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2022~2023년 일본 애니메이션 경향과 시장 분석
2023-04-13
글 : 김익환 (전 <월간 뉴타입 한국판> 수석기자)
<스즈메의 문단속>

2023년 상반기,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국의 극장가를 석권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시작하여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를 거쳐,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이어진 애니메이션 붐은 4월 현재도 쉬이 꺼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그렇다면 일본의 현지 상황은 어떨까?

지난 2022년, 일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흥행은 700억엔에 육박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해에 개봉한 100여개의 작품들 중 흥행 수익이 10억엔을 넘긴 것은 열 작품 남짓하며, 실제로는 100억엔 클럽에 들어간 <원피스 필름 레드> <극장판 주술회전 0> <스즈메의 문단속>이 대부분의 수익을 독점했다.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생태계는 실사영화와 마찬가지로 작품들이 놓인 여건에 따라 여러 계층으로 나뉜다. 그 최상위에 존재하는 그룹이 바로 <명탐정 코난>이나 <짱구는 못말려> <도라에몽> 등 국민적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이들 장수 애니메이션은 1천편이 넘는 TV시리즈가 이어지는 동안 매년 극장판 에피소드를 연례행사로 제작하고 있으며, 관객 동원 및 투자 환경도 안정적이다. 개별 작품의 흥행은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리즈 누적 흥행은 다른 작품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렇게 수십년에 걸친 연속 TV시리즈와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공생 구조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 중 하나다.

고인물과 고인물의 경쟁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그런 고인물 바로 아래에 있는 것이 <원피스> <주술회전> 등 인기 소년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인데, 위의 장수 애니메이션들과 비교하면 수명은 짧지만 그만큼 짧고 굵게 한 시대를 풍미한다. 이들 역시 본래는 TV시리즈가 중심이며, 극장용 작품은 팬덤의 특별한 축제로 취급된다. 열정과 응집력을 가진 팬덤이 마치 아이돌 콘서트에 참가하는 기분으로 영화의 n차관람을 통해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조금 아래에는 일반적인 만화나 라이트노벨 원작의 TV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있지만 팬덤의 규모 이외에는 기본적으로 소년 만화 원작 작품들과 흡사한 패턴을 보인다. 그 아래는 원작이 없는 오리지널 TV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이 자리 잡고 있다. <건담> 시리즈나 <에반게리온> 시리즈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들이 스크린으로 진출할 기회는 원작이 있는 작품들에 비해 현저하게 적으며, 투자 환경도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TV시리즈가 충분한 인기를 얻지 못한 경우 예정되었던 극장판 제작이 무산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TV시리즈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극장용 창작 애니메이션은 그보다 더 아래에 자리한다. 본래 의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란 바로 이런 작품들을 일컫지만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작품들은 투자에서도 후순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들 사이에서도 인기 소설이나 만화가 원작인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은 확연히 다른데, 뒷배경이 될 원작의 영향력이 약할수록 감독과 제작진의 작가성이 더 강해진다는 아이러니도 존재한다. 과거 <원피스>와 <디지몬>으로 경력을 쌓은 호소다 마모루와 <짱구는 못말려>로 명성을 얻은 하라 게이이치처럼 이미 TV시리즈에서 인정받은 인재들이 스스로 안정된 환경을 벗어나 창작에 뛰어드는 사례도 많다. 일찍이 <루팡 3세>나 <미래소년 코난>으로 실력을 보여준 미야자키 하야오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경우 과거 작품에서 쌓았던 실적과 인맥은 투자와 제작 및 관객 동원에 큰 힘이 된다. 그런 점에서 아무 기반도 없이 처음부터 혼자 창작을 시작한 신카이 마코토는 일본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의 인기에 기대는 작품들은 결국 원작 자체가 진입장벽이자 흥행의 한계점이 되지만, 창작 애니메이션은 그런 진입장벽이 없거나 매우 약하기에 일단 흐름을 타면 단숨에 치고 올라갈 수 있고, 그 결과 최하위가 최상위로 올라서는 생태계의 전복이 일어나기도 한다. 과거의 미야자키 하야오나 현재의 신카이 마코토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위치에 오른 감독들은 자기 자신이 흥행을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원작 대신 스스로의 역량으로 투자를 받고 관객을 모을 수 있고, 다른 수많은 감독들과 애니메이터들은 이들과 같은 성공을 목표로 삼으며 애니메이션 업계의 활력을 유지한다.

또 하나의 감독, 프로듀서의 영향력

<거울 속 외딴 성>

하지만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감독들의 이면에는 대중의 수요를 파악하고 이에 맞춰 작품의 방향성을 이끈 프로듀서의 능력이 작용한 경우가 많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있어선 스즈키 도시오가, 신카이 마코토에 있어선 가와무라 겐키가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뛰어난 감독과 우수한 프로듀서의 조합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가와무라 겐키의 프로듀싱을 받고 있는 호소다 마모루는 이전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포스트 미야자키의 자리에 가장 근접해 있는 신카이 마코토 역시 가와무라 겐키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받은 나머지 초기의 작가성을 잃고 스스로를 국민 감독이라는 틀에 맞추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스즈키 도시오는 오직 그림밖에 모르던 괴짜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를 잘 이끌며 지브리 성공 신화를 만든 프로듀서로 명성이 높았으나, 말년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잘못된 판단을 거듭하며 지브리와 미야자키의 명성에 상처를 입혔다. 그의 남다른 안목과 끈질긴 사업 수완이 없었다면 미야자키는 실력은 있어도 흥행과는 인연이 없는 감독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실책으로 인해 지브리가 일본의 디즈니가 되지 못하고 한 세대 만에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면 애니메이션에 있어 프로듀서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한층 절실히 느끼게 된다.

<주술회전> <진격의 거인> 등의 제작사인 MAPPA를 설립한 마루야마 마사오 역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현재의 안정성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 많은 기대를 걸었던 마루야마 마사오는 호소다 마모루를 발굴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썸머 워즈> <늑대아이>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열어주었고, <이 세상의 한구석에>의 가타부치 스나오 감독을 발굴해 차세대 거장 대열에 합류시켰다. 그가 없었다면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판도는 지금과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듯 창작 애니메이션의 경우 지침이 될 원작이 없는 만큼 프로듀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뛰어난 프로듀서에게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차세대 거장 후보에 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도 하다. 이런 프로듀서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일본 애니메이션은 인기 있는 원작의 명성에 기대는 데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금 팬덤 전쟁 중

<원피스 필름 레드>
일본의 영화사 중 매출 순위 1위인 도호는 최근 회사의 3대 주력 사업에 애니메이션을 추가하며 4대 주력 사업으로 개편했다. 2020년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으로 역대 일본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갱신한 도호는 올해도 <스즈메의 문단속>을 히트시키며 업계 1위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2위인 도에이에 크게 뒤처져 있다. 2022년 일본영화 최고 흥행작인 <원피스 필름 레드>에 이어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이어진 흥행 돌퐁은 탄탄한 애니메이션 IP를 보유한 도에이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특히 격렬한 싸움이 예상되는 부문이 소년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주류가 가족 대상의 장수 시리즈인 상황에서도 흥행의 최상위권은 오랫동안 지브리 작품으로 대표되는 창작 애니메이션이 쥐고 있었는데, 그 자리를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빼앗으면서 판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많은 취미 및 문화 활동이 제약되고 OTT가 널리 보급되면서 소년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의 팬덤은 이전보다 더욱 확장됐는데,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의 대기록에 이어 <극장판 주술회전 0>와 <원피스 필름 레드>가 잇따라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베스트10에 입성한 것이다.

이런 경향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TV에 이어 극장에서도 본격적인 팬덤 싸움을 시작한다. 매주 바뀌는 입장 특전, 극장판과 연동된 다양한 이벤트와 상품, 팬덤끼리의 경쟁심리를 자극하는 홍보 전략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 판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서 제작사들은 두 가지의 근본적인 대책을 실행하게 된다.

<견왕: 이누오>

하나는 집토끼, 다시 말해 원작의 팬이나 감독의 팬들을 확실하게 사로잡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현재 많은 소년 만화 원작 작품들이 원작자를 직접 각본가나 프로듀서로 참여시키고 있고, 그중에서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감독까지 맡는 초강수를 두면서 과거 팬덤을 완벽하게 결집시키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나머지 하나는 산토끼, 곧 새로운 팬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이 원작을 초월하는 작화와 연출을 통해 새로운 팬들을 대거 끌어들인 것처럼 TV애니메이션을 원작보다 업그레이드하고 극장판은 여기서 더욱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으로 팬덤을 키우는 것이다. 그만큼 제작비는 더 늘어나지만 작품의 질이 높아지고 수익이 커진다면 업계에 있어서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 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더욱 치열해진 경쟁은 일본 애니메이션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많은 투자를 받으며 역량을 키운 제작사는 그 여력을 다른 작품에도 반영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실력을 키우며 창작의 기반을 쌓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경쟁의 결과로 팬덤 위주가 아닌 양질의 작품들이 도태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아직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일본 OTT 시장의 확대는 새로운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적극 환영하고 있다. 적어도 이런 경쟁 구도가 벽에 부딪치기 전까지,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더욱 확대 일로를 걸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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