과 사람의 연결, 공간과 시간의 연결이 핵심이다. 건축이 삶의 일부가 되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과정, 시간이 가지고 있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의 바람처럼 <이타미 준의 바다>는 건축의 물성(物性)을 드러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건축은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언제 만나는가도 중요하다. 날씨와 계절, 디테일하게는 공기의 질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보여준다. 내가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느꼈던 것들을 화면을 통해 대리체험할 수 있도록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다운 감독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제주도에 있는 이타미 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수.풍.석(水.風.石) 미술관을 담아냈다. 수 미술관을 찍을 땐 물과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잡아낼 수 있는 방식을 취했고, 풍 미술관에서는 나무 패널 사이로 보이는 풀숲의 움직임을 담았다. 빛과 어둠의 아름다운 조화를 포착한 석 미술관의 풍경은 관객을 명상의 공간 속으로 고요히 안내한다. <이타미 준의 바다>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건조하게 관찰하고 전달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이타미 준에 대한 존경과 헌사를 기반으로 한 긴밀한 대화에 가깝다. 정다운 감독은 스스로 공간에 예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이방인의 마음을 일부나마 상상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 섬에서 자연과 함께 살다가 한창 예민한 시기에 도시 한복판에 떨어져 심리적으로 방황을 많이 했었다. 어쩌면 그래서 제주도에서 이타미 준 선생의 건축을 만났을 때 그토록 마음이 흔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체험한 위안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 출발한 다큐멘터리는 그런 까닭에 건축가 이타미 준을 향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타미 준 선생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시미즈에서 어린 시절 보냈다. 시미즈의 풍광이 제주도와 비슷하다. 귤밭이 많고 집들은 지붕이 낮고 고즈넉하며 후지산이 바로 보인다. 이타미 준 선생이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제2의 고향이라고 느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애정의 연장에서 정다운 감독은 이 영화가 맺어준 인연과 영화의 운명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했다. 대개 제작기간이 길어진 다큐멘터리의 경우 애초에 구상했던 것들과 내용이 다소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타미 준의 바다>는 원래 방향과 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필요한 이야기와 인터뷰를 충분히 담을 때까지 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었다. 8년이란 제작과정은 그 마지막 퍼즐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준 인물은 박창현 건축가 사무소에서 인턴을 하던 고토 사라라는 학생이었다. “고토 사라는 이타미 준 선생을 주제로 한 논문을 준비 중이었다. 어머니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그녀는 디아스포라적인 건축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고토 사라를 시작으로 이타미 준 선생과 직접 인연이 없는 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로 이어질 때, 정다운 감독은 운명을 느꼈다고 말한다. “만날 사람들은 결국 만나게 되더라. 다큐멘터리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타미 준 선생을 발견해나가는 탐색과 모험의 시간처럼 다가왔다. 선생이 뿌린 씨앗들이 어떻게 각자의 인생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한국 현대건축의 오늘>(2016)에 이어 <이타미 준의 바다>를 선보인 정다운 감독은 부지런히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이번엔 개별 건축가에서 좀더 확장해 도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가제는 <위대한 계약, 파주출판도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파주출판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유지되고 있는지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다행히 이번에는 속도를 내서 올해까지는 1차 편집본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정다운 감독의 일관된 관심사는 결국 공간이 어떻게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탐색이다. “건축과 공간을 단순히 부동산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걸 보며 매번 좌절감을 느낀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내 아이가 어떤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과 살아가게 될지가 고민이다. 생명을 살리는 건축,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간의 선한 영향력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알려나가고 싶다.” 물론 하루아침에 인식의 변화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건축의 시간에 귀 기울이는 <이타미 준의 바다>와 같은 목소리가 부지런히 쌓인다면, 그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 <이타미 준의 바다>의 이 순간!

“초반 15분은 온전히 이타미 준의 건축, 그 자체에 헌사된 시간이다. 이타미 준 선생의 건축 안에서 뛰어노는 아이의 모습을 슬로로 잡는 등 최대한 건축의 시간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공간의 정수를 느낄 줄 안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 모습을 통해 단순히 건축을 ‘찍는’ 게 아니라 함께 자라고 나이 들어가는 시간을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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