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중년 여성 덕희(라미란)가 거대 보이스 피싱 업체의 총책을 잡는다. 어쩐지 시원할 것만 같고, 또 그 과정은 어떠했을지 호기심도 생긴다. 실화의 한줄에서 모티브를 얻은 <시민 덕희>는 성장담 <선희와 슬기>를 발표했던 박영주 감독의 첫 상업영화다. “내가 바라는 친구상, 내가 친구들로부터 받았던 크나큰 우정의 힘을 투영하려 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덕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자들의 우정은 이 영화의 적재적소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필 굿 무비다운 유쾌한 드라마와 수사극의 장르적 상상력을 더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의 근심을 덜어가고 싶은 친구의 마음. 박영주 감독은 <시민 덕희>에 그런 진심을 담았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덕희가 보이스 피싱 총책을 잡는다는 설정의 어떤 점에 주목했나.
=보이스 피싱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피해자들이 큰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자신이 무지해서 바보같이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덕희는 보이스 피싱 총책을 잡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안에서 그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점이 캐릭터 드라마로서 강하게 끌렸다. <선희와 슬기>를 포함해 이전에 작업한 단편영화들까지, 어쩌면 내 영화들은 모두 성장에 관해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목에 왜 ‘시민’이 필요했나. 소시민성이 영화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풀이될까.
=평범한 시민이 범죄 피해자가 되고 여러 일을 겪은 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회복의 구조가 되기를 바랐다. 사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시민 개인이 해내는 동안 발생하는 ‘사이다’적인 재미도 요즘 관객이 바라는 것이라고 봤다.
일종의 여성 시민 히어로물인 셈인가.
=말하자면 그런 거다. (웃음) 젠더 구분 없이 원체 히어물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성장하면서 자기 안의 남다른 재능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것을 표출하기 시작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대리만족을 느껴왔다. <시민 덕희>의 주체적인 여성상들, 덕희를 비롯해 봉림(염혜란), 숙자(장윤주), 애림(안은진) 모두 가만히 앉아서 울기보단 액션을 하는 여자들이다.
<걸캅스> <정직한 후보> 시리즈에서 코미디로 활약한 배우 라미란이 이번엔 어떤 장기를 보여줄까.
=라미란 배우는 감독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연기를 한다. 오케이 컷이 나와도 또 다른 버전까지 보여주는 덕분에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시민 덕희>에서는 특히나 더 친근한, 늘 내 옆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매력을 보여줄 것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 혼자 영화를 짝사랑하는 느낌이 들게 했던 중요한 한 장면이 있었는데, 현장에서 라미란 배우가 연기하는 순간 영화가 이제는 나를 돌아봐주는 느낌이 들었다.
덕희 외 주요 캐릭터들의 면면을 좀더 자세히 소개해준다면.
=덕희와 함께 세탁소에서 일하는 봉림과 숙자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언제나 서로 위로하고 돕는 친구들이다. 봉림은 조선족이라 보이스 피싱 총책을 잡는 과정에서 유창한 중국어를 발휘하고 아이돌 팬인 숙자의 카메라도 수사에 유용하게 쓰인다. (웃음) 염혜란 배우는 중국어 분량이 꽤 많은데도 뉘앙스까지 풍성히 살려주었고, 로맨스 아닌 로맨스가 살짝 나오기 때문에 소녀 같은 모습도 드러난다. 행동력 강한 덕희가 소녀처럼 순수한 봉림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서서 도와주는 장면도 있다. 장윤주 배우를 닮아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숙자는 착하지만 가끔씩 성질이 불같은 캐릭터다.
그 밖의 조연들의 활약은 어떤가.
=보이스 피싱 조직 내에서 범죄를 제보하는 재민을 공명 배우가 연기했다. 왜 내부자가 덕희에게 전화를 할까, 의심스러운 대목에서도 믿음 가는 얼굴이 필요했는데 공명 배우 특유의 선한 인상이 설득력을 자연스럽게 부여했고 반대로 조직 내에선 악당처럼 나쁜 척 연기하는 모습이 관객에게 새로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형사로 등장하는 박병은 배우는 굉장히 얄미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은 캐릭터인데 박병은 배우가 아무리 화가 나게 해도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는 인물로 그렸다.
필 굿 무비의 장르적 분위기와 보이스 피싱 범죄의 리얼리티. 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 아닐까 추측된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지만 결국 극적으로 구성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부분이 가장 고민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다. 보이스 피싱 제보를 수집해 나가는 과정은 범죄 장르적 매력을, 덕희가 총책을 타도하는 구간에선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되, 범죄를 가볍게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 덕희가 결국 중국까지 나아가는 영화이기 때문에 늘 자기 세탁소만 지키고 살아온 여자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는지, 덕희의 심리와 범죄의 악질적인 면을 잘 살려 덕희가 꼭 과업을 완수하기를 관객도 함께 응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
로케이션에서 중국 분량이 꽤 되나. 2020년 촬영했으니 사실상 해외 촬영은 불가능했을 텐데.
=한국과 교차되는 중국 분량이 꽤 많다. 딱 코로나19 팬데믹이 들이닥친 상황에서 중국으로 촬영을 갈 수가 없어서 우리만의 한국 칭타오를 마련했으니 이 부분도 잘 봐주시길 바란다. (웃음)
장편 데뷔작 <선희와 슬기> 이후 첫 상업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의미가 있나.
=어릴 때부터 언제나 밝고, 기승전결 뚜렷하고, 결말이 닫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다. 독립영화 <선희와 슬기>는 창작을 시작하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내 안의 일기 같은 작품이었고 10여년 이상 간직해온 꿈을 <시민 덕희>로 처음 이룰 수 있다는 게 내겐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힘이 나서 발걸음이 좀더 가벼워진 채로 극장을 나설 수 있다면 좋겠다.
바라는 스코어가 있나.
=당연히 천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게 목표니까 바람도 천만 영화로 가져야 하는 거 아닐까. 어려울지언정 언제나 앞으로의 목표는 동일할 것 같다.
박영주 감독이 꼽은 <시민 덕희>의 이 장면
<시민 덕희>에선 택시에 탄 여자들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에 도착한 덕희 일행은 택시 운전사인 봉림의 동생 애림의 차를 타고 일망타진에 나선다. 좁은 공간을 꽉 채운 네 여자들이 좌충우돌, 티키타카를 마음껏 선보이는, <시민 덕희>의 가장 유쾌한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