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지금 우리 학교는' 미진 역의 이은샘
2022-02-24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소통하는 프로

<지우학>의 미진을 두고 해외 시청자들은 ‘Miss SSIBAL’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만큼 비속어를 자주 쓰고 첫 등장부터 담배 금단증상을 호소하는 거친 학생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들을 먼저 챙기는 속정을 보여준다. 원작 웹툰의 인기 캐릭터 미진의 ‘촌스러움’과 ‘따뜻함’을 그대로 옮기고 싶었던 이은샘은 처피뱅 단발로 머리를 과감히 자르고 욕이 절반인 대사와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미진은 좀비보다 수능을 더 걱정하는 모습으로 ‘K고3’의 설움을 재치 있게 보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겠지만 수업 시간에서만큼은 열심히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선생님에게 대들지 않고 예의가 있지만 놀기 좋아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체육은 무조건 1등급을 받았을 거다. 친구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방과 후엔 집에서 혼자 게임이나 했을 테고.” 이은샘이 상상한 미진의 구체적인 여백은 적은 분량에도 시청자들이 그의 존재를 각인할 수 있는 입체감의 근거다. 장르화된 세계에서도 고등학생 생태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다감한 신경을 보여주는 이 신인은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궁녀가 됐지만 삶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외유내강’의 궁녀는 “나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모습으로 드라마의 주제를 채색한다. 두 드라마를 모두 본 시청자들마저 별감과의 사통으로 사형에 처해지는 궁녀 영희가 <지우학>의 미진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이은샘이 캐릭터를 흡수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이은샘의 진가를 알린 두편의 드라마가 연달아 성공하면서 그의 일상도 달라졌다. <지우학> 이전까지 1만여명이었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현재 100만명까지 늘어났고, “내가 어떤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어디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모습에 매사에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지우학>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드라마 완전 대박났다’라며 호들갑”을 떨며, 지금 누릴 수 있는 쾌감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우리끼리 그런다. 내가 주식엔 안 빠졌는데, 지금 핸드폰도 손에서 못 놓고 주가 보듯 인스타그램만 보고 있다고. (웃음)” 그가 자신의 들뜬 마음을 포장 없이 드러내는 이유는 최근의 변화를 개인적 욕심보단 소통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우학> 포스터가 나왔을 때 같이 작품을 한 적도 없는 류승룡에게서 인스타그램 DM을 받았던 일을 회상했다. “원래 선배님의 팬이었는데, 그렇게 DM을 받으니 내가 진짜 연예인이 된 거 같았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나중에 유명해졌을 때 팬들이 DM 답장을 받으면 이렇게 행복하겠지?” 이 일을 계기로 이은샘은 팬들에게 정성껏 답장을 보내고 “미진 캐릭터를 두고 상황극을 많이 하는” 트위터에 공식 계정도 만들었다. 과거 취미로 브이로그 영상을 만들며 편집을 독학했다는 그는 SNS로 직접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답하는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해외 팬들을 위한 영어자막 작업도 잊지 않았다.

배우로서도 연예인으로서도 능숙한 애티튜드는 이은샘의 커리어를 떠올릴 때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9살 때부터 다양한 드라마 및 예능 현장을 경험하며 무려 15년간 구력을 쌓은 ‘방송 전문가’다. 백화점에서 이벤트로 찍은 사진이 프로필이 되면서 <TV소설 그대의 풍경> 오디션에 운 좋게 합격했고, <모여라 딩동댕>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 등 다수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거칠 땐 촬영장이 놀이터 같아서 마냥 즐거웠단다. 공부도 꽤 재미있어 했기 때문에 진로를 고민한 시절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을 기점으로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연기밖에 없다”는 결단을 내렸다. 고 3 때는 <지우학>의 미진처럼 힘든 시기를 거치기도 했다. “드라마 단막극 <문집>에서 시골 부잣집 소녀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살을 15kg 정도 찌웠다. 촬영 스케줄이 많이 겹치면서 아예 연극영화과 시험을 보러 가지 못하는 불운도 있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순간이다. 그래서 <지우학> 마지막 회 대본을 보고 화가 났다. 어떻게 미진이 같은 고3들에게 좀비 특별전형을 만들어주지 않는 거지? 덕분에 완전히 이입해서 연기했다.” 어린 시절 방송 활동이 즐거운 놀이였다면, 배우의 길을 각성한 후 그에게 현장은 남다른 무게를 갖게 됐다. 특히 <지우학>은 연기의 매혹성을 알려준 작품이다. 이재규 감독은 대본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대사 하나하나 배우들과 논의했고, 함께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단순히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직업”임을 깨닫고 일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단다. 옷에 관심이 많다고 눈을 반짝이는 이 신예는 “공효진 선배님처럼 러블리하면서 코믹 연기에도 능하고, 패션쪽으로도 각광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라며 이미 잡혀 있는 의류 화보도 있다며 귀엽게 자랑했다. 현재의 호사를 충만히 누리면서 진솔하고, 무엇보다 소통과 일에 진지한 이은샘은 타고난 재능과 노력에 건강한 활력이 더해질 때 시너지가 기대되는 배우다. 신중하지만 솔직하고 단단하지만 경직되지 않는 미덕을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은샘은 진짜 프로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