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를 결산하며 조명하지 못한 영화를 생각할 때 한국 독립영화 목록부터 뒤적이게 된다. 오늘날 한국 독립영화는 자본이나 정신보다는 부채감이라는 사적 감정과 연루된다. ‘의미 있는 것은 알겠어, 그러나’로 요약될 부채감의 내면에는 관객을 끄는 매력의 총체로서 ‘영화적’이지 않다는 무의식이 자리한다. 나는 관객을 자극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올해 꼭 봐야 하는 영화, 상반기 통틀어 가장 좋은 영화, 무시무시한 걸작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거나 쓰레기, 졸작, 이 영화를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를 발판 삼아 유명해지고, 주목받는 평자가 되는 행복 회로를 돌려본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럴 수 없을까.
독립영화의 별점을 매기는 일도 비슷한 고민을 안긴다. 별점 판에서 돋보이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극찬하는 영화에 박한 점수를 주거나, 박한 영화에 후한 점수를 매긴다. 모든 영화를 찬성과 반대, 추천과 비추천으로 나누고 신선한 토마토가 아니면 썩은 토마토를 준다. 거기에다 재치 있는 한줄 평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다. 대부분 영화가 그럴 테지만, 특히 독립영화는 웬만하면 별 셋 전후로 분포된다. 추천의 마지노선이 별 셋이라면 어렵게 개봉했을 독립영화를 관객이 보러 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영된, 그러나 개인의 취향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는 양심의 표현이다. MBTI 검사지에서도 요구하듯 되도록 중립을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별 셋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알고 있지만 하기 싫고 할 수 없는 마음, 어떤 영화들에서 나와 비슷한 마음을 발견한다. 작가적인 역량을 더 뽐내고 싶고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도 싶고 엄청난 걸작을 만들어보고도 싶지만, 적정선에서 그치는 영화들. 그 이유가 프로듀서나 제작 시스템에 의한 컨트롤 타워의 작동이기보다는 마음의 작동처럼 보이는 영화들. 올해 개봉작 중에는 김정은 감독의 <경아의 딸>이 그런 영화였다. 사건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영화. 영화는 전 남친의 사적 동영상 유출로 인한 피해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어쩐지 영화가 마음을 쏟는 건 모녀의 멜로드라마다. 사건 이후 유출자가 화면 위에 비치는 것은 단 두번이다. 러닝타임 대부분은 경아(김정영)와 연수(하윤경) 모녀만을 위해 할애한다. 연수와 경아는 엄청난 파국을 수습하기 위해 각자 분투하지만, 이들의 분투가 하나의 문제에만 사로잡힌 것은 아니다. 유출 사건은 모녀가 절연한 채 비로소 서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발단일 뿐이다. 엄청난 사건의 당사자가 된 뒤에도 애써 담담하던 연수가 무너지는 건 경아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말이 뱉어진 이후 영화는 두 사람을 떼어놓은 채 엄마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진심이 딸에게 가닿기까지의 시간을 오래 견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은 노트북을 계기로 이뤄진다. 같은 노트북 액정 위로 두 사람의 얼굴이 시차를 두고 비친다. 노트북 액정 화면은 마치 얼굴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진실의 방처럼 보인다. 어느 밤 연수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유출된 영상을 확인하다가 컴퓨터를 꺼버린다. 검은 스크린 위에는 연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며칠 뒤 노트북 스크린은 액정이 깨진 상태로 경아에게 도착해 그의 얼굴을 비춘다. 경아는 액정을 되살려 노트북을 복구한다. 복구된 노트북 속에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이전의 시간으로 리셋된 듯 행복한 처음의 시간이 박제되어 있다. 액정에 비친 얼굴, 액정에 잠재된 얼굴은 소망한다. 한번 유출된 영상을 삭제하는 일이 액정을 켰다가 끄는 것처럼 간단하다면. 유출된 영상이 재생되는 컴퓨터의 액정 화면이 일시에 휴업을 결의해 액정 위에 향유자의 얼굴을 불시에 비추는 방식으로 자각의 창을 열 수 있다면. 두 얼굴은 충분히 영화적이지 않을지라도, 충분히 나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