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박찬욱, 봉준호가 있었다. 목록을 좀더 뒤져보면 강제규, 강우석, 이창동, 홍상수, 허진호, 임상수, 장준환 등 일일이 열거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감독들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규모의 폭발, 전문적인 프로덕션, 장르의 다변화 등 뒤돌아보면 질과 양에 모자람이 없었던 당시, 한국영화의 뿌리를 더듬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통찰이 하나 제시됐다. ‘한국영화의 과거는 한국영화가 아니라 미국영화이거나 유럽영화이거나 일본영화’라는 가설(<씨네21> 508호, ‘전영객잔: 최근 한국영화 스토리텔링의 몇 가지 특징’).
한국영화의 역사는 대체로 단절되거나 시대마다 망각을 거듭해왔다. 박찬욱, 봉준호의 자양분은 ‘한국’영화가 아니라 모든 ‘영화’에 있다. 2000년 이후 한국영화의 어떤 특질들은 대체로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장르들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한국영화에서 과거로부터 이어온 영화적 전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있더라도 매우 희미하게 감지될 뿐이다. 이전 세대의 영화적 전통이나 주제를 이어받지도 반발하지도 않은 한국영화에서 주제나 이야기보다 스타일(혹은 장르)이 앞서는, 또는 스타일만이 남는 광경은 그리 낯설지 않다.
반면 한국영화에서 역사는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반복된다. 아니 역사를 이어받지 않기에 반복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국영화는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역사적 사건, 트라우마로 남을 재난 등 모두가 공유하는 기억을 끊임없이 영화로 소환시킨다. 2022년 한국영화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탐닉한다. 재난을 소재로 한 <비상선언>이 세월호로 대표되는 재난을 둘러싼 경험들을 자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미 여러 차례 영상화된 역사 속 위인은 3부작의 완성을 앞두고 있고(<한산: 용의 출현>과 <노량: 죽음의 바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여전히 악의 축으로서 다시금 스크린을 누빈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점은 역사나 재난과 같은 집단기억을 이야기로 바꾸는 방식이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기에 당연히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대체 역사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이상한 건 이 대체 역사가 때때로 지나치게 깔끔하거나 선택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단절된 역사가 껍데기만 남긴 채 출구를 찾지 못해 도돌이표를 찍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헌트>는 또 한번 광주의 상처와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역사의 한순간을 조명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사의 명암과 해결될 수 없는 주름에 대한 고민이 없다. 말끔하게 다림질된 대체 기억이 있을 뿐이다.
<비상선언>이 재난을 활용하는 방식도 유사하다. <비상선언>은 엄혹한 현실의 돌파구로 자기희생의 숭고함을 강조한다. 하늘 위 승객들의 자기희생은 지상의 형사 구인호(송강호)의 희생으로 연결된다. 두 차례의 자기희생을 통해 비행기는 재난 상황에서도 인간애를 증명할 수 있는 고귀한 장소로 거듭난다.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과 눈물 한 방울을 위해 영화는 많은 얼룩들을 손쉽게 지워버린다. 현실은 지워지지 않을 얼룩과 해결되지 않을 상황으로 늘 구겨져 있기 마련이다. <비상선언>이 제거해버린 것은 바로 그 지점, 현실의 얼룩들이다.
이런 편의주의적인 스토리텔링 방식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진 않다. 장르로 포장된 이야기는 으레 이러한 페티시즘을 탐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득 섬뜩한 건 일말의 고민이나 자기모순, 충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드보이>부터 <혈의 누> <주먹이 운다>를 거쳐 <추격자> <괴물> 등 명백히 장르의 스타일이 도드라지는 영화들은 종종 자기 파괴적이고 어두운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스타일에 대한 탐닉과 도덕적인 자의식 사이의 충돌이 빚어낸 필연적인 얼룩들이기도 하다. 2022년 한국영화는 여전히 시간이 루프에 갇힌 듯 역사를 소환하고 반복하지만 그 전개는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을 만큼 직선적이고 그 얼굴은 너무 해사해서 도리어 민망할 정도다.
물론 여름 시장을 공략한 4편의 기획영화 <외계+인> 1부, <비상선언>, <한산: 용의 출현>, <헌트>가 올해의 한국영화를 대표하진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해 의도치 않게 개봉시기가 밀린 영화들이 <범죄도시2>가 틔워준 좁은 숨구멍을 찾아 일시에 몰려든 점도 고려해야 한다. <헌트>를 제외하면 나머지 영화들은 진즉에 개봉해야 했으니 2022년에 불시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때론 이런 불시착 자체가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동안 규모를 집중하고 과잉의 미학을 지향해온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의 명암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강제적으로 마련됐다 해도 좋겠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이들 영화는 배경으로 한 시대나 장르를 막론하고 종착지는 판타지에 가깝다. 판타지의 본질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의 시공간에서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펼치는 데 있다. 이들 영화가 면피하듯 꽂은 메시지의 깃발은 지금 한국 사회를 향한다. 적과 아군으로 나눠 배척하고(<헌트>), 이유 없는 악의와 통제되지 않는 재난을 전시하고(<비상선언>), 누란의 위기를 타개해줄 시대의 리더를 선물한다(<한산: 용의 출현>). 그리고 이 모든 갈등과 문제가 끝내 해결되어버리는 해피 엔딩의 판타지를 선사한다. 역사와 재난으로 대표되는 현실은 그저 껍데기일 뿐 영화가 지향하고 집착하는 건 진실의 그림자와 재현될 수 없는 얼룩이 아니라 표백된 행복의 판타지인 셈이다. 어쩌면 이러한 경향은 유독 한국 SF가 냉혹한 평가를 받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세탁된) 역사라는 판타지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외계+인>의 경우와 같이 굳이 낯선 세계관을 학습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2022년 한국영화는 고민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사건의 주체가 되는 캐릭터의 고뇌와 깊이를 의도적으로 생략 중이다. <범죄도시2>의 마석도(마동석)는 피와 살이 도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초인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 이야기의 해결사, 자연재해에 가깝다. 관객은 마석도에게 위기가 닥칠 거라 걱정하지 않고, 심리적인 갈등은 바라지 않는다. 대신 육체로 전시되는 쾌도난마의 해결, 그 상황을 반복해서 즐긴다.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가 장르를 패티시했다면 2022년의 한국영화는 한발 더 깊숙이 들어가 상황과 사건 해결이 던져주는 절정의 순간을 추출해 탐닉한다. 액션을 전면에 내세워 다양한 볼거리를 코스별로 제공하는 <헌트>나 재난 ‘상황’을 계속 지연시키다 손쉽게 해결해버리는 <비상선언> 모두 마찬가지다. 서사를 조각내고 상황을 반복시키는 무한의 루프. 역사와 재난과 같은 집단기억은 오직 배경이 되어 개연성의 도구로 소모될 뿐이다. 이걸 감히 덫이라 부르지 않겠다. 관객의 선택은 명확하다. 갈등이 적을수록, 해결이 빠를수록, 불편함이 덜할수록 사람이 몰린다. 마침내 당도한 해피 엔딩은 과연 현실의 고난을 망각시켜줄 만큼 달콤한가. 영화에서 엔터테인먼트만을 남기고 두께를 지워버리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탈정치화, 탈역사화된 2022년 한국영화의 서사는 점점 미몽으로 빠져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