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벌새> <윤희에게> <메기>가 연이어 개봉한 2019년은 명실상부 독립영화계의 호황기였다. 개별 작품의 개성이 뚜렷하고 완성도가 높아 입소문을 탔고, 팬층이 형성돼 N차 관람이 유행처럼 번져 <벌새>가 14만명, <윤희에게>가 11만명, <메기>가 3만명의 관객을 얻었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 초중반에도 크게 조명받은 독립영화들이 있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남매의 여름밤>의 경우 2만명대로 관객수는 어쩔 수 없이 감소했지만, 그럼에도 팬들의 두터운 지지를 얻었다. 그 뒤론 어땠나. 거론되는 작품의 수가 서서히 줄면서 팬데믹 3년차인 2022년엔 독립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도 자체가 낮아진 느낌이다. 2022년 1월부터 10월까지 개봉한 101편의 독립영화를 놓고 보자면, 소재 면에서 다양해졌고 팬데믹으로 어려워진 제작 환경에서도 끈기 있게 주제를 밀고 나간 작품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2022년의 독립영화’로 꼽을 만큼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는 부재하다. 이것은 단순히 텍스트 차원의 문제인가, 아니면 시장 상황과 관객 동향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인가.
다큐멘터리의 강세
올해 독립영화 진영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강세다. 1월부터 10월까지의 한국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결과를 살펴보면 30위권 영화 중 10개 작품이 다큐멘터리다. 특징은 <그대가 조국>을 포함해 <모어> <니얼굴> <아치의 노래, 정태춘>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등 주로 인물 개인의 삶, 그와 연계된 사건을 다룬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중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이 담긴 <학교 가는 길>이 8위, 성 소수자 부모 모임의 멤버들을 좇는 <너에게 가는 길>이 15위에 오른 것과 비교되는 결과다. 특히 2위인 <대무가>와 27만명까지 관객수를 벌리며 33만명을 견인한 <그대가 조국>의 질주는 가히 놀랍다. 정치인, 드랙 퀸, 화가, 가수로서 기본적인 인지도를 지닌 인물의 화제성이 관객몰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피사체를 개인에서 사건으로 넓힌 작품도 마찬가지다. 2016년 촛불시위와 같이 대중에게 익숙한 사건을 다루거나(<나의 촛불>) 연예인 성범죄, 미투 운동처럼 여성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한 영화(<성덕> <애프터 미투>)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성과를 얻었다.
여성 서사의 약진도 이어졌다. 이는 비단 2022년의 독립영화에서만 읽힌 흐름은 아니지만 와중에도 예년과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2021년 개봉한 <세자매> <최선의 삶> <갈매기> 등과 비교했을 때 올해 개봉작들에선 인물간의 관계가 모녀로 확장했고 중년 여성 캐릭터의 활약이 컸다. <경아의 딸> <윤시내가 사라졌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외에도 개봉작은 아니지만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정순> 모두 모녀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과거엔 창작자가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 많았는데, 현재는 가치관이 다르더라도 자신과 비슷한 인물, 즉 엄마와 같은 다른 여성에게로 시선이 옮겨간 경우가 많다.”(김동현 서독제 집행위원장) 다큐멘터리의 부상, 모녀 관계의 다층화, 개성 있는 중년 여성 캐릭터의 등장 등을 올해 독립영화의 주요 경향으로 꼽을 수는 있으나, 그 밖에 소재와 주제가 한층 다양하고 자유로워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처럼 소재와 대상을 다변화해 준수한 평가를 얻은 작품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관객수와 비례하진 않았다는 점이 문제로 거론됐다. 가령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5관왕,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대상,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오랜 기간 주목받아왔다. 하지만 개봉 후(11월24일 기준) 누적 관객수 6606명에 머무르며 화제성에 비해 아쉬운 결과를 보였다. 부산국제영화제, 서독제 등에서 수상하며 호평받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상황도 유사하다. 앞서 살펴봤듯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안전한 선택을 하는 관객이 많아진 상황에서, ‘잘 만들었다’는 평만으로 독립영화가 소구할 수 있는 타깃층의 영역이 상당히 좁아진 것이다.
집중적으로 주목받은 작품이 없기도 했지만…
이러한 결과에는 팬데믹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제한된 예산과 환경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했지만, 그럼에도 만듦새가 성긴 부분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작품 자체로 화제성을 길게 가져갈 만큼 경쟁력 있는 작품이 없었다”고 관계자 A는 말한다. 티켓 값의 상승으로 인해 작품을 택하는 기준이 올라갔고, 독립영화를 선호하는 관객도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하는 횟수가 전보다 줄어든 추세다. 더불어 최근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데 올해 개봉한 영화들의 주제가 대부분 무겁다는 점도 공통적으로 언급됐다. “<성적표의 김민영>도 있었지만 마냥 밝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모객을 위해선 분위기가 훨씬 발랄하거나 주제가 무겁더라도 영화적인 스케일을 훨씬 키워야 유리할 것이다.”(조계영 필앤플랜 대표) 수상 결과 면에서도 그렇다. “독립영화를 홍보할 때 영화제 수상 소식은 당연히 중요한 셀링 포인트다. 하지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면 해외 초청뿐만이 아니라 수상으로까지 이어졌어야 한다. 가령 <벌새>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십개의 상을 휩쓸지 않았나. 하지만 올해는 그 정도로 굵직한 결과를 낸 작품이 없었다.”(마케터 B)
조계영 필앤플랜 대표는 올해 “작품 자체로 주목받은 감독과 배우가 부재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나 <메기>처럼 근 몇년 동안 영화제에서 작품을 통해 스타로 발돋움하는 감독과 배우가 있었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작품을 추종하는 팬덤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니 자연스레 주목도가 낮아지고 입소문도 미미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팬데믹 이전과 비교했을 때 관객수 1만명의 장벽은 훨씬 높아져 있는 상태다. 매년 150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되고 창작을 이어나가려는 영화인들의 분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작품성과 완성도 면에서도, 관객의 주목도 측면에서도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