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주>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찾은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니 감회가 새롭다. 오랜만에 <동주>에 대한 기억을 꺼내보니 어떤가.
내겐 너무 소중한 작품이라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특별한 행사나 인터뷰가 있어서 <동주>를 얘기해야 할 때도 엄청 옛날 일 같지는 않다. 9년 전에 찍었으니 사실 오래된 작품이 맞는데도 제작 과정 전반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다시 보지는 못한다. 개봉 때 이후로 안 본 것 같다.
- 왜인가. 훌륭한 작품이고 훌륭한 연기를 했는데.원래 내가 나온 영화를 잘 안 본다. 좀더 잘할 수 있었던 장면이 계속 눈에 보여서 괴롭고 부끄럽다. 다른 영화를 볼 때처럼 재미를 느낄 수 없다. 마음 편하게 다시 보는 작품은 <파수꾼> 정도인데 그땐 어렸으니까 괜찮다는 방어의 여지가 있어서다.
- 스스로를 <파수꾼>으로 5년, <동주>로 5년의 기회를 받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파수꾼>이 배우 경력 초창기에 길을 열어준 작품이라면 <동주>는 슬럼프 시기에 만나 또 다른 전환점을 가져다줬다. 배우 입장에서 사람들이 <동주>의 박정민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나.
물론 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연기했지만 사실 관객들이 <동주>의 나를 좋아해줬던 이유는 배역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윤동주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러 갔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생소하지만 실존 인물이었던 송몽규 선생님을 알게 되는 영화다. 송몽규 선생님의 삶 자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덕을 본 거다.
- 그런데 송몽규 캐릭터는 그간 박정민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키워드였던 ‘열등감’과 대치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동주>는 윤동주의 열등감과 부끄러움이 어떻게 아름다운 문학이 될 수 있었는지 보여준 작품이다. “나를 키운 것은 열등감”이라고 자평했던 배우가 열등감의 대상을 연기해본 경험은 어땠나.
내가 실제 송몽규 선생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극 중 송몽규 역시 윤동주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둘 사이에는 서로를 증오하지 않는 아름다운 열등감이 오간 것이다. 송몽규는 가족이자 친구인 윤동주의 글을 보면서, 이건 순전히 나의 ‘뇌피셜’이지만, ‘내가 굳이 글을 쓰지 않아도 되겠는데?’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신춘문예는 송몽규가 먼저 당선됐지만 그는 문학가로서 윤동주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 테니까”라는 말도 그런 마음에서 발현된 게 아닐까. <동주>를 찍을 때 만약 내게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를 떠올려본 적이 있다. 나한텐 (조)현철이었다. (박정민과 조현철은 한일고등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다.-편집자)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엄청 친한 친구까지는 아니었는데 3학년 때 대학 입시를 같이 준비하면서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재능의 벽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철이가 연출한 단편영화 <척추측만>을 보고 ‘나는 연출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아니, ‘나는 하면 안될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웃음)
- 그 때문에 영화과에서 연기과로 전과했나.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똑같은 시기에 연출 공부를 시작한 친구는 이렇게까지 성장했는데 나는 연출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이렇게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과연 감독을 할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 오랜만에 다시 <동주>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왜 요즘엔 이런 영화가 안 나오지.’ 지금은 호흡이 빠르고 자극적인 작품이 선호되는 시대니까. 영화 애호가 박정민이 본 <동주>는 어떤 작품인가.
말씀하신 것처럼 빠르고 자극적인 영화가 많이 나오는 건 관객이 그런 영화를 찾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데 그게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대중의 취향을 과도하게 의식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영화를 시작했을 때의 철학, 암묵적으로 동의한 메시지가 왜곡되고 처음 의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풍경을 가끔 목격할 때가 있다. 거기까지는 안 갔으면 좋겠다. 장르도 스타일도 다르지만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왔던 영화들이 있다. 영화의 역할은 무엇일까를 가끔 생각한다. <동주>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에서,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어떤 감정을 따라가다 끝내 먹먹해지게 하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끔 한다. 영화는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주> 같은 영화가 지금 나오면 그때만큼의 성적이 나오진 않을 것 같다.
- 실제로 신연식 감독이 다양한 예술인을 조명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다가 진행이 안된 것으로 안다.
<동주>는 그 기획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얻은 것 같다. 만약 지금 잘나가는 OTT 플랫폼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획에 투자할 마음이 있다면, <동주>는 아주 적절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영화의 정서를 담은 다른 글을 써보기도 하던 시절이 참 행복했는데 <동주>는 관객에게 그런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작품에 참여했었다는 경험이 내 인생에서 인장처럼 계속 남아 있지 않을까.
- <동주>의 각본가 신연식 감독이 연출한 <1승>이 12월에 개봉했다.
<동주> 끝나고 바로 캐스팅됐던 작품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스포츠영화의 정서가 잘 느껴지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국가대표>라는 영화를 참 좋아한다. 재미도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뭔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언젠가 나도 이런 스포츠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1승>을 보고 어떤 관객은 배구 경기를 직접 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가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연기한 핑크스톰 구단주 정원은 배구에 대해 아예 모르고 마케팅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귀가 잘 맞아서 자꾸 사건이 진행되게 만드는 감초 같은 역할이다. 그동안 내가 맡았던 캐릭터 중 가장 ‘우원박’(우리 원딜 박정민, <침착맨>의 유튜브 방송에서 부르는 별명)에 가까운 인물이다.
- 12월24일에 개봉하는 <하얼빈>에 출연한다. 같은 사건을 소재로 한 <영웅>이 2022년에, 그것도 같은 CJ ENM 배급으로 개봉했는데 <하얼빈>이 또 나온 것은 차별화된 포인트가 있기 때문 아닌가.
아예 다른 영화다. <하얼빈>을 찍을 때 <영웅>이 개봉했다. 다들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각자 혼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웃음) 지향점 자체가 다른 영화였다. 그래서 <하얼빈>은 원래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촬영했다. <하얼빈> 시나리오를 받고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독립운동가들도 사람이었구나.’ 우리는 그들의 위대함만 알지 얼마나 긴장하고 떨고 흔들리고 아파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지 않나. 나는 거칠고 우직하고 단단하게 안중근의 옆을 지키는 독립군 우덕순 선생님을 연기했다. <하얼빈>은 육체적 고생이 심했음에도 힘들었던 기억이 없다. 날씨가 추워도, 부상을 당해도 그냥 좋았다. 우민호 감독님, 배우, 스태프 등 함께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런 그림이 나오는 현장이라면 몸이 고생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민호 감독이 <하얼빈> 촬영 당시 날씨가 잘 따라줬다는 말을 전했다.
하늘이 도와준 순간이 무척 많았다. 광주 촬영 당시 우민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 (현)빈이 형 셋이 따로 “눈 좀 많이 오게 해달라”며 고사를 지냈다. 그랬더니 다음날 보름 동안 녹지 않는 폭설이 내렸다. 원래 광주가 눈이 안 와서 제설 작업 장비가 없다더라. 그래서 첫째 날과 둘째 날은 촬영을 못해서 만화방에 갔다. (웃음) 제설 작업을 한 뒤에는 신나게 눈을 밟으면서 촬영했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나올 때쯤 되니 우리가 하도 밟아서 눈이 다 사라졌더라. 몽골에서도 말도 안되는 날씨가 계속 찾아와서 우리를 도와줬다.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아리 알렉사 65로 찍었다. 피사체의 눈동자에 비친 상대방의 얼굴까지 자세히 보인다. 그런 카메라로 진짜 자연을 찍었다.
준비 안된 본능은 없다
- 최근 몇년 사이 배우 박정민은 유튜브 플랫폼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대중성을 얻은 것 같다고 체감된다. 그중에는 ‘박정민 짜증 연기’를 모은 유튜브 영상들도 일조했다고 본다. 아까 확인해보니 조회수가 300만회를 넘었더라. (웃음)
그 영상 때문에 내가 ‘짜증 연기’라는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웃음) 내가 이유 없이 너무 짜증을 내나 돌아보게 됐다. 그런데 내가 분노하거나 다른 감정 연기를 할 때도 싸잡아서 ‘짜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건 누가 봐도 짜증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인데!
- 에이, 뭉뚱그려서 ‘짜증’이라고 표현하지만 다들 박정민이 연기를 잘한다는 전제로 하는 말이다. 영상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니 “현실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라거나 “박정민은 생활 연기를 정말 잘한다”는 호평이 많더라. 실제로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하나.
그렇다. 중요하게 여긴다.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은 아니고 반드시 그런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물론 사극이나 오컬트, 호러는 장르적인 연기를 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실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연기를 하고 싶다. 그래야 관객도 좀더 현실에 발붙이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만약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라면 어떨까. 비현실적이고 양식적인 연기를 주문하는데.
그분과 함께 작업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웃음) 당연히 작품마다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맞춰야지. 가까운 작품으로는 <전,란>에서 내가 생활 연기를 하지는 않았다.
- <그것만이 내 세상> 속 피아노 연주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트랜스젠더 유이도 완전히 다른 방식의 연기였고.
의식적으로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지만 분장, 의상, 말투, 움직임, 걸음걸이 등 외형적으로 두껍게 입혀야 하는 역할을 비교적 많이 연기했다. 그리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연기가 사랑을 좀더 많이 받았다. 스스로도 그런 연기를 재미있어한다.
- 요즘 박찬욱 감독의 ‘최애’ 배우라는 얘기가 돌던데.
도대체 그 소문을 업계에 누가 냈는지 모르겠다. 전혀 아니다. (웃음)
- <전,란>을 보면 제작자 박찬욱이 박정민에게서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촬영 중인 <휴민트>의 류승완 감독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무 좋아했고 좋아하는 감독님들과 같이 일한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다. 두분 모두 기존의 박정민에게서 사람들이 잘 보지 못했던 부분을 봐주시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말 감사하다.
- 박정민 하면 왠지 작품과 캐릭터에 접근할 때 굉장히 치밀하고 학구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것 같은 인상이 있고 실제 인터뷰를 읽어봐도 그런 듯하다. 동시에 배우들은 본능이나 직관, 동물적으로 나오는 연기를 한다고도 하고 그런 액팅을 더 높이 쳐주는 듯한 분위기가 존재한다. 박정민의 연기에서 분석과 직관은 어떻게 공존하고 결과물로 나오게 되나.
두 가지를 떼어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준비 없이 본능에 맡긴다? 그건 그 캐릭터가 아닌 본인의 모습 아닌가. 준비 없이 대사만 외워가서 본능적으로만 연기하는 배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있다면 그냥 배우가 개인의 매력을 뽐내는 거지. 보통 배우들은 대본을 연구하고 대사 하나하나, 심지어 상대방의 대사까지 생각하며 어떻게 연기하고 리액션해야 할지 준비한다. 그다음에 카메라 앞에서 순간적인 본능이 나온다고들 하는 거다. 카메라 앞에서 머리 굴러가는 게 보이면 좋은 연기가 아니니까. 내가 데뷔 초에 카메라 앞에서 머리 쓰는 게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했었다. 하여튼 배우는 모두 학구적으로 캐릭터를 준비하고 현장에 간다. 어떤 배우는 이를 감추고 현장에서 느껴지는 대로 연기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하는 거고, 어떤 배우는 자기가 얼마나 캐릭터를 위해 많이 준비했는지 ‘썰’을 푸는 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배우들은 모두 비슷하다. 본능만 믿고 현장에 가는 배우는 별로 없다. 있다면 나태한 것이다.
- 그렇게 얻어걸린 연기가 세간의 칭찬을 받는다면 안 좋게 작용하겠지.
특히 나이가 어리거나 연기 경험이 적을수록 예상하지 못한 것이 나왔을 때 칭찬받으면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경계해야 한다. 그건 준비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지 아무것도 없이 카메라 앞에서 본능적으로 나온 게 아니다. 나도 늘 경계한다. 일주일 내내 촬영이 있으면 너무 피곤해서 이미 대사를 다 외웠으니 괜찮다며 대본도 안 보고 현장에 갈 때가 있다. 집에 돌아와서 꼭 후회한다. 대본을 다시 보면 내가 놓쳤던 게 보인다. 내가 못한 것을 다음 촬영에서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면 쓸데없는 잡념이 생기고 얹지 않아도 되는 이 상한 첨가물이 늘어난다.
- 촬영 때마다 시나리오를 본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는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영화 촬영 전날 집에서 1~2시간씩 시간을 내서 대본을 계속 읽으며 혹시 놓친 게 있나 확인한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에게 배운 거다. (황)정민이 형 영화를 보면 카메라 앞에서 마음대로 동물적인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은 늘 대본을 달고 산다. 하루에 한번씩 시나리오를 다시 읽는다. 십몇년 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요즘 <휴민트>를 같이하는 (조)인성이 형도 그렇다. ‘이미 머릿속에 다 있는데 왜 저렇게 대본을 보지?’라고 생각했지만 다 이유가 있더라. 내가 놓치고 있던 게 보인다. 아직 안 찍은 거면 다행이고, 이미 그 장면을 찍었다면 큰일난 거다. 그런 식으로 배우는 자기 나름대로 본인의 연기를 연출한다.
- 황정민 얘기가 나왔으니 샘컴퍼니 계약 당시의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당시 황정민 배우가 박정민 배우를 데려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 것 같나.
정민이 형이 <파수꾼>을 보고 “저 배우 데려와라”라고 얘기했다는 일화를 아직도 안 믿고 있다. 거짓말일 것 같은데! (웃음) <파수꾼> 홍보마케팅을 했던 당시 과장님이 샘컴퍼니 본부장님을 술자리 같은 데서 소개시켜줬다. 어떤 매니지먼트사가 좋은 곳인지, 나한테 연락이 온 이 회사는 좋은 것 같고 이 회사는 아닌 것 같다든지 등등 다양한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다다음날 연락이 왔다. “우리 회사 한번 와볼래?” 내 생각에는 이 형이 그사이에 <파수꾼>을 본 것 같다. 황정민 형님이 <파수꾼>을 봤다면 이때 함께 보셨을 거다. 샘컴퍼니 사무실에 갔는데 황정민 형님이 계셨다. ‘이분은 날 모르시겠지?’라고 생각하며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 뒤 바로 방에 들어갔다. (웃음) 그러다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샘컴퍼니 대표님 말에 마음이 많이 움직였다. “네가 하기 싫은 건 안 시킬게. 그리고 네 부모님 다음으로 너를 지켜줄 수 있는 회사가 될게.” 그렇게 10년 넘게 이 회사에 있게 됐다.
‘박정민’만의 유머로
- 당분간 작품 활동을 쉬고 출판사 무제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밝혔다.
출판사 일 때문에 배우 활동을 쉬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문득 내가 써먹을 수 있는 게 많이 없는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작품에만 몰두하다 보면 어느 날 동어반복을 하는 순간이 오고 그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내가 이걸 어디서 했던 거 같은데 어디였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집, 현장, 집, 현장, 집, 현장을 오가는 루틴을 반복하다 보니 이야깃거리도 이제 안 나온다. 그래서 잠깐 작품 활동을 멈추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여행을 다니든 사람들을 만나든 여러 가지 감정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1년 정도 쉬는 김에 내가 차린 출판사 일도 진행하고 있다. 내년 봄쯤 김금희 작가의 책이 나온다. 출판사 무제 유튜브에서 그냥 내가 재미있게 본 책 소개도 하고, 작가님들을 만나 얘기도 나눠보려고 한다. 만약에 이 유튜브 채널이 잘되면 출판계 사람들에게 책을 소개할 수 있는 창구가 하나 더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유명세로 출판사 일을 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나름 이 업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면 출판업자들도 나를 너무 경계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해본다. (웃음)
- 유튜브 채널 <MoTV>의 ‘무비랜드 라디오’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 출판사의 목표”였다고 했다. 실제로 동물권 에세이 <살리는 길> <자매일기>를 냈고, 김금희 작가의 책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이 먼저 나온다.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의식하고 행동하는 데 관심이 있나.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사회가 더 좋아질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오디오북을 만든다고 장애인 복지정책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각장애인들이 “어? 영화배우라는 애가 차린 출판사에서 우리한테 먼저 소개하는 책을 만들었대! 재밌겠다”라고 반응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몇 시간이나마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내어드리는, 딱 그 정도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위로와 안도감, 그 역할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한다.
- 비장애인을 위해 만든 책을 오디오북으로 변환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해 기획한 책인가.
오히려 비장애인들은 나중에 종이책으로 볼 수 있다. 김금희 작가님이 대사가 많은 대본 느낌의 소설책을 썼고 배우들이 감사하게도 재능 기부를 해줘서 라디오 드라마처럼 만들게 됐다. 효과음도 O.S.T도 음악감독도 있다. 완성되면 장애인 도서관에 기증해서 장애인들이 무료로 들을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이들을 위한 북토크 같은 행사도 진행하려고 한다. 성우가 낭독한 오디오북과는 완전히 다르다.
- 내가 읽고 좋은 책과 출판사 대표로서 출간하고 싶은 책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어떤 책에 끌리는 것 같나.
결국엔 두 가지가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출판사 무제의 모양을 빚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아직 정체성이 모호하다. 이 책 저 책 다 해도 상관없는 출판사다. 원래의 나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책을 좋아한다. 추리소설, 한국 순수문학, 현대문학, 고전도 재미있는 건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님과 일을 해야 하는데 그분들은 유명 출판사로 가신다. (웃음) 출판사 무제의 대표 콘텐츠를 만들고 어엿하게 회사를 키워야 좋은 작가님들을 모실 수 있다. 이를테면 지금 준비 중인 ‘듣는 소설’ 프로젝트처럼 말이다. 다른 한축으로는 예술 서적이나 인문서가 나올 수도 있다. 출판사 무제에서 나왔던 <살리는 일> <자매일기> 같은 책은 내가 평소에 즐겨 읽던 종류는 아니지만 작가의 마음이 좋고, 글이 좋아서 좋아하게 된 책들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흥미를 갖는 책을 만들어서 소개하는 게 목표다.
- 지난해 말 김은숙 작가를 인터뷰하다가 “글을 잘 쓰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20년 넘게 이 질문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냥 ‘타고났다’라고 인정한다”더라. (웃음) 작가 박정민의 글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 같은 질문을 던져보겠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이 무엇인가.
나는 글쓰기에 타고나지는 못했다. 내가 쓰는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에 한정해 답하자면, 지금 글을 이렇게 쓸 수 있는 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을 좋아하는 분들은 글에 녹아 있는 유머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원래 유머가 녹아 있는 글을 좋아했다. 20대 초반에는 유머가 있는 글을 좋아하면서도 그런 글이 멋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괜히 글을 멋있게 써보려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도 떨어졌다. 입학 후에도 글쓰기 수업에서 글을 못 쓴다고 꾸중을 많이 들었다. 내가 봐도 진짜 못 쓴 글이었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쯤, 그냥 내가 진짜 좋아하는 글을 따라서 써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내 글을 조금씩 읽어주기 시작했다. 처음 독자는 싸이월드 일촌들이었다. (웃음) 그전에는 댓글도 안 달고 본 척도 안 하던 사람들이 반응하더라. 아, 사람들은 내가 이런 글을 쓸 때 좋아하는구나. 사실 나도 이런 글을 좋아했었는데. 그냥 내가 좋아하는 글을 따라 쓰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 원래부터 유머가 있는 글을 좋아했다면, 어떤 작가의 책을 즐겨 읽었나.
아주 어렸을 때는 장진 감독님의 글을 무척 좋아했다. 20대 넘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박민규 작가, 김영하 작가의 책을 좋아했다. 최근 들어 진짜 재밌게 읽는 것은 장류진 작가의 글이다.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김금희 작가의 책도 대사가 너무 재밌다. 책을 읽으며 웃는 것을 좋아한다. 유머의 힘은 정말 강하다고 생각한다.
- 유머야말로 타고나야 하는 거 아닌가.타고난 부분도 있어야 하겠지만 연습도 가능하다. 웃긴 글을 아주아주 많이 읽으면 된다. (웃음) 하다못해 옛날에 유행했던 ‘웃긴대학’에 올라왔던 글들. 그게 ‘음슴체’로 끝나서 그렇지 되게 좋은 글이다. 구조도 깔끔하고 반전도 있고 잘 쓰여졌다. 나는 한강 작가님처럼 글을 쓸 수 없다. 이미 한강 작가님이 계신데 내가 한강 작가님처럼 되려는 글을 써야 할 이유도 없다. (웃음)
- 유머의 힘이 강하다는 신념은 연기할 때도 반영되나.내가 정말 좋아하는 송강호 선배님, 이병헌 선배님, 그리고 (황)정민이 형의 연기를 보면 편하게 ‘흐흐’ 하고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런 선배님들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할 때는 유머를 언제나 장착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진심’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너무 진지하게만 접근하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며 관객이 숨 돌릴 시간을 주는 것이다.
- 현재 박정민이 가진 독특한 위치와도 연결되는 얘기 아닐까. 박정민은 아주 클래식하게 예술을 팔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 동시에 지금 가장 감 좋은 크리에이터인 침착맨과 협업한다.
집에서 대본을 읽으며 공부하는 시간도 있지만 24시간 동안 그것만 하지는 않는다. (웃음) 2시간 공부하고 3시간 놀고, 1시간 공부하고 4시간 논다. <침착맨> <빵송국> <빠더너스> <피식대학> 등 여러 유튜브 콘텐츠를 본다. 구독자가 많지 않은 유튜버 채널도 찾아본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 영화에 임하는 자세는 원래 내 직업이니까 유지하지만 원래 인간 박정민은 이런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연예인이라는 특권 때문에 내가 즐겨보던 침착맨도 문상훈도 만나고 슬쩍 방송도 출연하게 됐다. 직접 만나보니 그들도 무언가를 만드는 창작자였다. 그들에게 배우는 게 있더라. 침착맨 같은 크리에이터들이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굉장히 ‘진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과 구성이 없는 곳에서 나오는 날것이 정말 리얼하다.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시청자의 시간을 사는 이들 아닌가. 그래서 연기할 때도 이 사람들의 모습을 카피할 때가 있다. 내 안에서 배우 박정민과 재미있는 거 좋아하는 인간 박정민이 공존하면서 배우는 게 많다.
- 최근에는 어떤 유튜브 콘텐츠를 재미있게 봤나.<디바마을 퀸가비>가 최고다. 그분은 어떻게 그러지? 퀸가비가 아닐 때, 그러니까 그냥 가비님일 때 방송도 재미있었는데 <디바마을 퀸가비>는 클래스가 다른 느낌이다. <디바마을 퀸가비>는 새 에피소드가 올라오면 바로 챙겨 보고 다시 돌려본다. 요즘엔 <라면꼰대 프렌즈>도 재밌게 봤다.
- 연출자 혹은 배우로서 언젠가 ‘퀸가비’와 함께 일하고 싶지는 않나.
가비와는 연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질 것 같다. (웃음)
- 직접 연출한 영화에 침착맨을 출연시킨다거나.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침착맨을 필두로 한 12명의 ‘배도라지’ 크루를 데리고 뮤직비디오나 단편영화를 스마트폰으로 만들고 싶다는, 내 나름의 숙원 사업이 있다. 내가 내 일로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그분들에게도 콘텐츠가 될 수 있으니까.
- 단편영화 <반장선거> 이후 감독 박정민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아직 계획은 없지만 먼 훗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작게 해보고 싶다. 큰 작품은 제작비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중도 포기할 것 같다.
- 마지막으로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볼까. 필모그래피 복기를 해보니 2세대 대표 걸그룹 소녀시대(<기적>의 윤아), 3세대 대표 걸그룹 블랙핑크(<뉴토피아>의 지수)와 모두 연기했더라. 만약 4세대 걸그룹과 연기한다면 누구와 호흡을 맞춰보고 싶나.
참고로 1세대 대표 걸그룹 핑클과도 연기했다. 성유리 누나와 <신들의 만찬>에 나왔었다. (웃음) 내가 아이브의 안유진씨 팬이다. 그분이 나오는 영상들이 재미있어서 자주 찾아본다. 가끔 콩트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은 연기도 잘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된다면 안유진씨와 함께 삼촌과 조카 관계를 연기해보고 싶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