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곤두서는 즐거움
<개미들의 왕> King of the Ants l 스튜어트 고든 l 미국 l 102분 l 2003년 l 개막작
당신이 호러영화의 마니아라면 <좀비오>, <지옥인간>(From Beyond) 등 80년대 호러영화 걸작들을 만들어낸 스튜어트 고든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초창기 브라이언 유즈나(<리빙데드3>)와 함께 만들었던 이 두편의 H. P. 러브크래프트 원작 각색영화들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스플래터영화에 뒤틀린 유머감각을 발휘한 걸작들이었다. 이 작품 이후로 90년대 내내, 고든은 잡다한 할리우드영화들에 매진하면서 명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음을 알린 작품은, 다시 한번 브라이언 유즈나·러브크래프트의 팀워크로 만들어낸 2001년작 <데이곤>. 그리고 부천영화제 개막작인 <개미들의 왕>은 우리가 여전히 스튜어트 고든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주인공인 숀은 남의 집에 페인트칠이나 하면서 연명하는 인생. 뭔가 더 큰 걸 이루어보겠다고 나선 일은 살인청부업이고 막상 살인을 저지른 이후로는 아무런 대가도 얻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는 살인을 청부한 집단에 도전하다가 결국 납치되어 사막 한가운데의 외딴집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매일매일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조금씩 일그러져간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폭력에서 탈출한 그는 새로운 행복을 꿈꾸지만 그 저열한 행복마저 사라지자 복수를 계획한다.
스튜어트 고든이야 원래 들쭉날쭉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감독이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개미들의 왕>은 그의 이전작들과는 좀 이질적인 영화다. B급 스플래터영화와 SF코미디를 맴돌던 고든은 이 작품에서 대단히 건조하고 사실적인 ‘폭력’을 다룬다.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통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호러영화로 오해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사체 훼손이 나온다고 모두 ‘스플래터호러영화’라고 부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폭력적인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며 이전작들에 드리워져 있던 블랙유머는 완벽할 정도로 거세되어 있다. 초기작의 재기나 잘 만들어진 호러영화를 기대하는 고든의 팬들은 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그 자체로 훌륭한 폭력의 해부도이며 스튜어트 고든의 다음 행보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터닝 포인트다. 사실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미리 준비를 하고 보러 가기를 바란다. 게다가 복수극이라고 모두 복수의 쾌감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날것 그대로의 폭력에 카타르시스란 없는 법이다.
<연장통 살인> Toolbox Murders l 토브 후퍼 l 미국 l 96분 l 2003년 l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텍사스에서 온 전기톱 살인마가 LA의 한 아파트에 몰래 기거하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연장통 살인>은 전설적인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감독 토브 후퍼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만들어낸 명쾌한 스플래터/슬래셔영화다. 영화의 무대는 LA의 낡은 아파트. 금방 이사온 여주인공 넬은 눅눅한 세월이 묻어나는 아파트의 낡은 시설과 시끄러운 이웃들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한편 살인마는 연장통에 들어 있는 갖가지 도구들로 연쇄살인을 벌인 뒤 시체들을 감추어나간다. 이웃들이 사라지는 것에 의심을 품은 넬은 경찰에 신고도 해보지만 모든 증거들은 사라진 상태. 이제 그녀는 스스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기이한 방식으로 설계된 일종의 미로라는 것을 알아낸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전설적인 히트 이후 토브 후퍼의 커리어는 계속해서 하락해왔다. 후퍼가 90년대에 감독한 <맹글러> <크로커다일> 등은 호러영화 마니아들에게도 회의적인 반응을 얻었고 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오히려 TV였다. 하지만 <연장통 살인>은 그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들을 싹 걷어내버릴 수 있을 듯하다. 영화는 튼튼한 기본공식 위에서 만들어진 장르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를 잘 갖추고 있다. <연장통 살인>이 더욱 돋보이는 점이라면 부차적인 요소들에 실려 있는 무게감이다. 무대가 되는 아파트는 그야말로 걸작이다. 기이한 미로와 살인마를 몸속에 기생시키고 있는 이 낡은 건물은 완벽한 제3의 주인공이다. 영화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이 건물은 퍼스낼러티를 지니고 있어”라고 읊조린다. 여배우 안젤라 베스티(<메이>)가 연기한 넬도 비명만 질러대는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사건을 파헤쳐가는 능동적 인물이다. <스크림> 이후 더이상 발전이 불가능해 보였던 슬래셔 장르지만 기본에 충실한 장인의 손에서는 얼마든지 흥미로운 창조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연장통 살인>의 미덕일 것이다.
<그 동네 사람들> The Locals l 그레그 페이지 l 뉴질랜드 l 88분 l 2003년 l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시골 사람들에 대한 도시인들의 공포는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Straw Dogs)으로부터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어왔다. <그 동네 사람들> 역시 같은 주제의 또 다른 변주곡이다. 이 작품은 서핑 여행을 떠난 두 친구가 교외의 어느 장소에서 겪는 악몽 같은 하룻밤을 묘사한다. 복선들의 효과적인 배치와 단단하게 구성된 내러티브 덕분에 몇번에 걸친 영화 속 반전들은 ‘깜짝쇼’ 이상의 유쾌한 놀라움을 준다. 지나친 폭력묘사가 절제되어 있는 점도 저예산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미덕. 마지막 장면에서는 관객의 감성을 스산하게 건드리기도 한다. 피터 잭슨의 <배드 테이스트>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뉴질랜드 감독의 데뷔작이다.
<분신사바> Bunshinsaba l 안병기 l 한국 l 120분 l 2004년 l 폐막작
안병기(<가위> <폰>) 감독의 <분신사바>는 여전히 베일 뒤에 가려져 있다. <분신사바>는 저주의 주문에 몸서리치는 한 마을의 공포를 그려내는 영화. 안병기의 전작들은 슬래셔와 오컬트 장르를 한국이라는 지형도 속에서 풀어냈고 ‘호러영화 감독’이라는 명패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3가지 질문. 첫째, 안병기는 이전 영화들보다 더 짜임새 있는 극적 장치들을 배치했을까. 둘째, 저주내린 한 마을의 소름끼치는 집단적 무의식을 어느 정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을까. 셋째, 장르에 대한 이해없이 저열하게 만들어진 올해의 몇몇 호러영화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잊게 해줄 것인가. 7월22일 오후 7시. 올해 부천 폐막작으로 첫 프리미어를 가지는 <분신사바>로 이 모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치사량> Lethal Dose LD50 l 사이먼 드 셀바 l 영국 l 99분 l 2003년 l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동물생체실험에 반대하는 과격행동단체 LD50. 연구시설에 침입해 동물들을 풀어주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사고로 게리가 붙잡히자 멤버들은 그를 버려두고 도주한다. 1년 뒤, 생체실험에 이용되고 있다는 게리의 다급한 구조메시지가 도착하고 멤버들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다시금 연구시설로 잠입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사의한 현상과 사고들. 그리고 한명씩, 영문도 알 수 없는 처참한 죽음을 맞기 시작한다. 실체조차 알 수 없는 거대시설과 여기 갇힌 이들의 갈등이 광기로 폭발하는 대목에서 대번에 <큐브>가 연상되는 <치사량>은 동물보호라는 대의로 뭉친 이들의 치기와 이기심, 비열함 등을 파고들어가며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서도 그 시니컬함을 시종 유지한다.
<언데드> Undead l 피터 스피어리그, 마이클 스피어리그 l 호주 l 100분 l 2002년 l 부천 초이스(장편)
90년대 이후 변용을 멈춘 것 같던 좀비물이 드디어 진화하는가? 따분한 시골 마을에 운석들이 떨어지고 그 운석에 맞으면 좀비가 된다는 착상에다 외계인 침공이라는 소재를 엮어놓은 이 호주산 좀비영화는 ‘깜짝쇼’와 ‘고어’ 이상의 양념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전 작품들과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유쾌하게 사지절단을 펼치는 호주 좀비영화의 전통에다 홍콩영화의 정적 액션, 삼원색 필터와 강한 개성의 캐릭터들을 교차시킨 드라마를 보태면서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주는 가운데 무리한 트릭없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땐, 아연 종교적 색채까지 드러낸다. <레지던트 이블>과 〈28일 후…>가 가진 오락적 미덕들을 두루 끌어들인 ‘잘 만들어진 좀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