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든다. 엄태화 감독의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재난 스릴러다. 작지만 유일한 세계가 된 황궁아파트 내에서 주민대표(이병헌)와 주민들, 그리고 아파트 외부의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합심하고 갈등한다. 재난영화의 박진감과 현실 풍자적 요소를 살리기 위해 엄태화 감독은 아파트와 인물들의 이미지를 실제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가려진 시간> 이후 신작으로 돌아온 엄태화 감독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마주할 풍경에 관해 물었다.
원작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웹툰 <유쾌한 왕따> 1부는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무너진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고 2부는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남은 황궁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래도 아파트라는 공간에 흥미가 있었는데 재난 상황에 아파트 한채만 남았다는 설정에 매료됐다. 한국 사회를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세팅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를 소재로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고찰한 인문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영화 제목으로 가져온 데에서부터 각색의 방향이 보인다.
=어릴 때 오랫동안 아파트에 살았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모여 살지만 제각각 먹고사는 일에 집중한 풍경이나 아파트 안에서 보고 겪는 일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아파트의 생김새도 재미있다. 아파트에 관해 공부하다가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까지 닿게 됐다. 아파트를 소재로 한국 사회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영화의 가제로 달아두었다가 주제적으로도 맞닿아 있는 제목 같아서 저자인 박해천 선생님께 연락드렸다. 제목으로 사용하라고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각색 과정에서 원작과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원작은 중학생 남녀 아이가 황궁아파트에 들어와 겪는 이야기다. 아파트 내에 어느 정도 체계가 생긴 후에 아이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익숙한 공간이 달라진 데에서 느끼는 아이들의 공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황궁아파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전사가 궁금해지더라. 주민 시점으로 재난 직후부터 아파트가 나름의 규칙을 갖추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과정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큰 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 우뚝 남게 된 아파트다. 어떻게 구현해나갔나.
=복도형 기역자 아파트를 3층까지 세트로 지어 촬영했다. 판타지영화처럼 보이기보다 현실감을 살리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근방에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고 아파트 한채만 남은 풍경이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공들였다. 실제 지진 사진이나 자료를 참고해서 디자인했고, 황궁아파트 단지 뒤에 산이 있어서 다른 건물들이 충격에 무너졌을 때도 산 덕분에 무너지지 않았다고 설정을 더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복도식 아파트를 떠올렸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급격한 경제성장을 했을 당시 지은 옛날 아파트다. 신식 아파트는 다 무너졌지만 그 옛날 아파트 한채만 무너지지 않고 남았다고 하면 또 다른 의미의 기적이라는 상징성도 가져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지진이라는 재난, 아파트라는 배경에서 기존 재난 영화의 몇몇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이전의 재난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재난 상황 그 자체보다 재난에 처한 사람들이 더 중요한 이야기다. 인물들이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관해 고민했고 무엇보다 단순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게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 상황에 처해 극한의 공포심에서 내리는 선택이지만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처럼 그런 선택이 모이면 악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변하고 그들과 함께 아파트도 변해간다. 관객이 영화 속 상황을 실제처럼 느끼면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혹은 ‘나라도 저럴 수 있겠다’ 하며 영화에 몰입하고 참여했으면 좋겠다.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그리고 박지후 배우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나.
=이병헌 배우는 책임감이 강한 주민 대표다. 문제가 닥치면 해결책을 스스로 찾는 사람이다. 박서준, 박보영은 평범한 30대 부부로 각각 공무원, 간호사로 일한다. 영끌을 통해 아파트 한채를 마련해 살고 있다. 이병헌 배우는 그렇게 많은 작업을 했는데도 마치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열정을 보여줬다. 박서준 배우는 매 장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는 영민한 배우였고, 박보영 배우는 이전과 다른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작업에 도전적이고 용감하게 임해주었다. <가려진 시간> 때 만난 박지후 배우도 함께해서 반가웠다. 그의 역할은 영화를 보고 확인해 달라.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킹메이커>의 조형래 촬영감독과 작업했다. 주로 무엇에 관해 의논했나.
=재난 상황이라 아파트 공간에 빛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두움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자동차 배터리를 가져와 전기를 만들어 쓰거나 촛불 켜기, 빛을 퍼트리기 위해 플래시에 페트병 끼기 등 아이디어를 많이 떠올렸다. 어둠을 인위적으로 밝게 찍으면 리얼리티가 깨지고 영화가 어둡기만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어둠을 잘 묘사하기 위해 고민했다. 군중의 모습 자체가 하나의 미술 작품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서 인물 배치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인물을 담는 데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나 <이키루>를 참고했다. 아파트에서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3일> 같은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다.
어떤 재미를 기대할 수 있는 영화인가.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주연배우 외에도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다. 단역배우들도 일일이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했다. 현실감 있는 풍경을 연출하기 위해 연기 잘하는 배우, 연극계에서 오래 활동한 배우들을 공들여 모셨다. 스펙터클한 볼거리도 있지만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클 거다. 어두운 배경이지만 블랙코미디적 요소도 많다.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지는 황궁아파트를 통해 우리 사회의 풍경 역시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후반작업하면서 다시 보고 있는데 재미있다. 기대해 달라. (웃음)
엄태화 감독이 꼽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 장면
“아파트 주민들이 반상회하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이 간다. 사람들의 모습을 실제처럼 보이게 하려고 고민한 장면이다. 다큐멘터리는 실제 상황을 촬영한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런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인물의 배치, 연기, 카메라 동선, 빛 등을 더해 실제 무드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엄태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