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타고 역류해 들어오는 초국가적 금융자본
한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움직임은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문화경쟁력이 21세기의 경쟁력이란 단순한 화법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로 수출되고 중국, 일본에서 김희선, ‘욘사마’가 인기를 얻는 한류열풍은 우리의 대중문화가 국제적 경쟁력을 가지고 아시아권역으로 확장되는 것(마치 한국의 ‘쥬라기 공원’처럼)으로 보이지만 그런 표면적 현상의 이면인 ‘자본’으로 논점을 이동시켰을 경우 몇 가지 새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한류 열풍을 가장 큰 마케팅 포인트로 삼고 있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는 아시아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과 초국가적 자본이 만나 만들어진 영화로, 아시아 각국이 가질 수 있는 지역적 특수성을 스타시스템을 통해 통합시키는 서사적 국제화와 국제금융자본을 투입하는 산업적 국제화, 두번의 ‘국제화’를 노린다.
완성보증보험- 스크린쿼터 뚫고 국제금융 합법적 유입 아이필름과 에드코필름이 공동제작한 <여친소>는 ‘완성보증보험’(completion bond)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만들어졌다. 완성보증보험은 영화의 완성에 대한 보증을 보험회사로부터 받아 투자자의 손해를 보전해주는 제도로, 제작을 맡은 프로듀서가 시나리오와 제작기획서를 보험회사에 제출하면 보험회사가 심사하여 보증여부를 결정하고,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보증을 통해 금융권에서 제작비를 대출받는 방식을 취한다. <여친소>는 미국 완성보증보험회사 ‘시네파이낸스’로부터 완성보증보험을 받아 LA 소재 프랑스계 은행으로부터 제작비 350만달러를 투자받아 제작된 영화이다.완성보증보험은 제작단계에서 투명성을 보장받고, 영화의 ‘완성’에 대한 부분을 보험회사로부터 보증을 받은 뒤 그 보증내용으로 금융자본을 투자받는 형식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완성’이라는 부분인데, 이 규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시사점이 발생한다. 완성보증보험은 안정적으로, 혹은 투자자들의 심리를 안심시키고(보험회사의 보증이 있으므로)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사고로 인해 완성되지 못할 경우 제작사쪽의 책임을 덜어준다는 측면에서 제작사의 안정적 제작구조를 지원하는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 완성을 위해 보험회사가 프로덕션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과, 연출 부분이 아닌 제작과정에서 보험회사쪽이 개입하게 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합리적 제작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데 투입된 자본이 투명하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보험회사의 감독은 제작환경에서 자본의 흐름을 투명하게 만든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국제 금융자본에 의한 시스템 장악을 효과적으로 용인한다는 점에서 막강한 포섭력을 가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질서로의 재편을 우려하게 만든다. 노엄 촘스키는 금융자본의 사회투여를 위한 변형된 형태가 신자유주의를 구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설명한다. ‘금융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형태’인 완성보증보험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의 우리가 그토록 (스크린쿼터를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문화예술 분야의 합법적 국제금융의 진입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위험요소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 <여친소> 개봉을 앞두고 홍콩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있는 전지현과 장혁.
스타시스템- 민족적 서사의 장벽을 넘어서려는 욕망
자본은 각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으로 인한 장벽을 없애고 막강한 자본 질서 안에 재편시킨다. <여친소>는 초국가적 영화자본이 동아시아 관객을 신자유주의적 구조 내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할리우드에서 가장 즐겨쓰는 방법인 스타시스템을 도입하여 재현한다.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스타를 기용하여 영화가 배급, 상영되는 각 지역의 특성을 넘어서고 보편적 감수성에 호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스타의 클로즈업을 이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많이 즐겨 사용된 재현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홍의 여왕>에서 마를렌 디트리히라는 스타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진홍의 여왕>은 마를렌 디트리히를 가장 중요한 소품처럼 다룬다. 영화 속에 많이 등장하는 클로즈업은 영화의 내러티브에 연결되어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으로 인해 영화의 내러티브에 공백이 생기며, 그 순서대로 영화는 다시 진행된다. 군데군데 디트리히를 클로즈업으로 잡는 장면에서 변화하는 시점마다 디트리히의 변화된 모습을 화면 전체에 포착해냄으로써 동시에 하나의 독립된 프레임처럼 기능하게 하는 것.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력임에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순간만큼은 영화의 서사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다. 스타시스템과 클로즈업은 지역별로 차이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서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다. <진홍의 여왕>과 마찬가지로 <여친소>에서 전지현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재현된다. 과다하게 쓰인 전지현의 클로즈업은 서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시각적 스펙터클로 존재함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을 보고자 모이는’ 사람들에게 다채롭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초국가적 영화자본이 투입되는 데 있어 스타는 각각의 다양한 민족적 서사구조에 익숙한 관객에게 시각적 욕망의 충족이라는 방식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여기서 로컬은 거세되며 자본의 특성과 맞는, 그리고 할리우드의 유사-대당 개념으로 자리하고자 하는 동아시아 금융자본의 투입이 시작되는 것이다.
PPL- 연출에 개입, 소비 선택권 박탈
<여친소>는 ‘전지현 CF 확장판’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런 상업자본의 투입은 연출 외적인 부분, PPL이나 마케팅에서 마치 신자유주의가 부르짖는 노동의 유연화처럼 ‘연출의 유연화’의 영역까지 건드리고 있다. <여친소>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라는 전가의 보도 앞에서는 어떤 규제나 정부의 개입, 하물며 노동까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다. <여친소>에는 여러 가지 상업적 코드들이 등장한다. 그 어떤 영화보다 많은 형태의 PPL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은 ‘투명하게’ 영화 속에서 어떤 자본이 투입되었는가가 잘 드러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규제철폐 등을 기치로 걸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여친소>에서 연출이라는 ‘노동’의 유연화를 그 기치로 하고 영화 전면에 개입한다.
문제는 그런 활동들이- 물론 <여친소>의 경우는 직접적인 노출로 인해 그 효과가 반감되었으나- <여친소>가 PPL 등을 통한, 자본의 일대일 시각적 재현과 그 시각적 세계 속에서 관객을 영화의 소비가 아닌 상업이미지의 소비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부르디외는 “노동집단들은 예컨대 임금과 근속기간을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개인별로 결정하는 것 및 그 결과로서 수반되는 노동자의 원자화를 겪고 있다”고 말하며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낸 집단체들 즉 노동조합, 사회운동단체, 협동조합들이 목표물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 가족이라는 집단주의적 구조물조차도 연령계층에 따라 시장이 분단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통해서, 소비에 대한 자신의 ‘집단주의적’ 통제권의 일부분을 잃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PPL은 CF와 달리 관객에게 거부할 만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극장에 앉아 있으면 그냥 보아야 한다- 소비에 대한 ‘집단주의적’ 선택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 전지현을 보기 위해 홍콩공항으로 몰려든 팬들. <여친소>는 무엇보다 스타의 힘에 의지한 영화로 보인다.
초국가적 자본이 개입하는 통로로서의 한류
동아시아의 국제 금융자본은 보통 세계은행이 모여 있는 홍콩(서구자본의 아시아 집산지)을 거쳐 일본을 경유한 뒤 동아시아에 투자된다. <여친소>의 자본경로도 이와 흡사하다. 빌 콩이 대표로 있는 에드코필름(홍콩)에서 ‘미국계’ 회사의 완성보증보험을 들고, ‘프랑스계’ 금융자본을 끌어들인 <여친소>는 스크린쿼터라는 ‘외형적 규제’에 갇혀 있는 한국영화에 초국가적 자본이 개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가 ‘시장’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약이 되는 모든 조건들을 시장가치 아래 종속시키는 추상화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이런 초국가적 금융/상업자본은 고도의 폭파장면과 초국가적 아이콘으로 변모하는 스타의 얼굴, 그가 소비하는 상품을 통해 영화 내적으로 관객을 포섭하고, 초국가적 금융자본의 소비자로 관객을, 한국영화를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영화 외적으로 개입한다. 한국영화의 국제화 프로젝트 <여친소>는 한류라는 혈관 속에 어떤 혈액이 흐르는지, 그 혈액인 자본은 어떤 방식으로 수혈되는지의 메커니즘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더 많은 논의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