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여배우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한 방송국에 스타 에어로빅 강사로 출연하고 있다. 50번째 생일날, 그녀는 방송국 사장으로부터 50살이 되면 여자는 끝났다는 말을 듣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얼굴이 걸려 있던 도로 간판이 철거되는 광경에 한눈을 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자동차가 박살났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을 나온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는 수상한 쪽지가 들어 있고, 그것이 수(마거릿 퀄리)라는 젊은 몸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다. 증강된 신체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 엘리자베스는 대중매체가 규정하는 미의 기준에서 탈락되었다는 의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에 상응하는 물리적인 충격이라는 죽음의 상징적인 절차를 이중으로 통과해야 한다. <서브스턴스>가 보디 호러로서 성립하는 방식은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사회적인 의식의 위협과 공포가 육체의 물질적인 훼손으로 치환된다는 규칙을 통해서다.
<서브스턴스>는 주름과 노화, 외모의 기준으로부터 도태되는 여성의 공포와 자기혐오의 메커니즘을 물리적인 공포의 이미지로 탈바꿈하기 위해 보디 호러를 메시지의 전송수단으로 활용한다. 종종 이 영화와 더불어 언급되는 쥘리아 뒤쿠르노의 <티탄>이 탄생하는 것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그 충격파 속에서다. 사고에서 살아난 주인공의 몸은 티타늄과 합성된 신체가 되고, 그 후 자동차에 성적인 끌림을 느끼게 된다. 이 최초의 충돌은 살아 있음과 떼어낼 수 없는 죽음 충동이면서, 섹슈얼리티의 붕괴와 재조직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티탄>과 달리 <서브스턴스>에서 자동차 사고는 상징적인 죽음의 절차가 물리적으로 재현된다는 것 외에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전체에서 여성의 신체와 신체 변형의 이미지는 살아 움직이는 물적 대상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이야기가 전개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주인공의 신체를 훼손시킬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며, 그러한 자기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여성에게 부과된 미적 기준에 대한 과도한 강박임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닌 신체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여성의 신체는 흠결 없는 수의 몸과 중년 여성의 몸 사이에서 서로를 부정하는 끊임없는 반대항의 구조 속에서만 유효한 대상이 된다.
은막의 제약회사이자 신자유주의적 다이어트 산업의 극단적인 상상력처럼 보이는 ‘더 서브스턴스’는 약물을 주입하는 순간 ‘더 나은 버전의 나’로 만들어준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투약을 시작한 엘리자베스는 젊고, 아름답고, 도저히 퇴색되지 않을 것처럼 생기 넘치는 여성인 수의 몸이 되지만, 동시에 여전히 늙고 추한(것으로 여겨지는) 엘리자베스의 몸도 그녀 자신으로 남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수의 젊음은 엘리자베스의 신체를 착취해서 유지되는 자본주의상의 표면화된 이미지다. <서브스턴스>의 보디 호러 전략은 트랜지션의 과정을 드라마틱한 변화의 낙차로 추상화하지 않은 채 살이 찢기고 신체기관이 분화하는 고어적인 이미지로 구사한다는 것이다. 등이 찢긴 엘리자베스의 몸은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수가 삶을 연장하려 할수록 엘리자베스의 육체는 되돌릴 수 없다는 노화와 부패의 공포를 자극하면서 점점 기형적으로 변해가는 호러에 동원된다. 잘리는 신체, 피, 고어한 이미지 자체의 충격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미적으로 일그러지는 순간의 공포다. 한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다는 노화의 공포는 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할 가능성 때문에 두려움을 준다.
언제든 더 젊고 아름다운 신인의 얼굴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을 통해 작동하는 할리우드라는 산업의 생애주기는 ‘미적인 것’의 한정된 시효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배경 중 하나다. 반짝이는 과거에 사로잡힌 할리우드 여배우의 이미지는 <선셋대로>의 잊혀진 무성 영화배우 노마의 광기처럼 시대착오 속에서 두개의 몸을 붙잡고 있는 분열적인 괴물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과거의 영광에 붙잡혀 있는 남성들에 대한 재현이 노화된 장르에 대한 낭만과 향수로 등치되는 경향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맵 투 더 스타>에서 할리우드 조연 여배우 하바나(줄리앤 무어)와 같은 캐릭터는 주변을 파괴로 이끌 위험한 욕망으로 묘사된다. 하바나는 자신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 출연했던 영화의 리메이크작에서 어머니가 맡았던 배역을 따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녀의 앞에는 젊은 어머니의 환영이 나타나고, 성적으로 학대당했던 기억에 대한 고통으로 번진다. 하바나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수와 엘리자베스는 서로를 적대하고 가해하는 만큼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다. <서브스턴스>에서 엘리자베스가 쫓겨난 자리를 꿰차는 신인 수가 엘리자베스 자신이기도 한 것처럼, 교체된 젊은 세대 또한 이전 세대의 욕망이라는 역전으로 도돌이표처럼 되물림되는 구조는 ‘다음 세대’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얄팍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도태된 여성의 불안은 자기혐오의 고통과 끊임없이 중첩된다. 하바나의 최후는 그녀의 유일한 여우조연상 트로피로 얼굴을 가격당하는 것이다. 자기혐오의 욕망에 의해 파멸하는 얼굴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자신을 삼키는 우로보로스와 같은 괴물성의 구조를 형상화한다.
엘리자베스 또한 이 끝없이 펼쳐지는 연쇄의 고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서브스턴스의 이용 규칙은 일주일 간격으로 본체와 ‘다른 나’를 교체하는 것이며 예외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처음 공표된 순간부터 그것이 거역되리라는 예감을 동반한다. 결국에 망할 것이 뻔한 최악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내몰 수밖에 없는 사고의 불가능성은 구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구조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여성적 공포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보는 이를 소진시키는 이유는 여성의 젊음과 미적인 기준에 대한 사회의 강요에 순응한 주인공이 계속해서 그러한 기준을 재생산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그러면서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수렁의 구조가 한번 퇴화된 신체를 되돌릴 수 없다는 비가역성의 공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수는 일주일이라는 교체의 주기를 어기고 더이상 진정제를 얻을 수 없을 때까지 자신의 본체를 몰아붙인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려는 순간마다 서브스턴스를 광고하던 남성의 목소리가 나타나 그녀의 행동을 검열하려는 것처럼 규칙을 상기시킨다. 여성혐오의 구조를 재현하는 이 영화의 플롯이 가진 역설적인 함정은 극의 전개가 금기를 어긴다는 죄책감을 자극함으로써 작동하며, 그러한 죄책감이 가부장제를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여성의 신체가 보디 호러로 분화하는 지점은 복잡한 문제다. 여기서는 메일 게이즈를 어떻게 메타화할 것인지가 중요한 화두가 된다. 여성의 신체가 보디 호러의 이미지가 될 때, 이는 미적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장르적인 쾌락의 재료로 전도된다는 측면에서 전복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반대로, 남성적 응시를 과도하게 모방함으로써 그것이 가진 권력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렇듯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 보디 호러는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의식하게끔 하며, 이때 보디 호러 이미지는 시선의 권력이 작동하는 동시에 그것을 풀어헤치는 권력의 자기반영적 이미지 사이에서 진동함으로써 괴로우면서도 전복적인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한편 이 영화의 교차편집은 여성혐오적 발언과 그러한 혐오로부터 탄생한 괴물적인 신체의 이미지를 대응시키고 카메라의 권력적 응시와 대상화된 몸 사이, 수와 엘리자베스의 관점을 단순하게 대비시키며 동어반복적인 메시지를 실어 나른다. 점층법과 도식적인 호러는 시선과 시선을 둘러싼 독해의 역동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소간 차단한다. 물론 복수(revenge)의 카타르시스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내적인 방향으로만 증식하는 극단적인 자기혐오는 과장인 만큼 현실의 체화된 감각이기에 충분히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문법은 담론 자체의 생산성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는 의문이 드는 것은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