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아 테일러조이
<퀸스 갬빗> <뉴 뮤턴트> <엠마>
외계에서 날아와 지구에 불시착한 존재가 우리 안에 몰래 섞여 지내고 있다면, 왠지 애니아 테일러조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에겐 예쁘다, 잘생겼다와 같은 이분법을 넘어서는 남다른 개성이 있다. 종종 테일러조이의 얼굴을 보고 있다 보면 저 배우는 어떤 작품에서든 주인공을 맡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마저 드는데(실제로 데뷔작 <더 위치>에서부터 그는 주연이었다.-편집자), 등장하는 모든 프레임에서 시선을 가져간다. 마녀 재판의 중심에 섰던 <더 위치>, 해리성 다중인격장애 환자에게 납치당했던 <23 아이덴티티>로 경력을 시작했던 그는 인디영화계의 ‘스크림 퀸’ 같은 따분한 수식어도 일찌감치 뛰어넘었다.
6년 동안 21개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어떤 상자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던 그의 매력이 만개한 것은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 그가 분한 체스 신동 베스 하몬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환경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버려진 고아, 남성 중심 세계에서 투쟁하는 여성, 신경안정제와 알코올 중독과 싸우는 천재와 같은 세팅에서 예상되는 전개를 하나씩 비켜가며 소통의 긍정적인 힘을 설득하는 <퀸스 갬빗>은 백 마디 대사보다 테일러 조이의 눈빛으로 압도하는 작품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독특한 마스크는 베스의 15살부터 22살까지의 삶을 자유롭게 오가고, 발레하듯 움직이고 새침하게 체스 기물을 옮길 때 묻어나는 미묘한 대범함은 어째선지 전통적인 젠더 구분까지 무너뜨린다.
사라 폴슨
<런> <래치드> <미세스 아메리카>
사라 폴슨은 ‘아메리카’와 유독 인연이 깊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리즈에 출연하며 에미상 후보에만 7번 지명됐고, 특히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1: 더 피플 v.O.J.>로 골든글로브와 에미상을 모두 석권했다. 하지만 호러나 범죄물과 인연이 깊은 그를 이른바 ‘센’ 연기에 특화된 배우로 보는 것은 성급하다. 사라 폴슨은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에서만 영매, 마약중독자, 결합 쌍둥이 등을 연기했고 시리즈의 특성상 다양한 시공간의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를 얻었다.
사라 폴슨의 또 다른 ‘아메리카’ 연작에 추가될 <미세스 아메리카>에서 그는 비로소 시대를 초월하는 여성의 보편적 얼굴로 등장한다. 앨리스는 평등권 수정안 비준(ERA)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소심한 가정주부다. 친구 필리스(케이트 블란쳇)가 알려주는 것만을 믿고 따르던 그는 우연히 페미니스트 집단과 엮이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적대시했던 여성들이 사실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각해가는 앨리스는 시청자가 가장 이입할 만한 캐릭터다.
더불어 넷플릭스 시리즈 <래치드>(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의 프리퀄로, 정신병원 간호사 래치드의 젊은 시절을 다룬다.-편집자)나 스릴러영화 <런>의 미심쩍은 엄마까지, 2020년의 사라 폴슨은 장르색이 강한 작품에서도 뒤틀린 가족관계의 역학을 묘사해왔다. 초월적인 순간에도 현실이 겹치는 감정을 불어넣는 연기를 사라 폴슨보다 잘하는 배우는 없다.
정유미
<보건교사 안은영>
정유미의 진가가 최고로 발휘되고 있는 시기는 지금이 아닐까 싶다. <사랑니> <가족의 탄생> <옥희의 영화> 등 정유미의 매력이 빛났던 작품은 많지만, 지금처럼 그의 진가가 대중에게 제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 적은 없다. 정유미는 지난해와 올해 두편의 중요한 작품을 선보였다. <82년생 김지영>과 <보건교사 안은영>. 두편 모두 여성 작가의 소설을 여성감독이 영화/영상화한 작품이고, 공교롭게도 제목에 캐릭터의 이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지영과 안은영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정유미는 결혼과 육아라는 리얼리티의 세계와 괴물 젤리들이 판치는 명랑 판타지의 세계에 뛰어들어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뛰어다닌다.
김지영이 된 정유미를 볼 때보다 안은영이 된 정유미를 볼 때의 마음은 한결 가볍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부자연스럽게 미소 짓는 안은영의 표정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갈무리할 땐, 흐뭇하게 그 표정을 따라하게 된다. 평범함과 유니크함 사이를 줄타기하며 열심히 자신의 무기를 휘두르는 정유미의 씩씩한 활약상은 넷플릭스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관객의 마음속에 안착한다. 안은영이 한문 선생님 홍인표(남주혁)를 통해 에너지를 급속 충전했듯, <보건교사 안은영>을 본 누군가는 안은영인지 정유미인지 모를 안은영을 통해 힘을 얻고 웃을 것이다. 지난해 김지영에 이어 안은영으로 정유미는 또 한번 ‘올해의 캐릭터’를 갱신했다.
전종서
<콜>
<콜>의 전종서는 이제는 낡은 클리셰처럼 간주되던 몇 가지 설정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동안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연기란 어떤 것들이었나. 인간성의 말살을 극한까지 전시하거나, 어긋난 길을 택한 천재의 힘을 한껏 과시하거나, 선악이 모호한 배우가 의외의 악마성을 드러낼 때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든가 등등. 예전 같았다면 이름도 불리지 않는 피해자로 소비됐을 가능성이 짙은 젊은 여자가 어딘가 나사 빠진 표정으로 귀찮은 모기 잡듯 사람을 죽이는 <콜>은 한국 스릴러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이미지다. 우연히 오래된 유선 전화기로 2019년의 서연(박신혜)과 소통하게 된 1999년의 영숙은 미화할 수 있는 틈을 거부하는 괴물이다. 또래 친구로 감정을 교류했던 이라도 기대를 저버리면 다짜고짜 욕을 하고, 도덕성 이전에 이성적인 판단도 거부하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제3자에게 살인 현장을 들켰을 때 놀라기보다는 또 한명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귀찮아한다.
여기엔 배우 얼굴의 양면성을, 빌런 캐릭터의 천재성을, 살인 행위의 스타일리시함을 순진하게 소비할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스스로가 ‘조커’라고 망상하는 끔찍한 범죄자를 현실의 뉴스에서 만나야 하는 시대에, 전종서는 허구의 악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줬다. 데뷔작 <버닝> 이후 두 번째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파괴력을 보여주는 그의 광기 어린 눈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어도 무섭고, 계산되지 않은 것이라도 섬뜩하다.
아델 에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워터 릴리스>
올해 한국에선 아델 에넬의 영화가 네편이나 개봉했다. <디어 스킨>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시작으로 과거의 영화인 <워터 릴리스>와 <그 누구도 아닌>이 다시 소환됐다. 아트나인에선 아델 에넬 특별전도 열렸다. 마리옹 코티야르의 뒤를 잇는 프랑스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소개되는 아델 에넬은 13살에 영화 <악마들>로 데뷔했다. 이후 <워터 릴리스>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 로뱅 캉피요 감독의 <120 BPM>,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을 통해 프랑스 세자르영화제의 단골 배우가 된 것은 물론 칸국제영화제 화제작의 주인공으로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시선과 실루엣만으로도 강렬한 감정을 전달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초상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의 시선에 붙잡힐 듯 붙잡히지 않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로 분한 아델 에넬은 차갑게 사라지고 뜨겁게 나타나길 반복하며 관객의 마음까지 애태웠다. 10대 시절 찍은 <워터 릴리스>에선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선수가 되어 물속을 유영하는데, 당당하고 자유로운 기운은 그때도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올해 2월 세자르영화제 시상식장에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감독상 수상에 항의하며 셀린 시아마 감독과 시상식장을 떠났다. 아델 에넬의 행보는 스크린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흥미롭다.
샤를리즈 테론
<올드 가드>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샤를리즈 테론의 커리어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여전사 퓨리오사 이후 샤를리즈 테론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돌려놓는 데 일조하는 인물들을 자주 연기한다. <아토믹 블론드>의 MI6 요원이나 <롱 샷>의 미 대선에 출마하는 국무장관,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하 <밤쉘>)의 <폭스 뉴스> 간판 앵커,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올드 가드>의 불멸의 전사처럼. 때론 초현실적 힘을 빌리고 때론 현실 정치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이 인물들은 모두 샤를리즈 테론을 통해 강력하고 우아한 카리스마를 얻는다.
<올드 가드>에서 샤를리즈 테론은 수백년간 불멸의 삶을 살아온 전사 앤디를 연기한다. 비슷한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동료들의 리더인 앤디는 죽음을 비껴가는 자신의 운명과 무고한 죽음으로 뒤덮인 세상의 운명을 고민한다. 이러한 전사의 고민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을 뚫고 처절하게 질주했던 퓨리오사의 모습과는 또 다르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밤쉘>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설전을 벌였던 <폭스 뉴스>의 메인 앵커 메긴 켈리를 연기할 때도 멋지게 발휘됐다. 실존 인물과의 외적 싱크로율은 물론, 앵커라는 직업을 분석하고 연구해 비언어적 제스처에서도 우아한 카리스마가 배어나게 만든 순간들을 흐뭇하게 목격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