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을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
2023-04-13
글 : 송경원

호황이 남긴 망령과의 사투가 시작된 한국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두 번째 착시는 시장 전반 상황에 대한 문제다.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이 유독 도드라지는 건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흥행세 덕분이라기보다는 다른 영화들의 부진 탓이 크다. 3월까지 극장 관객수는 2514만명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동 기간(5507만명) 대비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전통적인 비수기였던 걸 감안하더라도 3월까지의 성적은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한국영화 자체에 대한 불신이 학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꾸준한 시장의 침체, 대작 영화들의 잇단 실패가 맞물려 지금 극장가를 채우는 영화들은 일찌감치 완성되었던, 이른바 묵은 영화들이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영화들은 트렌드에서 멀어진 채 한국영화의 지나간 악습만 반복 중이다.

시장 상황이 좋아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나올 땐 이렇게 방만한 양산형의 기획 영화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작 영화들이 숨어버린(혹은 실패해버린) 지금, 남은 자리를 메우는 영화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재 극장가엔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관객의 눈높이를 채우기엔 지나치게 둔하고 뻔하고 오래된 영화들이 넘쳐난다. 특정 장르의 쏠림 현상, 안일한 기획과 개성 없는 소예산 양산형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영화들은 말하자면, 과거의 망령이다. 특히 티켓값 상승으로 선택이 더욱 신중해진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이처럼 해묵은 영화들이 관객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요컨대 극장가는 예전 호황기 시절 실책의 민낯을 이제야 마주하며 과거와 싸우는 중이다.

극장에 간 김에 영화를 보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특정 영화를 보러 일부러 극장까지 찾을 이유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시대다. 그렇게 마음먹고 극장에 가도 막상 볼 영화가 없는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관객의 선택을 받은 것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다. 여기엔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등 마블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영화의 부진(혹은 <아바타: 물의 길> 이후의 시기적인 공백)도 한몫했다. 이처럼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장기 흥행은 위기에 내몰린 극장 산업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현상이라 할 만하다. 심지어 2022년 여름 그리고 겨울 시장의 부진 이후 한국영화 제작이 실질적으로 크게 감소한 상태이니 한동안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변수마저 보이지 않는다.

극장 시대의 황혼, 누가 왜 극장에 가는가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건 관객 체험의 변화다. ‘나이키의 경쟁자는 닌텐도’라는 마케팅계의 오랜 격언처럼 한국영화, 한국 영화시장의 경쟁자는 해외 영화들이 아니다. 시장은 냉혹하다. 관객은 볼만한 영화에 값을 지불한다. ‘볼만하다’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한국영화 나아가 극장 산업은 그동안 내부 경쟁에만 골몰해온 게 사실이다. 그사이 관객의 체험은 플랫폼을 넘어 빠르게 확장되고 섞이는 중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장벽을 낮춰온 건 극장용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OTT를 중심으로 한 시리즈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귀멸의 칼날>뿐 아니라 <진격의 거인> <체인소 맨> <주술회전> <스파이 패밀리> 등 일본의 인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때 ‘오타쿠’라고 분류되며 폐쇄적이라 오해받았던 콘텐츠는 이제 다양한 경로로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중이다. 이건 단지 극장판, TV판 애니메이션에 국한되지 않고 O.S.T를 중심으로 한 J팝으로 확산되며 광범위한 체험을 제공한다. 일본 애니메이션(혹은 콘텐츠) 열풍을 말하고 싶다면 영화 외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1998년 일본 문화 전면 개방 당시 일본영화에 점령당할 거라고 호들갑을 떨던 미디어의 예측이 빗나간 건 대중이 이미 다양한 경로로 일본 문화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번엔 이미 일본 콘텐츠 전반에 친숙해진 젊은 소비층이 영화까지 자연스럽게 유입되어온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한때 대중문화의 최종 단계에서 위력을 발휘하며 확산의 주체가 되었다. 지금은 선후가 뒤집혔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흥행은 이미 일본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이 옅어지고 접할 기회도 많은 젊은 소비층의 최종 선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라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황폐해진 극장가에 남겨진 거의 유일한 선택지를 고르다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이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거꾸로 말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흥행이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의 열풍으로 이어질 것 같진 않다. 두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대중을 만족시키는 영화가 결국 관객의 선택을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또 한번 입증했을 따름이다. 이 당연하고 냉혹한 진실 뒤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 일찍 터트린 샴페인의 거품이 꺼져가는 한국영화산업의 민낯이 못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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