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프렌즈> 그 초강력 ‘프렌드십’의 비밀 [2]
2002-05-03
글 : 김혜리

따뜻한 여섯 인물의 정육각 구도

재능있는 코미디언인 동시에 시청자들에게 동일시와 연모의 대상으로 나무랄 데 없는 배우들의 캐스팅과 맞물려 <프렌즈>의 성공을 끌어낸 주력은 물론 탁월한 시나리오다. 열세명의 작가들로 이루어진 팀이 달라붙어 써내는 <프렌즈> 각본은 보통 두개의 스토리라인으로 엮이는 시트콤의 공식을 깨고 매회 세 갈래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런 방식은 에피소드에 따라 일부 인물이 소외되는 일을 막고 여섯 캐릭터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프렌즈>는 보통 시트콤보다 신의 수가 많고 각 신의 길이는 짧은 형태를 갖게 됐다. 그 점은 한 채널을 지긋이 보지 못하는 리모컨 시대의 참을성 없는 시청자들의 주의를 잡는 데에도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한편 <프렌즈>가 장수 프로그램이 된 원동력은 사회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여섯 주인공의 무한한 잠재성 혹은 불안 안에 있다. 좀처럼 여섯명의 색깔을 온전히 맞출 수 없는 안타까움이 루빅스 큐브 장난감의 매력이듯이,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이 언제 어떤 직장을 갖게 될지, 누가 누구와 로맨틱하게 엮이거나 룸메이트가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프렌즈>를 매주 지켜본다. <프렌즈>는 ‘X세대 시트콤’의 딱지를 완강히 거절했으나(<프렌즈>의 시청자 그룹은 18살에서 45살로 집계됐다) 20대 후반의 불확정성에서 매혹을 크게 빚진 것이다. 한편 “인생은 반 시간 안에 결판나지 않는다”라는 리얼리즘적 원칙을 가진 <프렌즈>의 제작진은 에피소드 말미에 어떤 교훈이나 결론을 암시해야 한다는 강박을 깨끗이 차버렸다.

소프 오페라와 시트콤이 거의 혼혈의 단계에 다다른 1990년대의 TV 환경에서, 아니 위대한 코미디의 혈관에는 언제나 페이소스가 흐른다는 오래된 황금률을 돌이키더라도, 드라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시트콤들이 공유하는 미덕이다. <프렌즈>의 캐릭터들은 방영 초기에 일부 평자들이 불평했듯 언뜻 보기에는 물질과 순간적 쾌락에 집착하는 얄팍한 젊은이들처럼 보이지만 사귈수록 괜찮은 녀석들이다. 그들의 따뜻한 심장은 이들 중 누군가가 실연으로, 실직으로 넘어져 무릎을 깨는 순간에 박동을 전해온다. 레이첼과 연인 관계를 청산한 로스는 그녀가 갈비뼈를 다치자 고대한 방송 인터뷰를 놓쳐가며 레이첼을 시중들고, 활기찬 모니카가 실연으로 자기모멸에 빠졌을 때 ‘농담꾼’ 챈들러는 뒤에서 담요를 둘러 토닥여준다. 패거리 중 가장 생각이 없어 보이는 조이는 가장 자주 코끝을 시큰하게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른한살 생일을 맞은 피비가 이룬 것이 없다며 포르투갈인을 만나는 일도, 완벽한 입맞춤도 경험하지 못했다고 낙심하자 조이는 피비를 따라나간다. 친구들이 그가 생일케이크를 먹으러 갔다고 믿는 동안, 조이는 피비에게 숙련된 키스를 선사하고 덧붙인다. “아, 그리고 나 1/16은 포르투갈 사람이야.” 하지만 신파는 <프렌즈>가 경계하는 독약. 가슴 아픈 순간은 언제나 부드러운 농담으로 토핑된다. 일례로 <프렌즈> 제작진은 로스가 기르던 원숭이와 헤어지는 에피소드를 방영하면서 녹화장 청중들의 탄식 소리를 지우고 방영한 바 있다.

청춘 시트콤 <프렌즈>의 정치적 입장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포용하는 리버럴리즘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섹슈얼리티의 문제에서 <프렌즈>는 처음부터 미국의 TV쇼로서는 눈에 띄게 개방적인 포즈를 취했다. 거실에 로렐과 하디의 사진을 걸어놓고 조이와 알콩달콩 살아가는 챈들러는 수년 동안 팬들 사이에 커밍아웃 임박설을 나돌게 했고, 카메오 출연한 위노나 라이더와 레이첼의 키스를 비롯해 동성 친구간의 입맞춤과 이러저러한 동침은 <프렌즈>가 맛들인 개그다. 그룹 가운데 수입이 좋은 세명과 가난한 세명의 신경전을 그린 초기 에피소드는 <프렌즈> 최고작의 하나로 꼽힌다. 반면 인종주의의 기준에서 <프렌즈>는 종종 비판받았다. 조이는 이탈리아계, 로스와 모니카 남매는 유대계로 설정돼 있지만 조이와 그 가족의 성격은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고 로스의 애인으로 등장한 중국계 줄리는 극중의 미운털이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흑인 캐릭터의 부재. <프렌즈>가 시청률 정상의 프로그램으로 부상하던 1995년 3월 오프라 윈프리는 자기 쇼에 출연한 <프렌즈> 출연진에게 “흑인들이 나오면 내가 한번 게스트로 들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뼈있는 농담도 던진 바 있다. 제작진의 해명은 엄밀한 오디션 결과에 따른 우연이라는 것. 7부에서는 로스와 조이가 새로 이사온 흑인 아가씨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구색을 위한 인종 안배는 더욱 우스운 일이겠으나 <프렌즈>가 온갖 인종이 들끓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쇼라는 점을 고려하면 큰 감점 요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여덟 번째 시즌, 이제 정말 어른이 되어야 해

“하느님, 왜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죠? 왜? 왜?”

여섯 친구가 하나하나 서른살 생일을 맞을 때마다 조이는 셰익스피어극의 배우처럼 비장하게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퇴행적인 ‘애어른 (Kidult: Kid+Adult) 쇼’라는 일부 비판에서 보듯 서른 안팎의 성인들이 배타적인 서클을 이루고 밤이나 낮이나 농담을 주고받으며 같이 어울리는 <프렌즈>는 1990년대 미국 대중문화의 전반적인 아동화 경향을 보여주는 창이기도 하다. 에로틱한 내용이 많은 팬픽의 세계에서 <프렌즈>가 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등장인물에 여섯 주인공을 대입한- 피비는 마법사, 챈들러는 허수아비 등- 팬픽을 낳았다는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많은 팬들은 <프렌즈>가 자기 생활에서 발휘하는 기능을 일종의 위안과 치료에 빗댄다. 거기에는 사회적 성장과 성인이 되는 비용 지불을 유예하는 모라토리엄의 안식이 있다. 그들은 <프렌즈>의 응접실에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고민과 유사한 문제들을 보고 주인공들이 친구들- 부모가 아닌- 의 지원에 힘입어 그것들을 감당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유쾌해지는 것이다.

시리즈와 함께 조이, 레이첼, 모니카, 로스, 챈들러, 피비가 나이먹어가면서 막강한 <프렌즈>도 안팎의 고비를 맞았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배우들의 나이를 가리기 힘들어졌고, 결혼, 출산, 정착 등의 터프한 문제를 더이상 경쾌하게 튕겨낼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폐소공포증’의 기미는 1998∼99년 시즌 무렵부터 뚜렷해졌다. 급기야 여섯 번째 시즌 끝무렵에는 <프렌즈>가 대사 맛이 시들었고 슈퍼스타 카메오로 아이디어 빈곤을 때우려 한다는 불평마저 제기됐고 <섹스 앤 시티> 등 솔직함을 무기로 하는 도시 시트콤이 등장한 것도 <프렌즈>의 주가를 깎아먹었다. 그러나 챈들러와 모니카의 약혼에서 결혼까지 기간이 담긴 7부에서 슬럼프라는 수군거림을 들었던 <프렌즈>는 30대의 심각한 이슈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는 정공법과 친구들 가운데 새로운 로맨스 삼각구도를 만드는 약효가 증명된 요법으로 보기 좋은 리바운드를 성공시켰다. 지난해 가을부터 방영을 시작한 8부는 7부와 비교해 17%가 오른 시청률, 평균 시청자 2649만명을 기록하며 라이벌 <서바이버>를 꺾고 정상에 복귀했다. 미국 언론들은 9·11 테러 사태로 편하게 정을 주고 웃을 수 있는 시리즈를 필요로 한 미국인들의 정서도 <프렌즈> 재기의 요인으로 분석했다. 8부에서 지난 8년간 조금씩 씩씩하고 강한 여자로 변해 온 레이첼은 용감하게 독신모의 길을 선언하고, 덜렁이 조이는 평생 몰랐던 깊숙한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조이의 발사이즈, 챈들러의 중간 이름, 모니카의 처녀파티 등 새롭게 발굴되는 정보도 친숙해질 대로 친숙해진 이 시트콤의 8부가 주는 잔재미. 8부의 큰 성공으로 와 제작사 워너브러더스, 출연진 사이의 개런티 줄다리기는 자연 소멸했다. 여섯 주연은 지난 2월 편당 100만달러의 메가톤급 계약을 따냈다. 조이(매트 르 블랑)를 중심으로 한 외전 시트콤이 기획될 거라는 풍문도 있지만 와 워너 관계자, 여섯명의 스타는 9부가 마지막이라는 설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프렌즈>는 <전원일기>나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처럼 등장인물들이 우리와 함께 늙어가는 것을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연속극이 아니다. <프렌즈> 마니아들은 이제 그들의 빈잔을 채워줄 더이상의 ‘리필’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채비를 해야 한다. 어차피 <프렌즈>는 우리가 결코 가진 적 없거나 아마도 갖기 어려울 관대하고 행복한 20대의 찬가이고, <프렌즈>를 향한 애정은 가본 적 없는 곳을 향한 향수라고 말하면 위로가 될까. 그러나 <프렌즈>에 단 하나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지금 젊은 내가 가진 쿨한 생각과 유치한 즐거움, 열린 마음을 꼭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다독임이었다. 청년(靑年)은 특정한 나이가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믿는 한, <프렌즈>가 팬들의 마음 속에 들여놓은 푹신한 소파까지 치워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제공 동아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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