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곁에는 자주 죽음과 슬픔이, 유령적 기운이 따른다. 스크린 속을 유유히 방황하는, 아직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배우는 조용한 자태로 관객을 향해 최면을 거는 데 능하다. 베를린 출신의 1995년생 배우 파울라 베어에겐 초연함과 결연함, 성숙함과 순진무구함이 돌연 교차하는 미스터리가 깃들어 있다. 그 모호하고 초월적인 아우라는 올해 한국에 개봉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두 영화 <트랜짓>과 <운디네>에서 실연의 그림자를 입었다. 파울라 베어는 <트랜짓>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망명지를 헤매다 자꾸만 다른 남자를 오인하고, <운디네>에선 오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뒤 급작스런 새 사랑과 충돌한다. 이들 영화에서 겹겹의 비밀과 거짓말, 신화적 운명을 통과하는 파울라 베어는 관객을 영화의 휘장 너머로 데려가 어느새 현실의 규칙에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존재다. 이 신비한 작용을 일으키는 피사체에 대한 묘사가 자칫 뛰어난 배우를 안이하게 설명하는 것이 될까 우려스럽다.
파울라 베어의 진정한 뛰어남은, 그가 연기하는 인물이 자주 실의와 상실에 붙들린 순간에서조차 어디서 얻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굳건함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일견 평범하고 부드러운 인상 속에 내재된 단호한 카리스마를 일찍이 엿본 프랑수아 오종 감독(<프란츠>)은 그녀를 독일의 전설적 배우 로미 슈나이더(<태양은 가득히> <시씨>)와 견준 바 있다.
정규 연기 교육을 받은 적 없이 학교 복도에서 캐스팅된 파울라 베어는 전쟁 중 적국의 남자를 사랑하게 된 소녀를 연기한 <폴 다이어리>로 16살에 커리어를 시작해, 데뷔 7년차에 <프란츠>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의 신인배우에게 수여하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프란츠> <작가미상> <트랜짓>을 거쳐 <운디네>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면서 독일은 물론 유럽 아트하우스 무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기품 있고 묵직한 행보와 달리 그녀의 나이는 이제 겨우 26살. 특유의 고전적 인상이 빛을 발하는 시대극이나 우화적 스타일을 벗어나, 완전히 땅에 내려온 지리멸렬한 인물을 연기하는 베어의 얼굴도 궁금해진다. 젊음의 정점에 선 배우가 품어낼 예측 불허의 매혹을 두렵게 기대하면서, 우리는 이제 무방비 상태로 그 미지의 손짓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무서운 얼굴
<운디네>의 첫 장면, 가혹하게도 대낮 카페에서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가 눈물을 훔친다. 남자는 막 떠나려는 참인데, 부서진 마음을 아직 주워담지 못한 여자가 자꾸만 남자를 붙잡고 늘어진다. 흔하디흔한 이 실연의 장면에서 파울라 베어가 뿜어내는 기운은 낯설고 자못 기이할 정도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지만 자세에는 흔들림이 없고, 불안정하게 굴지만 상대를 응시하는 눈빛은 취약하지 않다. 곧이어 “날 떠나면 널 죽여야 해”라는 신화 속 물의 정령의 대사까지 더해지자 베어의 얼굴은 무섭게 변모한다. 일상적 리듬을 벗어난 감정과 행동까지도 일순 투명한 진실처럼 스미게 만드는 것. 파울라 베어의 연기를 볼 때면 그런 역동적인 사로잡힘에 대해 문득 실감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