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류열풍 진단 [2] - 지금 한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2)
2004-07-13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뉴 미디어 통해 범아시아적인 드라마 소비

사태의 전모는 1990년대 초 일본과 비교해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1990년대 일본 대중문화는 동아시아에서 갑작스런 붐을 일으켰다. 트렌디드라마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고 일본 가수의 공연은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이와부치 고이치가 쓴 <아시아를 잇는 대중문화>(또 하나의 문화 펴냄)는 당시 일본 대중문화의 성공 요인을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과 관련해 연구한 중요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만에서 일본 드라마가 성공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일본 트렌디드라마의 대표작인 <도쿄 러브스토리>는 대만에서 1992년 <스타TV>로 방영한 뒤 지상파를 포함, 총 6회 이상 방영됐다. 이후 일본 트렌디드라마는 대만 방송사에서 가장 선호하는 외국 프로그램이 됐다.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자국 드라마가 아시아에서 이처럼 인기를 끌 것으로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여기서 일본 드라마의 인기가 가능했던 첫 번째 조건은 방송 환경의 변화다. 케이블TV, 위성TV 등 다양한 채널이 생기면서 자국 프로그램이나 미국 프로그램만으로 충당할 수 없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대만 역시 한국처럼 일본 프로그램에 대해 수입금지를 해왔지만 음성적인 소비가 늘자 1993년 일본어 프로그램 방송을 허용하게 됐다. 대만에서 일본 드라마의 인기는 지금도 꾸준한 상황이다. 대만의 예를 들었지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홍콩의 범아시아 위성방송 <스타TV> 탄생으로 상징되는 뉴미디어는 국경을 초월하는 특성을 발휘했고 아시아 각국에서 TV를 중심으로 미디어 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엔 정치적, 경제적 변화도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를 경제블록화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초국적 기업들은 아시아 각국의 실정에 뿌리내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예를 들어 <스타TV>를 인수한 사람은 루퍼트 머독이지만 <스타TV>의 프로그램은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의 미디어 선진국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달라진 아시아 미디어 시장에서 일본 대중문화는 가장 경쟁력 있는 소프트웨어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한류가 주목받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나라는 이번에도 대만이었다. 일본 드라마로 길들여진 대만에서 한국 드라마는 일본보다 값싸면서 일본만큼 세련된 것이었다. 1998년 무렵부터 한국 드라마를 수입해 재미를 본 대만 방송사 관계자들은 한동안 ‘묻지마 구매’라고 부를 만큼 한국 드라마를 많이 수입했다. KBS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이상우 팀장은 “대만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처음 나온 반응은 일본 PD가 만드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일본 드라마가 먹혔듯이 한국 드라마가 먹힌 건데 가격이 올라가고 수입한 드라마가 너무 많아지니까 지금은 인기가 시들해지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순서상 일본은 대만의 바통을 이어받은 모양새가 됐다. 일본에선 1996년 동포를 대상으로 한국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KNTV가 개국했고 위성TV를 통해 한국 드라마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겨울연가>도 NHK가 방영하기 전에 위성채널인 BS를 통해 일정한 인기가 확인되면서 공중파를 탔다. 대만에선 <가을동화>, 중국에선 <사랑이 뭐길래>가 히트한 것처럼 아시아 각국에서 방송사가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한 이런 일은 계속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거꾸로 올해부터 케이블과 위성TV에서 일본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한 국내에서 일본 드라마의 시청률은 평균 1%를 넘지 않았지만 10대와 20대 시청자들 가운데 골수 팬이 형성되고 있다. 일본의 <겨울연가> 같은 현상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인기를 끌었던 예가 있으며 <황제의 딸> <꽃보다 남자> 등도 케이블TV에서 상당한 팬을 확보했다. 당연히 한국산 프로그램이 절대 우위에 있거나 한국 스타의 카리스마가 특출해서 한류가 생겼다는 식의 착각은 버려야 한다. 음반시장에서의 한류도 상당 부분 뉴미디어의 힘에 의존한 걸로 보인다. 24시간 뮤직비디오를 트는 채널이 아니라면 한국 댄스 가수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지금 같은 환호를 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과거,중국의 미래?

물론 환경적 요인이 모든 걸 해명하진 않는다. 일본에선 왜 하필 <겨울연가>가 인기를 끌었는가? 중국, 홍콩, 대만 등에서 <엽기적인 그녀>는 왜 인기를 끌었는가? 이런 질문들은 또 다른 차원의 분석을 요구한다. <겨울연가>의 인기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쇼와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중년 여성이 <겨울연가>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인 걸 보면 타당한 지적으로 보인다. 10대와 20대가 중심인 일본 트렌디드라마에서 소외된 계층이 <겨울연가>에서 그들 시대의 사랑을 확인한 것이다. 지금의 한국을 일본의 낭만적인 과거로 채색하는 노스탤지어가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바람을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엽기적인 그녀>의 경우는 남녀관계를 뒤집어 최근 젊은이들의 추세를 따라잡았다는 점이 인기요인으로 손꼽힌다. 중국에서 <엽기적인 그녀>가 얻은 특별한 호응도 젊은 층의 트렌드와 잘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일본인들이 <겨울연가>에서 그들의 과거를 보는 동안, 중국인들은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들의 현재 또는 미래를 본다. 대중문화가 현실의 권력관계 또는 근대화 정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물론 반대의 사례도 있다. <사랑이 뭐길래>는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워 인기를 끌었다. 경제와 문화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움직이게 마련이다). 일본-한국-중국의 이상한 서열화는 문화권력을 둘러싼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될 만하다. 상대적 약자인 중국이 시장 개방에 미온적인 것도 이런 상황과 관련있다. 다른 하나는 윤석호, 곽재용, 두 감독의 세계가 순정 혹은 신파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아시아에서 한국은 눈물의 왕국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다. 국적이 아니라 창작자의 취향이 원인이라는 게 명백하지 않은가. 아무튼 한류는 아시아 각 나라에 없거나 부족한 것을 메워주는 기능을 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일본 트렌드드라마를 베끼는 데 열을 올렸던 시절, 국내에 젊은 층에 어필하는 드라마가 없었다는 걸 기억한다면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교류는 불가피하다.

한류와 한국영화는 다른 문제

매체의 특성상 한류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다. <쉬리>로 촉발된 일본의 한국영화 붐은 지난해까지 소강 상태였고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서도 폭발적인 흥행은 드물었다. 많은 영화계 관계자들이 중국을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시장으로 보고 있지만 불법 DVD의 천국인 이곳에서 한국영화로 돈을 버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히는 <엽기적인 그녀>는 해적판 DVD로 인해 즉각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올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가 나온 배경에 <엽기적인 그녀>의 비공식적 인기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여친소>는 국내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으며 흥행에서도 만족스런 결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여친소> 제작자인 정훈탁씨는 국내 흥행수익만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었으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수익을 내고 있다고 전한다. 그는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단견으로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나 역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자는 장기적 계획을 갖고 만든 영화”라고 말한다. 시네마서비스는 중국시장을 목표로 한국영화 리메이크 작업을 준비 중이다. <킬러들의 수다> 등 한국영화를 중국 영화사와 협력해 중국 배우를 써서, 중국어로 고쳐서 개봉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시네마서비스 김정상 대표는 “몇년 전 빌 콩을 만났을 때 중국시장은 엄두도 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더니 <여친소>를 만들어서 중국에 개봉시켰다. 한류를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게 필요한 시기다”라고 말한다. 반대 의견도 있다. <올드보이>를 전세계 60여개국에 판매한 쇼이스트 김동주 대표는 “무조건 자국 시장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된다. 한류는 없다. 우선 영화를 잘 만들고 해외에서 돈을 버는 건 보너스라고 생각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격동하는 아시아 문화의 일부로 바라보아야

분명한 것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촉발시킨 한류와 한국영화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이다. 한류가 한국영화에 상대적으로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만 한류스타가 나온다고 무조건 한국영화를 보러가는 건 아니며 한류의 중심에 한국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류를 활용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영화도 아시아의 대중문화 가운데 하나로 소비되고 유통된다는 사실이다. 격동하는 아시아의 문화 지형은 <겨울연가> 대신 <꽃보다 남자>를 택할 수도 있고, 홍콩영화의 영광을 한국이 아니라 타이에 넘겨줄 수도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절대적인 질적 우위가 보장된 경우가 아닌 한, 아시아 대중문화는 상호침투하며 언제든 대중을 놀라게 할 것이다. 지금 한류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 속에서 아시아 대중문화가 격동하는 현실을 바로 보라는 주문이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한국’이라는 국적 때문에 환영받는 시기는 이미 끝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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