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묘 이장을 앞두고 남처럼 흩어져 살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가족들은 각자 삶에 찌들어 피곤하다. 싱글맘인 장녀 혜영(장리우)은 육아휴직 신청을 했다고 해고 위기에 놓이고, 둘째 금옥(이선희)은 남편의 외도를 의심 중이다. 결혼을 앞둔 셋째 금희(공민정)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늦깎이 대학생 넷째 혜연(윤금선아)은 여자에서 차별적인 세상에 분노를 느낀다. 무책임한 막내아들 승낙(곽민규)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여정은 가족의 속살을 헤집고 가부장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단편영화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을 연출한 정승오 감독은 첫 번째 장편영화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원숙한 솜씨로 다양한 인물 군상을 정돈한다.
-무엇이든지 첫 경험은 강렬한 법이다. 첫 장편영화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고 CGV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을 받았다.
=아직 얼떨떨하다. 영화제 직전까지 후반작업을 해서 모니터 할 시간도 부족했다. 첫 상영 땐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찾느라 신경이 곤두서서 관객 반응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배우들이 9명이나 내려와 끝까지 함께해줘서 정말 감사했다. 영화제 내내 가이드가 되어 배우들을 인솔하고 다녔는데, 일정 끝나면 숙소에 들어가서 기절하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진이 다 빠져서 그냥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웃음)
-<이장>은 어떻게 시작된 영화인가.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찍고 나서 장편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후 단편을 2편 더 찍은 후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장편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잘 안 풀릴 즈음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펀딩한다고 하기에 이게 선정이 되면 억지로라도 뭔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모티브가 된 짧은 아이디어로 응모했는데 덜컥 뽑혀버렸다. (웃음) 그때까지 쓰던 걸 잠시 미뤄두고 시나리오부터 촬영까지 딱 1년 동안 농사를 지어 완성한 게 <이장>이다.
-묘지 이장으로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모이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취했다.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흩어진 가족이 엄마의 병문안을 가는 반나절을 따라간다. 그걸 확장한 셈인데, ‘이장’이라는 상황을 중심축 삼은 것은 언젠가 봤던 풍경 때문이다. 할머니 성묘를 하고 내려오는데 공동묘지가 아파트 부지로 결정되어 철거 중인 걸 보고 ‘굳이 죽은 사람까지 끄집어내면서 아파트를 짓고 싶을까’ 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거기에 남겨진 자녀들의 집안이 가부장적이란 설정을 보태 억압과 차별을 받아온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서사를 끌고 나가는 방향으로 설정했다.
-5명의 형제자매를 어떻게 꾸리느냐가 핵심인 영화다. 장녀 혜영, 둘째 금옥, 셋째 금희, 넷째 혜연, 막내아들 승낙까지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줄줄이 낚시하듯 추천과 인연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다. (웃음) 제일 처음 염두에 둔 배우는 장녀 역의 장리우와 막내이자 장남인 곽민규였다. 프리 프로덕션을 길게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배우들의 추천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곽민규 배우가 공민정 배우를 추천했고, 장리우 배우가 이선희 배우를 연결해주었다. 넷째 혜연 역이 고민이 많았는데 에너지가 있는 배우를 찾고 싶어 단편영화를 찾아보던 중에 윤금선아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출산하고 1년 정도 쉬다가 복귀를 준비 중이던 차라 흔쾌히 응해주었다. 역할상 짧은 머리가 필요했는데 군인 머리도 할 수 있다며 열정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캐스팅이 된 후엔 이들 덕분에 어떻게든 저절로 만들어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별 걱정이 없었다.
-네명의 자매가 막내 승규를 잡으러 다니는 구도인데, 첫째 혜영과 넷째 혜연, 둘째 금옥과 셋째 금희가 짝지어지고 막내 승규는 따로 노는 인상이다. 일부러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가.
=의도한 것은 아니고 완성되고 난 뒤에야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가 작명에 재주가 없어서 항상 주변에서 실제 이름을 따오곤 한다. 이번에는 처가의 형제자매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처가가 딱 오남매에 막내아들이 있는 집이다. 아내는 그중 셋째인 금희인데 실제 나의 에피소드가 반영되기도 했다. 아내가 워낙 꼼꼼한 사람이라 결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를 굉장히 답답해했다. 엄태화 감독이 맡은 용삼이 화상전화로 말하는 갑갑한 대사들은 실제로 내가 했던 말이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반성한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큰 숙제이자 개인적인 걱정은 처가에서 영화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거다. 아직까진 아내만 봤는데 “이미 내 손을 떠난 거 같다”라는 모호한 코멘트를 남겨서 하루하루 불안에 떨고 있다. (웃음)
-가족 내에서 강인하고 주체적인 자매들과, 답답하고 전근대적인 남성들의 대비가 도드라진다.
=기본적으로 가족 내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네 여성이 주도하는 구도다. 그들의 개성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영화를 끌고 가기 위해서 캐릭터별 상황을 증폭시켰다. 첫째는 남편이 없고 둘째는 남편이 외도 중이며 셋째는 답답한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넷째는 여성인권운동가의 기질을 기반으로 선명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사건이 적고 볼거리가 많지 않은데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사정을 양파껍질 벗기듯 하나씩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경우 큰아버지와 막내아들 승낙, 첫째 혜영의 아들 동민으로 이어지는 3대의 변화와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남자들 역시 자신의 의지로 가부장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행동하도록 교육받고 강요받아온 존재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남자들도 자연스럽게 바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세대간의 차이를 만들어나갔다.
-차에 탄 가족들의 다양한 조합을 보여주던 영화가 마지막에 결국 같은 차에 함께 타고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게 가족에 대한 이 영화의 핵심 이미지처럼 보인다.
=가족이 무엇인지 답을 낸다기보다는 그 고민의 언저리까지 가는 이야기다. 가부장적인 세상에 대한 각자의 리액션을 보여주는 것까지가 이 영화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니 함께 고민해보자는 권유 또는 질문이라고 봐주면 감사할 것 같다. 차기작 소재는 부지런히 긁어모으는 중이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진 미정이지만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잘 아는 이야기보다는 알고 싶은 이야기를 다루는 게 늘 재미있다.
● <이장>의 이 순간!
“1박2일간 벌어지는 이야기이고 밤보다는 낮에 일어나는 상황들이 많다. 촬영 회차가 적은데 해가 떠 있는 동안에 다 찍어야 해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다들 초조했다. 10월 중순부터 딱 한달간 촬영했던지라 해는 점점 짧아져 갔고 해가 질 때 즈음이면 오케이의 향연이 이어졌다. (웃음) 저녁 무렵이면 마감시간이 코앞에 닥친 작가처럼 집중력이 엄청나게 올라갔는데 그때 찍었던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박혀 있어 지금 봐도 등골이 서늘하다. 그때의 짜릿했던 감각이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