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월30일,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의 도재승 서기관이 베이루트에서 납치되고 1년9개월 후에 풀려난다. 김성훈 감독의 <피랍>은 1년9개월간 벌어진 실화를 극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영화다. 감독에게 어떤 장르로 접근했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누군가가 납치됐고 구하러 가는 인물이 있다.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이 겪는 상황은 전부 재난이다.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행위는 액션이고 심리적으로는 서스펜스와 스릴을 겪는다. 이걸 보는 관객은 유머를 느꼈으면 좋겠다.” <끝까지 간다>와 <터널> 그리고 <킹덤>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김성훈 감독의 장기를 압축한 영화 <피랍>은 이렇게 완성되고 있다.
<피랍>은 어느 단계에 와 있나.
=지난해 2월 크랭크인해서 8월30일까지 7개월 동안 찍었다. 편집을 마무리하고 있다. 내부 공개해 모니터하는 게 목표고 이후에는 계속 수정할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한 일이라 떨리지 않고 무뎌질 줄 알았는데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웃음)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킹덤> 시즌1이 끝날 즈음 시나리오 원안을 받았고 재미있게 읽었다. 갑자기 외교관이 피랍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어서 느닷없는 사건이 연결되는 진행 방식이 흥미로웠다. 평범한 사람이 갑작스러운 재난을 맞아 고립되거나 상황을 돌파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전작 <끝까지 간다> <터널>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잘 풀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해 각본을 다시 쓰고 연출하기로 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디테일한 내용은 창작했다.
감독님의 영화는 항상 평범한 인물로부터 시작한다. 민준(하정우) 역시 외무고시에 패스하고 외교부에서 일하지만 평범한 공무원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가 평범해서 그렇다. (웃음) 높은 데 사는 분들의 삶은 나에게는 허구로 느껴져서 사실감이 없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석이 하나씩 있다. 술잔을 희한하게 잡는다거나 말을 남들보다 재미있게 한다거나.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이상한 사건에 던져놓으면 장애물과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하다. 이들이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거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단순하고 평범할 수 있다.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별짓을 다 해야 한다. 그걸 지켜보는 게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긴장되고 때로는 웃프기도 하다.
하정우와 주지훈 두 배우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나. 그리고 왜 그 둘이어야 했나.
=외교관 민준은 남다른 순발력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인물로 정의보다는 승부사적 기질을 지녔다. 택시 운전사 판수(주지훈)는 굴곡진 인생을 거쳐 상처가 많은 인물이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선도 악도 구분하지 않는다. 하정우 배우는 <터널>을 통해, 주지훈 배우는 <킹덤>을 통해서 어떤 매력을 가진 배우인지 경험했는데 그들을 알게 되고 나니 더 작업해보고 싶었다. 각각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진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둘이 함께 출연한 영화도 있었지만 이 둘을 다시 뭉쳐놓으면 어떨까 궁금했다. 그 이상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어 캐스팅했고 현장에서 그 이상을 봤다.
1986년 베이루트를 재현하기 위해 모로코에서 70회차 촬영이 진행됐다. 어떤 풍경을 담았나.
=모로코의 세 도시를 다녔다. 황량하고 복잡한 대도시에서 느끼게 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잖나. 주인공을 그런 두려움에 몰아넣기 위해 큰 도시가 필요했다. 마라케시에서는 한국에서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자연 풍경을 담았다.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이 적당히 섞여 있는 모로코 북부 탕헤르에서도 촬영했다. 한 장소에서 2~3회차씩 촬영하며 로드무비처럼 이동하면서 찍었다. 모로코 풍광의 다양한 색상, 다양한 냄새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극대화해 전달하려고 했다.
<끝까지 간다> <터널> <킹덤> 시즌1을 함께한 김태성 촬영감독과 이번에도 작업했다. 촬영 컨셉은 어떻게 잡았나.
=박력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달리는 장면 못지않게 정지할 때도 과감해보자고 얘기했다. 공간과 인물이 어우러지면서 빚어지는 미학이 있는데 그걸 역동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담으려고 했다. 촬영과 조명의 모토는 하나였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해를 기다리기. 해가 있어야만 찍는다. 우리가 상상하는 중동은 피부에 땀방울이 자작자작 맺히는 무더운 곳이잖나. 실제로는 겨울이고 우기여서 패딩을 입고 ‘아프리카인데 왜 이렇게 춥지’ 했다. (웃음) 비가 내리긴 했지만 또 하루 종일 내리는 비는 아니라서 계속 기다렸다. 구름이 사라지고 해가 뜨면 그 빛이 떨어질 때까지 충분히 담으려고 했다.
이번에는 어떤 액션을 볼 수 있나.
=자연과 함께하고 동물과 함께한다. 생각해보니 <끝까지 간다> <터널>에서부터 계속 강아지가 등장한다. 이번에도 강아지와 교감하는 장면이 있다. 카 체이싱도 마냥 달리는 게 아니라 서사와 캐릭터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담고자 했다. 멈췄다 섰다, 넓혔다 좁혔다, 장면을 다양하게 구성해 이야기가 담긴 액션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진감은 넘치지만 <피랍>의 인물들은 톰 크루즈나 제임스 본드가 아니잖나. 화려한 액션보다는 아기자기하고 재잘재잘한 액션이 꽤 있다. 광활한 배경의 스펙터클함과 여러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서스펜스를 조화롭게 구성했다.
<킹덤> 시리즈 연출 후 오랜만의 스크린 복귀다. 영화와 시리즈는 연출적인 고민부터 다르다고 했다. 시리즈 연출을 통해 무엇을 얻었나.
=시간의 차이가 가장 크다. 러닝타임이 긴 시리즈물과 시간을 압축하고 그에 따른 텐션을 갖춰야 하는 영화를 연출할 때의 고민은 차이가 있다. <킹덤>과 <킹덤: 아신전>이 없었다면 <피랍>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킹덤> 시리즈도 규모가 있었고 인물이 여정 속에서 온갖 일을 겪는다. 칼로 싸우고 활로 싸우고 말 타고 싸우고 감정적인 고뇌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 작업의 경험이 2시간 안팎의 <피랍>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모로코 분들이 나를 <터널> 감독보다 <킹덤> 감독으로 소개했을 때 많이 알아봐주셔서 수월하게 허가를 받았다. (웃음)
김성훈 감독이 꼽은 <피랍>의 이 장면
인상적인 풍광 속에서 민준과 판수가 재회하는 장면. “마라케시 헌팅을 갔을 때 산이 보이는 그곳의 풍경을 보고, 지금처럼 가시거리가 확보되는 날 재회 장면을 촬영해야지 하고 생각했다.”(김성훈 감독) 마침 촬영 전날 비가 쏟아졌고 다음날 더없이 시원한 풍광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두 배우의 매력이 흠뻑 드러나는 장면이자 뒷이야기를 다시금 끌고 가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