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상상력, 뻔뻔하다
<페스티발 익스프레스> Festival Express l 로버트 스미튼 l 영국 l 90분 l 2003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페스티발 익스프레스>는 1970년 여름에 있었던 캐나다 횡단 록콘서트의 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1970년은 60년대의 자유분방한 록 정신이 마지막으로 불길 속에서 산화하고 있었던 때. 지금은 전설로 남은 재니스 조플린, 그레이트풀 데드 등의 록 뮤지션들은 기차 속에서 잼세션을 벌이고, 비싼 티켓 가격에 항의하는 팬들을 위해 즉석 무료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기록들에 들떠 있다가 극장 밖을 나서면 좀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자유와 평화와 사랑을 외쳤던 세대의 록 정신은 어느 순간 맨바닥에 엎어져버렸고, 화면 속에서 에너지를 분출하는 재니스 조플린은 젊은 나이에 약물로 요절했다. 33년 동안 창고에 박혀 있었던 이 다큐멘터리가 ‘월드판타스틱시네마’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금은 주식투자로 한몫 벌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 나라의 중년들도, 한때는 마약과 섹스와 록음악으로 자유를 갈구했던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 ‘판타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녹차의 맛> The Taste of Tea l 이시이 가쓰히토 l 일본 l 143분 l 2003년 l 부천 초이스(장편)
아마도 올해 출품된 영화들 중에서 독특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화가 <녹차의 맛>일 게다. 어느 가족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이야기의 재미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하루노 가족은 도쿄 외곽의 조용하고 그림 같은 산골 마을에 산다. 그런데 이 가족에겐 늘 이상한 일이 생긴다. 거대한 또 하나의 자신과 맞닥뜨리는 여섯살 소녀 사치코, 첫사랑의 감정에 들떠 있는 사춘기 소년인 오빠 하지메, 오래전에 그만둔 애니메이터 일을 다시 시작하고자 그림을 그리는 엄마, 프로페셔널 최면술사이며 종종 가족을 상대로 최면을 거는 아버지 등. 평범한 듯 비범한 어느 가족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녹차의 맛>은 일상과 판타지의 자연스런 결합을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시이 가쓰히토 감독은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라는 영화를 만든 적 있다. CF적 감각의 전작에 비해 <녹차의 맛>은 한층 원숙해진 감독의 작품세계를 엿보게 한다. 아사노 다다노부, 데라지마 스스무, 다케다 신지 등이 출연하고 있다.
<제브라맨> Zebraman l 미이케 다카시 l 일본 l 115분 l 2004년 l 패밀리 섹션
일본 B급영화의 대명사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2004년작. 변함없이 황당하고 엽기적인 상상력을 선보이고 있다. 신이치는 전형적인 무능한 가장이다. 그는 늘 약속시간에 늦고, 아내는 바람을 피우며, 딸은 매춘업에 발을 들여놓고,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 어느 날 이 모든 것에 지쳐버린 신이치는 어렸을 때부터 유일한 위안이었던 TV시리즈 제브라맨 의상을 만들어 입고 훌쩍 길을 나선다. 그런데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제브라맨의 팬인 전학생 아사노의 집을 찾아가던 길에 연쇄살인범을 만난 그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 격투를 벌이고, 자신에게 숨겨진 초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제브라맨>은 황당한 사건의 연속이다. 무기력한 가장이 자신에게 숨겨진 능력을 깨닫게 되며 TV시리즈가 현실의 예언을 담고 있는 등 B급 상상력의 진수를 보이고 있다. 특촬영화의 재미있는 장면을 새롭게 인용하고 있는 것도 <제브라맨>을 보는 즐거움 중 하나다. 여러 작품에서 미이케 다카시와 호흡을 맞췄으며 ‘V 시네마의 제왕’으로 불리는 배우 아이카와 쇼의 100번째 출연작이기도 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Josee, the Tiger and the Fish l 이누도 잇신 l 일본 l 116분 l 2003년 l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독창적인 러브스토리는 그리 흔치 않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느 사랑에 관한 영화다. 장애인의 사랑에 관한 영화는 흔히 그렇듯, 많은 역경과 아픔을 필수요건으로 하고 있다. 대학생 츠네오는 어느 날 길에서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손녀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노파를 만난다. 방 안에 갇혀 주워온 책들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인 손녀딸의 이름은 소설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조제. 할머니와 둘이 사는 그녀와 친구가 된 츠네오는 동정심과 애착 사이에서 점점 그녀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한동안 장애와 세상의 모든 고정관념, 제약을 뛰어넘어 아름답게 꽃피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에 관한 기억을 새삼 각인하고 있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느 장애인 여성의 극단적 두려움, 그리고 세상에 관한 낯설음을 영화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영화 제목 역시 그런 요소를 비유하는 것. 이누도 잇신 감독은 <금빛 초원을 지나>라는 영화를 만든 적 있는 피아영화제 출신 감독.
<캅페스티벌> Cop Festival l 구로사와 기요시 외 l 일본 l 약 100분 l 2003년 l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주인공은 반드시 형사일 것, 러닝타임은 칼같이 10분을 지킬 것, 적어도 일분에 한번은 개그를 첨가할 것. 개그콘서트에나 해당될 듯한 어처구니없는 룰 같지만, 이것은 <캅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감독들이 만들고 있는 디지털 단편 옴니버스영화들이 지켜야 할 신성한 법칙이다. 이것만 지킨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이 옴니버스 최대의 매력. 화가 나면 아토피가 악화되어 헐크처럼 변신하는 깜찍한 여형사(<아토피 형사>), 곰인형을 훔쳤다고 기관총을 퍼부어대는 열혈 여형사(<실록 키티 형사>), 형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준 선배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 안타까운 신참형사(<형사의 길>), 심지어 손바닥만한 크기인 주제에 증인을 취조하고 범인까지 검거하는 코끼리 인형 형사(<아기 코끼리 형사>)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형사들을 만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썰렁한 개그(<유령형사>)를 포함하여, 일종의 즉흥연주처럼 자유롭게 완성해나간 잼무비들을 보면서 이 영화들의 뻔뻔한(!) 상상력을 즐겨보자. 참고로 이번에 소개되는 영화들은 대부분 2003년에 제작된 작품들. 올해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소개된 8편의 영화에 그 이후 제작된 2편의 신작이 추가되어 10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니나> Nina l 헤이토르 달리아 l 브라질 l 85분 l 2004년 l 부천 초이스(장편)
인간의 존엄성 상실, 그것은 상황의 강제인가 개인의 선택인가.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일러스트레이터 니나는 밀린 집세로 인해 집주인 노파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나 니나가 배고픔에 못 이겨 무심하게 고양이 사료를 씹어먹고, 자신이 사랑하는 집주인의 고양이를 내다버리고, 마음을 준 장님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면서 상황의 불합리함은 개인의 선택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21세기 버전. 원작과 마찬가지로 살인을 저지른 뒤 히스테릭한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중간중간 삽입된 그로테스크한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후반부에서 실사로 재현한 촬영과 연출력이 인상적인 브라질영화로, 감독인 헤이토르 달리아의 장편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