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류열풍 진단 [6] - 중국 내 한류는 지금
2004-07-13
글 : 박은영
중국 내 한류는 지금

‘다방면으로 확산 중인 한류, 이제는 영화로

어느 ‘한류’(韓流)족의 하루- 한국산 휴대폰으로 친구의 전화를 받고 한국영화의 포스터로 도배된 버스 정류장의 광고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한다. 창 너머로 보이는 각종 건물 위로는 요즘 잘 나가는 한국 모델들이 제각기 자신의 이미지를 선전하며 눈길을 당긴다. 친구와 만나 한국 음식점에서 ‘조선랭면’ 한 그릇씩 해치우고, 한국 물건이 많다는 쇼핑몰로 발길을 돌린다. 한국 상표 혹은 한국 상표를 가장한 옷이며, 신발이며, 장신구들이 눈을 현혹한다. 장내에 한국 가요가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잡지에서 본 최신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나왔는지 확인하러 음반점에 들어선다. 한국과 동시 출시된 한국영화 DVD 몇장을 구입하고, 친구가 열광하는 ‘한류’스타가 출연하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것인가, 이곳에서 캠코더판 DVD로 구입할 것인가로 망설이다가 그 한국 배우가 영화관으로 온다는 친구의 말에 귀가 솔깃해 영화관으로 향한다. 중국어로 더빙된 대사를 발음하는 ‘한류’스타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하고 친구와 헤어져 한국 승용차 택시를 타고 귀가한다. 온 가족이 모여앉아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한류, 중국인의 의식 속에 안착현재 중국, 적어도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의 일상에서 한국 문화를 접한다는 것은 이제 너무 익숙한 일이 되었다. 어느 음반점에 들어가나 한국영화 DVD/VCD 코너가 버젓이 자리잡고 있고, 가판대에 즐비한 영화 잡지와 DVD 잡지에서는 최신 한국영화와 DVD를 소개하는 고정란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안방 극장인 TV에서도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끊임없이 방영되고 있다. 이곳 중국에서 ‘한류’라는 단어가 유행한 지 어느덧 5, 6년이 지난 지금 호들갑스럽게 ‘한류’를 외치는 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며 중국에 씨를 뿌린 이 ‘한류’ 현상이 이제는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조용히 뿌리내리고 안정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하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베이징에서 한류족을 자처하는 젊은이들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은 한국의 영화지와 연예지를 구독하고, 현재 한국의 영화계와 연예계 소식을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더 꿰뚫고 있다. 이들의 회고담(?)을 듣노라면 중국에서 ‘한류’ 현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은 한국의 대중가요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98년 초, 홍콩이나 대만의 대중가요 인기가 수그러질 때쯤 안재욱 등 한국 대중가수의 가요가 점차 유행했고, H.O.T로 대표되는 한국의 젊은 가수들이 몰고 온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 중국의 젊은이들은 곧 이들을 받아들이고 열광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중국 젊은이들의 유행에 ‘한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고, 이 ‘한류’ 현상은 2002년 한·중 수교 1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문화 행사를 정점으로 하기까지 계속해서 열기를 유지했다. 우호적인 한·중 관계에 힘입었는지 국영 중앙방송국(CCTV)에서는 이례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한다. 초창기의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등에서부터 최근의 <보고 또 보고>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홈드라마는 중국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중장년 계층에도 어필한다. 당시 이러한 홈드라마 외에도 지방 방송사나 유선방송에서는 이른바 청춘우상극(靑春偶像劇)으로 불리는 드라마들이 꾸준하게 방영된다. <질투> <마지막 승부> <모델> <이브의 모든 것> 등 중국 젊은이들은 이들 드라마를 통해 장동건, 김희선, 최진실, 심은하 등 한국의 청춘스타 등을 알게 되었고, 자연히 그들의 관심사는 가수에서 배우로 옮겨갔다. 미화된 청춘스타와 드라마 속에 묘사된 한국사회를 통한 한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불법복제 DVD/VCD는 한국영화 접촉하는 대규모 창구

△ 중국의 거리, 극장, 비디오숍에서 한국영화를 만나는 건 일상적인 일이 되고 있다.

한국영화가 중국 땅에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2000년 베이징영화학교에서 한국 유학생을 주축으로 열린 한국 영화제를 통해서였다. 한 나라의 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대규모의 영화제를 금한다는 당시 중국 정부의 방침하에 영화제의 명칭을 ‘한국영화 연구토론회’로 바꾸는 등 우여곡절 끝에 열린 이 행사에서 대형스크린에 상영되는 한국영화를 처음 접한 중국 젊은이들은 또다시 열광하기 시작한다. 관람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젊은 관객의 열렬한 반응 외에도 이 행사에 참여한 영화 관계자들 또한 ‘언제 한국영화의 수준이 이 정도까지…’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아직 국제무대에서 큰 두각을 보이지 않은 한국영화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 행사에 참여한 장이모가 한국영화를 극찬하고 이 사실이 각 언론매체에 대서특필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성공적인 영화제의 여세를 몰아 한국문화원에서는 당시 보급되기 시작했던 DVD 매체를 이용하여 소규모의 한국영화 상영회를 일주일에 한번씩 개최한다. 중국 관객의 반응이 좋아 이 상영회는 거듭 연장 상영에 들어간다. 2001년 중국영화자료관에서도 9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영화 회고전’을 거행한다. 이후 중국의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언제나 환영 인사가 되었다.

한국영화 인기 유지의 일등공신은 아마도 불법복제 DVD/VCD일 것이다. 대중가요에서 드라마로, 드라마에서 영화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가던 ‘한류’족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던 불법복제물들은 수없이 쏟아지는 한국영화를 만나게 하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제 한국의 VCR 보급률에 맞먹는 중국 가정의 DVD 플레이어 보급은 중국 전역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불법복제 DVD와 맞물려 중국 관객에게 양질의 영화보기 문화를 선사한다. 한국영화 DVD의 경우 한국에서 생산되는 DVD를 그대로 복제하여 판매하고 한국과 거의 동시에 출시되기 때문에 중국 관객은 대부분의 최신 한국영화를 선명한 화질과 음질의 DVD로 접하고 있다. 매달 출시되는 수많은 신인감독들의 젊은 영화에서부터 임권택,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등 작가주의 표방의 영화까지 중국 관객은 다양한 한국영화들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묘사로 개봉이 어려운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와 같은 최신 한국 블록버스터영화들까지 극장 캠코더판 DVD로 제작되어 중국 관객과 만나고 있다. 중국의 불법복제물의 성장 속도는 실로 대단하다. 현재 한국에서 출시되는 정품 DVD의 포장에서 내용물까지 이제는 정품과 분간이 어려울 정도이다.

요즘 베이징 거리를 걷다보면 장혁에게 수갑을 채우고 환하게 웃고 있는 전지현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할리우드 대작들에 밀려 이전 개봉한 <비천무> <무사>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클래식> 등과 같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또한 비록 조기 종영을 면치 못했지만 저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미소짓고 있는 ‘한류’스타의 모습을 중국인들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대중가요에서부터 영화까지 점점 가까워지는 한국 문화를 수용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는 제각각이지만, 이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중국 민족이 같은 동양권인 한국에서 생산하는 문화 상품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은 한결같다. 자존심 강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눈에 한국영화가 막 소개되기 시작한 초창기 무렵에는 한국영화가 ‘너무 가볍다’거나 ‘할리우드나 홍콩영화의 한계를 못 벗어난다’는 등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몇년 사이 국제영화제 수상 등으로 큰 두각을 보이고 불법복제물을 통해 다양한 한국영화가 꾸준히 소개된 이후 ‘할리우드영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한국영화에는 어떤 독특한 민족성 같은 것이 보인다’, ‘중국영화는 한국영화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등의 반응도 나오고 있다. 지아장커, 장밍, 첸카이거, 장이모, 펑샤오강 등 중국의 일선 감독들도 각기 취향은 다르지만 공공연히 한국영화를 칭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현재 베이징영화학교에서는 한국영화연구소 설립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한 ‘한류’족은 이러한 대중가요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의 침투를 두고 모종의 음모(?)가 있지 않았나 하는 진단도 내리고 있다. 현재 진행형인 중국의 ‘한류’ 문화의 중심에는 한국영화가 자리잡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 ‘한류’ 문화의 행방과 한국영화의 미래는 더욱더 밀접해질 것만 같다.

베이징=이홍대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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