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롱택샘의 일생> The Magical Life of Long Tack Sam l 앤 마리 플레밍 l 90분 l 2003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캐나다 여성감독이 마술사이자 기예가인 중국인 증조부, 롱택샘의 과거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 타고난 재능으로 전세계를 돌며 공연했던 증조부의 화려했지만 잊혀진 삶이 감독에 의해 재탄생한다. 그 자체로 영화적인 롱택샘의 일생은 실사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재구성된다. 감독은 롱택샘의 일생을 진실 그대로 복원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발랄한 상상력을 동원하며 마술사 롱택샘의 극적인 삶을 독특한 방식으로 서사화하는 데 성공한다. 핏줄을 찾아가는 눈물겨운 감상 대신 담담하면서도 유쾌한 시선을 택한 그녀는 자신의 뿌리를 긍정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 방식은 매우 신선하다.
<가감보이> Gagamboy l 에릭 찰스 마티 l 필리핀 l 109분 l 2003년 l 부천 초이스(장편)
<스파이더 맨>과 <반칙왕>을 저예산영화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발랄함으로 합성했다고 할까. 마닐라의 허름한 주택가를 배경으로 스파이더 맨과 바퀴벌레 맨과 뱀파이어가 소박한 격투를 벌인다. 아이스크림 판매원인 청년 주니는 선한 마음에 돈없는 아이들에게 공짜로 아이스크림을 나눠줬다가 해고된다. 독성 물질에 오염된 거미를 삼키게 된 그는 스파이더 맨처럼 초능력을 갖게 되고 그때부터 궁색한 가면을 쓰고 선행을 베풀려고 한다. 그의 소망은 주인집 처녀 리아나의 맘을 사로잡는 것인데 그의 경쟁자 역시 독성 물질에 오염된 바퀴벌레를 샌드위치와 함께 먹은 뒤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니게 된다. 보잘것없는 특수효과와 액션이 영화의 상상력을 제대로 돕지 못하지만 킬킬거리며 즐겁게 볼 수 있는 필리핀영화.
<공> Gong l 배태수 l 한국 l 81분 l 2003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어떻게 언제 죽을지까지 완벽하게 예측되고 통제되는 첨단 과학의 어떤 미래. 모든 것이 지시되는 그곳에서, 죽을 날짜를 받아놓은 히데 같은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그냥 죽을 것인가 아니면 공(Gong)으로 갈 것인가 정도일 뿐.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 떨어진 채 개체로서 무한히 궤도를 도는 영생의 특수 공간 ‘공’은 그러나 히데에게 죽음만큼이나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단지 암에 걸려 ‘공’으로 간 아버지를 만나보려는 희미한 희망으로, 히데는 ‘공’을 선택하고 시간과 공간이 왜곡된 긴 여정을 토모코라는 소녀와 동행하게 된다. 삶과 인간조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흑백의 강렬한 텍스처가 눈길을 끄는 탐미적이고 냉혹한 SF.
<나의 자살을 도와줘> My Suicide l 소사폴 시리위와트 l 타이 l 107분 l 2003년 l 부천 초이스(장편)
온갖 방법으로 자살을 기도하지만 번번이 실패만 하는 남자 키앙에게 돈 버는 일에 목숨 건 편의점 여직원 온이 제안한다. 결혼을 하고, 보험을 든 뒤에, 죽여주겠노라고. 아내의 탈을 쓴 ‘자살 도우미’와 한지붕 아래 살게 된 키앙은 그의 소원대로 죽어버리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나의 자살을 도와줘>는 죽으려는 남자와 죽이려는 여자의 동거라는 설정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낸다. 이즈음 타이 대중영화의 한 트렌드로 보이는 ‘장르 혼재’는 이 작품에서도 두드러져, 코미디와 드라마의 뼈대 위에 호러와 판타지는 물론 연극적 요소까지 버무러져 지루할 틈이 없다. 너무 어설퍼서 황당하다 싶은 대목도 있지만 키득대며 볼 수 있는 오락영화.
<노래하는 탐정> The Singing Detective l 키이스 고든 l 영국 l 109분 l 2003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사상 최고의 TV 프로그램’이라는 극찬까지 받았던 1986년의 동명 〈BBC> 시리즈를, 원작자 데니스 포터가 직접 쓴 시나리오로 영화화했다. 소설가 댄 다크는 붉은 딱지가 몸을 뒤덮어 거동까지 부자유스러워지는 고약한 피부병으로 입원한다. 수개월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병상에 매인 다크는 고통과 수치심을 공격적인 말과 판타지로 위로한다. 작가의 자기연민은 유례없이 떠들썩하고 화려한 양식미를 추구하는데, 환상 속의 그는 자신이 쓴 범죄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사립탐정과 밤무대 가수 일을 겸업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 얽힌 고통스런 유년의 기억까지 포개지는 그의 몽상은 시도때도 없는 립싱크 뮤지컬로 귀결되기 일쑤다. 영화는 다크의 악성 피부질환이 의사(제작자 멜 깁슨이 충격적 분장으로 연기했다)의 진단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여성혐오증을 포함한 해묵은 정신적 노폐물 탓이었음을 드러낸다. 애초 데니스 포터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마약문제로 곤욕을 치른 주연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경험을 상기시키는 영화. 케이티 홈스, 에이드리언 브로디, 로빈 라이트 펜, 제레미 노섬 등 캐스팅이 쟁쟁하다.
<이노센스> Ghost in the Shell2: Innocence l 오시이 마모루 l 일본 l 99분 l 2004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가 만든 속편. ‘인간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전편과 마찬가지로 던지고 있다. 2032년,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가 거의 사라진 상황.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가는 인간들은 사이보그와 로봇들 사이에 남아 공존하고 있다. 사이보그 형사 바토에게 인간으로서의 흔적은 오직 두뇌의 일부와 한 여자에 대한 기억뿐이다. 바토는 형사로 인간 파트너와 함께 일하면서, 통제를 벗어난 로봇들에 대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로봇들이 갑자기 이상을 일으키고, 폭력적으로 변해 인간들을 살해한 것이다. <이노센스>는 전편 <공각기동대>와 마찬가지로 철학적인 물음과 존재론적 성찰이 스며 있는 작품이다. 필름누아르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여럿 있다. 대사들은 난해한 감이 있으며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가 여럿 인용되는 점도 흥미롭다. 비주얼 면에서 새롭고 경이적인 비주얼을 창조하는 오시이 마모루의 특징 역시 여전하다. 가와이 겐지가 신비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타말라 2010-우주의 펑크캣> Tamala2010-A Punk Cat in Space l 티.오.엘 l 일본 l 92분 l 2002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타말라 2010-우주의 펑크캣>은 장편애니메이션치곤 실험적인 작업이다. 흑백에서 컬러, 3D까지 자유자재로 이동하면서 이 애니는 펑크 고양이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2010년 고양이들이 사는 우주, 고양이 지구는 거대한 회사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있다. 펑크 고양이 타말라는 그 무심함으로 우주의 유령들조차도 두렵게 만들고, 전자오락과 춤추기, 달콤하게 잠드는 것이 취미인 암고양이다. 인간 엄마에게 불만을 품고,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타말라는 우울한 현실로부터 도망쳐 우주선을 타고 자신이 태어난 별 오리온을 찾아 나선다. <타말라 2010…>은 애니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접근하면 곤란하다. 어떤 이야기의 일관성이나 논리적 측면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듯 진행되는 이 애니는 오로지 쾌락을 추구하는 주인공 캐릭터를 통해 일본 청춘들의 현재를 비유하고 있다. <베티 블루>의 베아트리스 달이 기계의 신 ‘타틀라’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티.오.엘이라는 비주얼 창작집단의 연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