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모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수경과 이정
여느 때와 같이 마트에 같이 장을 보러 간 날, 사건이 벌어졌다. 씩씩대며 앞서 나간 수경(양말복)의 뒤를 이정(임지호)이 바삐 쫓는데 차에 타자마자 수경이 이정에게 손찌검을 시작한 것이다. 견디다 못한 이정이 차를 박차고 나가자 별안간 수경의 차가 이정을 들이받는다. 급발진 사고라 주장하는 수경과 달리 이정은 엄마의 고의를 확신한다. 그렇게 아슬아슬하던 둘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리고 만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는 제목처럼 가장 내밀한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증오하고, 종국엔 이해받길 바라는 수경과 이정의 관계는 강렬하고 처절하다. 둘의 서사를 모녀라는 프레임 안팎에서 유연하게 그려나가는 김세인 감독의 연출은 둘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올해의 미장센
<초록밤>의 윤서진 감독과 추경엽 촬영감독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누운 원형(강길우) 위로 창밖의 초록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물에 잠기듯, 인물이 빛으로 완전히 뒤덮이는 과정이 환상적으로 연출됐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CGK 촬영상, CGV아트하우스상, 시민평론가상을 수상을 <초록밤>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목도한 원형네 가족의 일상을 따라간다. “아주 밝은 환경에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다”던 윤서진 감독의 염원은 추경엽 촬영감독과의 협업 과정에서 구체화됐다. 두 감독은 프리프로덕션 기간을 길게 가지며 영화의 시각적 요소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오랜 시간 논의했다. 그 결과, 영화에서 초록빛은 싱그러운 생의 의미이자 모든 것을 잠식하는 압도적인 죽음의 이미지로 묘사됐다. 극적으로 구현된 영화의 미장센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영화다.
올해의 학창 시절
<성적표의 김민영>과 친구들
“이건 100% 흑역사 생성이다.” 민영(윤아정)과 정희(김주아), 수산나(손다현)는 수능 100일을 앞둔 고3생이다. 이들은 잠시 학생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창작욕을 잠재우기로 하고, 삼행시 클럽을 해체한다. 이후 세 사람은 다른 길을 걷는다. 민영은 대학에 진학했고 정희는 테니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며 수산나는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정희는 어떻게든 학창 시절의 관계를 유지하길 바라지만 민영과 수산나에게서 느끼는 거리감은 점점 커져가기만 한다. 같은 선에서 출발해 조금씩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의 이야기. 이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세 사람의 고민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올해의 현명한 각본
<경아의 딸>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한 작품은 많다. 하나 해당 범죄가 비단 젊은 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녀 관계 속에서 풀어낸다는 점에서 <경아의 딸>은 여타 영화와 차별점을 지닌다. 사회적 폭력의 사각지대를 예리하게 묘사하면서도 경아(김정영)와 딸 연수(하윤경)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까지 담담하게 그려낸, 성숙하고도 현명한 각본이다.
올해의 퀴어
<모어>의 모어, 모지민
‘털 모(毛에) 물고기 어(魚)’를 써서 스스로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털 난 물고기’로 소개하는 <모어>의 모지민. 발레를 전공하고 20년 넘게 드랙 아티스트로서 활동한 그는 사회적 차별로 고통받던 시기를 지나 이제 당당하게 남 앞에 자신을 내세운다. 춤과 글로, 그리고 영화로. 모어의 분투기는 모습을 바꿔가며 유려하게 전달된다.
올해의 장소
<봉명주공>과 <고양이들의 아파트> 속 아파트
아파트 재개발로 터전을 잃는 것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에 오랜 시간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봉명주공>의 나무들과 <고양이들의 아파트>의 길고양이들에게 안전한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 고민하는 이들과 가차 없이 나무와 고양이를 쳐내는 이들의 대비가 명확하게 그려진다. 그로 인해 자연과 공생하는 장소로서의 아파트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올해의 문턱
<복지식당>
사고로 후천적 장애를 얻은 재기(조민상)는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 1인분의 몫을 해내려 한다. 그런 재기의 간절함을 알아챈 병호(임호준)가 물심양면으로 돕고, 재기는 병호가 내민 기회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정재익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복지식당>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와 권리 투쟁이 벌어지는 현실 또한 그대로 옮겼다. 재기가 수시로 마주하는 물리적·사회적 장벽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을 낱낱이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