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주에서 만난 한국 감독들②] <불숨> 고희영 감독 - 불 앞에 선 인간의 숙명
2019-05-22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한평생을 매달려도 끝내 만들지 못하는 그릇이란 어떤 것일까?” <불숨>은 마음속에 품은 단 한점의 완벽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도예가 부녀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조선 도공이 만들었지만, 일본의 국보로 봉인된 조선 찻사발(일본명 기자에몬 이도다완)을 재현하려는 천한봉 명장과 천경희 작가는 매일 밤 가마 앞에서 사투를 벌인다. 자연과 상생하는 제주 해녀들의 숭고함을 비췄던 <물숨>(2016)의 고희영 감독이 충분히 매혹될 만한 대상이다. 제주 우도로 들어가 7년간 해녀들의 일터에 카메라를 뿌리내린 감독은 <불숨>에도 6년을 투자했다. 이번에도 그를 대상과 이토록 오랫동안 붙어 있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20대에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감독이 취재차 ‘문경요’(1972년 천한봉 선생이 설립. 부녀는 이곳에서 일하며 전통 찻사발 복원과 차 문화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편집자)를 방문한 것이 첫만남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2012년, <물숨>의 후반작업을 마무리하던 고 감독은 천한봉 선생을 다시 찾아갔다. “이제는 자기 작품에 만족하시겠지 싶었는데, 선생님 머릿속에 있는 그릇을 만들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내 마음에 불이 이는 것 같았다.” 무형문화재 사기장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곧 장인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향한 약간의 고정관념과 싸워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숨> 때도 해녀에 대해 이제는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도자기 명인도 뻔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 조금은 두려웠다. 작품에 대한 피상적인 이미지, 그 벽을 넘고 싶었다.”

전통 가마 곁을 조심스레 맴돈 지 2년이 지난 무렵, 고희영 감독은 “아버지 옆에 그림자처럼 있는” 딸의 서사에 주목하게 됐다. <불숨>은 명장의 생애와 자취를 좇으며 시작한 영화지만 작품이 정서적으로 더 가까이 밀착하는 대상은 그의 딸 천경희 도예가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남동생 대신 아버지의 소명을 이으려는 천경희 작가의 자립 과정은 도자기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가마 깊은 곳에서 몇번의 재벌구이를 견디는 과정과 비슷하다. 좀처럼 불 앞을 내어주지 않는 아버지 옆에서 묵묵히 버티고, 때로는 노파심을 거두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물러서지 않으며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마찰과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관계지만, 공들여 만든 수백개의 그릇을 가차 없이 깨버리는 모습은 부녀가 똑 닮았다.

천경희 작가가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고희영 감독은 불의 조화(造化)를 시각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700도의 불은 파랗게 막 까불고, 그릇이 완성되는 1300도의 불은 마치 선녀가 치맛자락을 날리는 것 같다”는 천한봉 선생의 말을 가시적으로 기록하려는 노력이었다. 신통한 불의 변화를 이미지로 잡아내기 위해 그간의 다큐멘터리 작업과 달리 현장에 8K 고해상도 촬영이 가능한 RED 카메라를 들였다. 불 앞을 지키며 수시로 장작을 넣는 천한봉 선생은 가마 안에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고무신을 신고 생활하며, 계속해서 빗자루로 주변을 쓸어낸다. 그런 상황에서 대형 카메라와 촬영팀이 오갔으니, “선생님은 불을 놓을 수 없고 나는 촬영을 놓을 수 없어서 하루하루 마음이 탔다”고 말하는 감독의 딜레마가 짐작이 간다. 한번은 긴장한 촬영팀이 선생이 쌓아둔 그릇을 쓰러뜨린 일도 있었다. 천한봉 명장은 일본 국보가 된 ‘기자에몬 이도다완’도 실은 누군가의 실수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면서 괜찮다고 감독을 다독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무조건 견뎌야 해’라고 늘 말하는데, 그 말이 내게도 위로가 됐다. 그릇처럼 사람도 고통스러울 때 깨어지지 말고 견디고 구워져야 하는구나, 싶더라.”

<불숨>은 여러모로 바다 아래서 자기 한계를 알고, “자연이 주는 것만큼 가져오라”는 태도를 말했던 <물숨>의 연장선이다. “선생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다 연마하신 분이다. 석달의 작업기간 중 마지막 재벌구이가 가장 중요한데, 늘 ‘이제 다 된 것 같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후에 어느 순간 바람이 휙 지나가거나,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도 한다. 결국 마지막 10%는 인간의 영역 밖이다.” 영화가 따라가는 연마의 시간은 한계에 도전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동화’(同和)를 배우는 과정이다. 한편 작품 바깥에선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낸 뜻깊은 메이킹 스토리도 있었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 2019에 선정되고 난 후, 일본 교토에 가서 기자에몬 이도다완을 직접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천한봉 명장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희영 감독이 약 4년 전부터 교토 대덕사의 분원인 고호안에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보냈지만 일본측에서 국보를 쉽게 보여줄 리 만무했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의 투자 덕에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올 수 있었다”는 고희영 감독은 천경희 작가와 천한봉 선생을 차례로 교토에 데리고 가 고호안 암자를 지키고 있는 주지 스님을 설득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절을 지키고 있던 주지 스님이 부녀의 사연에 감응한 덕분”에 영화 후반부에 국보 공개 장면이 성사됐다. 이 순간 두 도예가가 느끼는 전율은 스크린 너머로도 고스란히 전염된다. 무릎을 끓고 그릇의 면면을 숨죽여 눈에 담는 부녀의 모습에서 감독은 “그릇의 매화피(다완의 아래쪽 문양으로, 가마 속에서 유약이 자연스럽게 몽글몽글 뭉친 것.-편집자)가 마치 조선의 마지막 도공이라 불리는 선생님을 향해 흘리는 눈물 같다”고 느꼈다. 불과 공명하는 장인, 스승에게서 독립하려는 제자, 그리고 소박함의 극치를 이루는 조선 찻사발의 아름다움이 장작처럼 한데 뒤섞여 영화를 달군 끝에 탄생한 마법 같은 장면이다. 고희영 감독은 현재 <불숨>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김형선 사진작가를 도와 트랜스젠더의 초상을 모으는 중이라고 전했다. 오래전부터 준비 중이던 중국 문화대혁명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역시 두 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때가 되면 재개할 예정이다. 고희영 감독의 오랜 정성이 집약된 <불숨>은 앞으로 그가 어떤 주제를 말하든 인간의 숙명을 사려 깊게 헤아릴 것임을 확신하게 만드는, 믿음직한 이정표 같은 영화다.

● <불숨>의 이 순간!

영화 중반부 즈음, 작업 중이던 천경희 도예가가 카메라 앞에서 갑자기 내밀한 이야기를 꺼낸다. 사실은 죽은 동생이 있다고, 자신은 그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묵묵히 물레를 돌리는 모습이 이어진다. “그 장면을 잘 보면 앵글도 비뚤고 초점도 안 맞을 때가 있다. 영화를 찍는 게 내 직업이라지만 그 순간엔 카메라를 건드릴 엄두도 못 냈다.” 처음엔 그다지 이야깃거리가 될 게 없다며 출연을 고사했던 천경희 도예가가 불쑥 진심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물레는 계속 돌아가고 나는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렸다”는 그 장면을 기점으로 대상과 관찰자는 서로 한층 가까워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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