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은 때때로 이야기의 형태로 소비된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우연은 없다.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에 사람들은 인과관계로 정리한 뒤에야 안심한다. 어떤 영화가 흥행하고 나면 그토록 흥행 원인을 찾으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적지 않은 현상에서 원인은 결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필연성 따윈 없다는 말이다. 대다수 흥행 분석이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럴 땐 질문의 각을 달리하면 종종 본질과 민낯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현재 한국 극장가에 불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을 둘러싼 반응들을 보며 새삼 흥행 분석의 무용함을 생각하게 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흥행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1월4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441만 관객, 3월8일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이 390만 관객을 돌파하며 장기 흥행 중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미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흥행 순위 1위에 올랐고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2위에 무난히 오를 전망이다. 여기에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가 53만 관객을 동원하며 순항 중이라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세의 한축으로 묶기도 한다. 2023년 3월까지 극장을 찾은 관객이 총 2514만명이니 단 세편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30%가 넘는 관객을 동원한 셈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이라는 착시
가히 ‘열풍’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현상이지만 이를 단지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에 따른 선전으로 푸는 건 단순한 접근이다. 여타 언론에서 나온 반응들을 거칠게 살펴보자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지닌 매력, 애니메이션 관객층의 다변화, 경쟁할 수 있는 영화들의 부진 등이 유력한 이유로 언급된다. 요약하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시장의 전반적인 약세를 기회 삼아 평소에 도달하지 못했던 관객층까지 공략했다는 말이다. 틀린 건 아니지만 역시 당연한 걸 당연하게 언급하는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애초에 흥행 트렌드에 있어서 정확한 원인을 진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차라리 살펴봄 직한 지점은 이 현상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미디어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통해 인식의 함정들이 드러난다. 이 글은 뒤늦게 열풍의 이유를 진단하고자 함이 아니다. 여기선 ‘일본 애니메이션이 왜 흥행했는지’ 원인을 찾는 대신 질문 자체를 해체해보려 한다. 아니 순서만 바꿔도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왜 ‘일본 애니메이션’이 흥행 중이라고 생각하는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편이나 포진해 있으니 묶어보고 싶겠지만 엄밀히 말해 이건 흐름이 아니다.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는 오리지널 극장판도 아니고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았던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2021)에 비하면 관객수도 평이하다. 역설적으로 이 숫자가 현재 한국 영화시장 내 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치를 정확히 증명한다. 메가박스를 중심으로 꾸준히 배급되어온 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의 코어 관객층의 최대치라고 해도 좋겠다. 이들은 지난 몇년간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단단한 충성도로 수요를 지지해왔다.
이를 애니메이션 시장 전체로 묶는 건 곤란하다.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 시장은 적어도 세 갈래의 다른 관객층으로 구분된다. 50만~100만명 내외를 목표로 하는 아동애니메이션, 100만명 이상을 바라보는 디즈니와 같은 북미 대형 스튜디오 작품, 그리고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슬프게도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은 거의 고사했거나 아동애니메이션 시장을 다소 공유하며 생존 중이다. 이중 북미 대형 스튜디오 작품은 사실 여타 블록버스터영화와 시장 경쟁을 하는 쪽에 가깝다. 아동애니메이션 시장과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실질적으로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물론 도화선과 불씨로서의 고정 팬층의 존재는 의미가 있다.
다만 100만명 이상의 흥행에서는 코어 관객층 이외 어떤 관객층으로 넓어졌는지가 더 중요하다. 심지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경우 코어 관객으로부터 비롯된 확장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여기서 또 한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양상은 구분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즐기는 10, 20대 관객의 성향은 원작에 대한 복고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이번 극장판을 통해 처음 <슬램덩크>를 접한 관객에겐 차라리 스포츠물의 순수한 위로가 주는 힘이 더 강하다. 반면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지지층과 전작의 팬들을 기반에 둔 확장의 측면이 두드러진다. 짐작하자면 지금의 흐름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거부감과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어느 정도 일조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다. 2018~20년 1%에 그쳤던(2021년은 <귀멸의 칼날>의 흥행에 힘입어 6.2%, 2022년은 3.9%였다) 일본영화 점유율이 올해 30%까지 폭등한 걸 두고 어떤 징후라든지 흐름이라고 평가하기엔 섣부르다. 다만 (2021년처럼) 빼어난 개별 작품이 올해 찾아왔을 따름이다.
요컨대 지금의 현상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돌풍이 아니다. <기생충>이 한국영화의 승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단독 작품이 거머쥔 영광에 가깝다(실제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이기에 가능했던, 일본 내에서도 이례적인 프로젝트였다). 거기에 뒤이은 <스즈메의 문단속>의 선전이 일정한 흐름처럼 느껴지게 하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 역시 몇년째 고질적인 경쟁력 약화에 시달리는 중이다. 제작위원회 시스템의 장벽을 뚫고 오리지널티리를 발휘할 수 있는 감독은 극소수인 데다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시리즈물에 기대는 사이 보편성이 약화되어 내수용으로 입지가 좁아져가고 있다 해도 좋겠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이어지는 기사에서 김익환 에디터가 따로 자세히 다뤘다.) 나는 차라리 여기서 두 작품이 모두 장기 흥행 중이라는 현상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 모두 폭발적인 열기로 관객을 모았다기보다 꾸준한 흥행으로 여기까지 왔다. 달리 말해 극장가에 대중의 관심을 돌릴 다른 영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