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헌트>에 대해서도 한번 이야기해보자.
김병규 사나이픽처스의 <헌트>를 보면서 기존 한국영화의 스타 이미지, 기호, 서사에 기대는 매너리즘의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했다. <헌트>의 도쿄 액션 시퀀스의 긴장감은 그 장면만의 밀도가 아닌 여러 배우의 얼굴이 특수한 분장으로 특정한 장소에 배치됨으로써 탄생했다. 매너리즘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파편화, 코드화된 장면은 한국영화의 습관처럼 자주 반복된다.
송경원 반복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론 그게 색깔 있는 제작사의 본질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나이픽처스는 뚜렷한 특징이 있지 않나. 그만큼 자신들의 색깔을 구축해가는 곳도 그렇게 많지 않다. 비슷한 맥락에서 <범죄도시2>를 제작하는 마동석 사단도 그렇게 보인다.
송형국 한국영화가 테크니컬한 측면에서 제작 역량을 쌓아가는 것은 확실히 눈에 띈다. 총격 장면이나 흥미진진하게 액션을 설계하는 솜씨 등 뻔하게 보일 수 있는 걸 뻔하게 가지 않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데 집중한다. 장르적 완성도는 그런 기술적인 역량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크다. 촬영 현장에서 각 분야 스탭의 아이디어와 역량 등 지난 20여년간 한국영화에 쌓여온 것들이 분명히 있다. 이걸 장르영화에서 자기 복제나 매너리즘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역량이 누적된다는 건 한국영화의 중요한 자산이다.
<헌트>의 이야기, 구멍이 너무 많다
송경원 <헌트>에 관해선 이 영화가 지니는 불편하고 위험한 지점이 꽤 있는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헌트>는 분명 기술적으로 잘 만든 영화지만 위험한 태도가 있다고 봤다. 대표적으로 대체역사물이라는 변명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지우고 있다. <헌트>가 보여준 한국영화의 습관 중 하나는 꽤 많은 서사의 근거를 영화 바깥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스타 캐스팅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영화 내적으로 박평호와 김정도가 서로에게 집착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아도 이정재와 정우성이기 때문에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 많다. 두 캐릭터의 대의명분도 바깥에서 가져오는 듯한 느낌이다. 오락영화에 뭘 그렇게까지 얘기하느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 오락영화를 구축하고 있는 기본 전제가 한국사에 근간한 남북 관계다. 한국사의 맥락을 전혀 모르는 진짜 외국 관객이 봤을 때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인물끼리의 관계를 포함해 영화 내적으로 구멍이 너무 많다.
김소희 <헌트>를 보면서 <공작>이 많이 생각났는데 모두 사나이픽처스의 영화였다. 둘 다 그 안에서 뭔가 모의하는 장면을 관객한테 안 보여줬던 것 같다. 겉에서 드러나는 것만을 보여주는데 사실 <헌트>는 남한 안에 있음에도 누구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헌트>는 전두환이라는 모두가 아는 악인을 제거하기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면서 전두환이 실제로 거의 보이지 않는 특이한 영화다. <26년>부터 이어진 전두환 사살 실패의 반복 같기도 했다.
김병규 그러고 보면 <공작> 배우들이 <헌트>에 다수 나오기도 한다. 사실은 상업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긴 하다. 사건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고 잠깐 나오는 얼굴로 보여도 이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대략 윤곽이 잡히는 것이 스타 캐스팅의 이유다. 하지만 올해 보게 된 영화들은, 보다보면 그 윤곽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마동석이라는 스타. 이순신이라는 아이콘, 송강호라는 얼굴. 그들이 등장했을 때 할 수 있는 행동과 역할들의 범주가 너무나 빠르게 예측되고, 심지어는 영화의 서사조차 그 도상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런 느낌이 가장 크게 들었던 건 역시 <한산: 용의 출현>이었다. 스타를 넘어서는 어떤 존재가 출연하는 작품이지 않나.
송형국 한국 상업영화들이 제거해버린 것들이 보이는 것 같다. 올해 가장 성공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 두편이 <범죄도시2>와 <한산: 용의 출현>이다. 이 둘은 결말이 예상되는 걸 넘어 결말을 너무도 잘 아는 영화다. 한편은 ‘우리의 마동석님’이 악당 무리를 후련하게 박살낼 것을 너무 잘 알면서 극장행 티켓을 끊는 거고, 다른 한편은 ‘우리의 이순신 장군님’이 왜적 무리를 시원하게 물리쳐줄 것이라는 게 정해져 있다. 이 두 영화의 티켓을 약 2천만명이 끊었다. <탑건: 매버릭>은 물론 <어벤져스> 시리즈에도 주인공들 각자에 고뇌의 서사가 있다. 하지만 <범죄도시> 시리즈는 슈퍼히어로로 상정된 마동석의 서사가 전혀 없다. 윤계상도 손석구도 상대가 안되는 강렬한 슈퍼히어로. 이 두편을 보면 올해 우리 시대의 영웅 한명은 경찰이고 한명은 군인이다. 우리 사회의 불안을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KBS가 12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여론조사를 한 결과가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폭넓은 인권 보장이 아닌 강력한 법질서다”라는 문항에 찬성하는 사람은 51.8%, 반대하는 사람이 22.7%였다. 인권보다 법질서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데 과반의 응답자가 찬성했다는 건 한국 사회가 지금 매우 불안하다는 방증이다. 특히 여성일수록, 청년일수록 강력한 법질서에 찬성하는 비율이 높았다. 여성, 청년 등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인권의 가치보다 강력한 법질서를 원하고 있는 시대라는 뜻이다. 이 사회의 불안 속에서 인물의 서사적 고뇌가 제거된 강력한 유사 슈퍼히어로영화가 대규모 흥행한 올해의 사례는 산업적 측면에서 강한 시그널을 주기도 한다. 졸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외계+인> 1부는 새로운 사전 제작의 기획이었는데 이것까지 실패했으니 점점 더 산업, 투자적 측면에서 안정 지향으로 쏠릴 우려가 있다.
송경원 되돌아보면 2000년 초 조폭 코미디가 흥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괴물>(2006)이나 <추격자>(2008)처럼 공권력의 무능 혹은 패배를 다루며 자학하는 영화들이 대세를 이룬 시기도 있다. 요즘 영화들은 이야기의 갈등을 바라지도 않는 것 같다. 긴장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한산: 용의 출현>도 <범죄도시2>도 결론을 아는 이야기니까 중간에 갈등이 나와도 안심하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패턴처럼 보이는 것 중 하나는 영화에 이상한 낙관과 해피 엔딩에 대한 중독이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헌트>도 비틀린 해피 엔딩처럼 보인다. 이상한 낙관을 키워드로 잡는 순간 유사 판타지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다. <비상선언>의 경우 비행기가 착륙하지 않겠다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화면이 암전되는 순간 사실상 엔딩을 맞이한다. 그런데 굳이 거기서 다시 화면을 켠 후 치료제를 찾았다며 내려오라고 한 다음 이상한 흰옷을 입고 나오는 에필로그를 만든다. 이게 환상을 본다는 건지 죽었다는 건지 보고 싶은 걸 보여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안을 내버려두지 못한 채 행복한 해결로 꼭 마무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김소희 <비상선언>을 보며 동반자살하는 사람들의 영화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의 다른 가족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죽음, 혹은 자살에 대해서는 최근의 독립영화들과도 엮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은 <초록밤>도 고양이의 상징이 생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고, <헤어질 결심> 마지막 부분의 서래의 행동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비상선언>에서 모두가 지적하는, 자살이라는 잘못된 선택이 감독의 개성을 드러내는 유일한 순간이고 그래서 비평이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것이 굉장히 아이러니한 비극처럼 느껴진다. ‘왜 이런 선택을 했지?’ 하는 순간마저 없었으면 뭔가 굉장히 무난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작가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영화에서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방향이 어떤 건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송경원 <범죄도시2>나 <한산: 용의 출현>보다 <외계+인>과 <비상선언>이 훨씬 더 얘기하고 싶어지는 영화라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외계+인>과 <비상선언>에 이야기해보고 싶은 불균질한 지점이 더 많다는 사실의 대전제는 이 영화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약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면 전혀 다른 지점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정도 규모의 상업영화에서 지금 얘기하는 정도의 감독의 개성과 작가성을 발휘하는 게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작가’라는 용어가 너무 쉽게, 자주, 섞여서 쓰이는 건 아닌지 의심 중이다. 결과로서의 인지도나 유명세와 창작자의 지향점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데 언론이나 평단에서조차 이 둘을 혼용하면서 생긴 혼란이 있다.
김병규 2000년대 한국영화의 부흥기에서 아주 큰 역할을 했던 작가라는 오도된 개념이 여전히 작동한다고 본다. 작가적 판단을 허용할 수 있는 어떤 기획이나 작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특정 감독이니까, 그 작가니까라는 식의 허용으로 자율성을 주는 측면이 있지 않았나 싶다. <비상선언>과 <외계+인>이 감독과 제작자간 긴장감 있는 협업을 통해서 완성된 영화인가를 질문해본다면 너무나 회의적이다. 본래 ‘작가’라는 개념의 시작은 스튜디오영화였다. 스튜디오의 기획 아래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편집권도 없는 감독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기회를 잡기 어렵다. 그런 제한된 상황에서 연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강력한 내적 통일성으로 영화를 장악하고 개성을 보여준 사례를 정책의 차원에서 호명했다. 예컨대 하워드 호크스나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프로덕션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유명 감독들을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오도된 방식의 마케팅 용어이며 작가라는 개념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불균질한 장면이 몇개 있고 표준에서 벗어난 어떤 흐름이 있다고 해서 그게 작가성의 발현, 혹은 작품의 개성이라 평가하는 것도 지나치게 선의를 발휘해 해석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몇 장면으로 영화가 훌륭해진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김소희 흥행과 작가성을 동시에 챙긴 감독으로 스티븐 스필버그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자체를 모델로 생각하는 감독들도 많고. 흥행을 원하는 감독으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자기 이름에 대한 욕망이 너무도 당연하다.
새로운 재능을 찾습니다
송경원 약간 다른 각도에서 신진감독의 부재를 말하고 싶다. 박찬욱, 봉준호의 이름이 20년째 반복 중이고, 그들 사이에 나왔던 나홍진, 윤종빈 등은 다작을 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다음 세대는 없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박찬욱 감독이 매번 스스로 갱신하며 멋진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그 빛이 강렬한 만큼 드리워지는 그림자도 짙어 보인다. 그렇다고 새로운 감독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창작자들의 책임이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구조적인 문제만큼이나 그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언론과 평단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씨네21>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송형국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언론도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작업이니까. 평단과 대중의 괴리는 하루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언론의 속성상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소식을 먼저 전할 필요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씨네21>의 영향력이 회복되고 확장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김소희 차세대 감독의 부재라기보다는 주목받는 감독의 부재라고 보는 편이 적절한 것 같다. 과거 <씨네21>을 생각해보면 미개봉 영화일지라도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 집중적으로 소개해주며 시네필이 주목하는 작품이라 보이는 영화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관성적인 영화제 기사로 영화들이 소개되는 듯한 인상이다. 영화잡지, 기자, 평론가, 영화제가 스스로의 관성을 깨야 한다. 그들이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는가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김병규 프로듀싱의 부재와 연관지어서 얘기해볼 만한 게 있다면 독립영화로 각광을 받은 감독들의 차기작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수진은 <한공주>를 찍고 나서 110억원 규모의 <우상>을 찍었고, 윤성현은 <파수꾼>을 찍고 나서 100억원 규모의 <사냥의 시간>을 찍었다. 중간 예산급 영화가 사라지다 보니 독립영화에서 각광을 받은 감독들이 연출자로 들어갈 만한 중간급 영화의 자리들이 없어졌다. 그러면서 한번도 다뤄보지 않은 규모의 프로젝트의 연출자로 나오게 되고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한다. 그러고 나면 또 차기작의 가닥을 잡는 게 어려워지고. 왜 제2의 박찬욱, 봉준호가 안 나오는가에 관해 요즘 세대의 창의성이 그들보다 부족하다고 말할 게 아니라 그들이 구상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을 만한 규모의 이야기가 제작되지 않는 환경 또한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