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류열풍 진단 [9] - 한류의 정치석, 산업적 함정을 넘어서는 길
2004-07-13
글 :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동아시아에 평화문화 벨트를 형성하라

황금꽃이 달린 절풍모를 쓰고,
백마를 이끌며 잠시 멈칫 돌아
펄럭펄럭 넓은 소매 날리는
바다 동쪽에서 날아온 새와 같구나.
金花折風帽/白馬小遲回/翩翩舞廣袖/似鳥海東來
<高句麗, 李白>

최근 한류의 자장이 일본에까지 강력하게 미치는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류스타들의 일본에서의 약진을 두고, 일본 문화는 이미 역동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가 먹히는 것이라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한류를 가져간 NHK의 막대한 순익에서 확인되듯이 일본 문화자본이 일본색의 탈색과 해당국의 아이돌스타 육성 등 지역의 문화자원을 이용하여 동아시아를 파고드는 정황을 놓고보면, 우리 한류스타들이 그 구도상에 정확하게 편재되고 있음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그것이 일본 정부의 신대동아공영권 구상과 교묘히 결탁하면서 패권적으로 지역전략을 구사해가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한류, 일본 점령’, ‘한류 홍보대사 임명’ 등 우리 사회가 한류를 둘러싸고 벌이는 야단법석이 참으로 허접한 수준임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의 세계화, 문화자본의 세계분할구도에 -우리도 명함 한장 내밀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 부여잡고 감지덕지할까.

신대동아공영권 구상에 포섭된 일본 내 한류그러나 이렇다 할 자원이 부재한 현실에서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문화산업화의 강행을 매도만 할 수는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여름 십대스타들을 대동, 베이징에서 개최한 ‘사스퇴치기념위안공연’만 해도 그렇다.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사스라는 국가적 위기를 잘 극복해낸 중국에 대한 위로의 표현이었지만, 의료진들을 위문하는 자리에 우리 십대스타들이 등장, “오래간만이에요. 많이 보고 싶으셨죠”, 다른 중국 가수들이 의료진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구해주어 정말 고맙노라고 진심어린 인사를 하는 반면, 우리 십대가수들은 그 자리의 성격도 모르고 하나같이 자신을 얼마나 보고 싶었냐는 물음으로 일관하였으니, 막대한 자금과 공력을 기울이고도 위문을 빌미로 한류 선전하러 온 것 아니냐는 중국쪽의 의혹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우리 수준이고, 그렇게라도 중국에 우리를 각인하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힘들다는 것이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의 강박인 것을.

이처럼 난감하기 짝이 없는 한류의 현주소라. 최근 대만에서 한류스타들이 인기 확인과 돈벌이에만 연연, 대만 문화에 대한 이해나 요구에는 관심이 없다는 비판 속에 한류 열풍이 잦아드는 추세로 접어들었듯이, 지금의 한류 국면은 경제논리와 기능적 대처방식으로 문화산업규모 늘리기에 급급하여 진정한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간과, 한류의 계기성을 오히려 상실하고 있는 어려운 형국이라 하겠다. 따라서 한류의 겉과 속, 정면과 반면을 제대로 짚어내고 이후 행보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아닌가 한다.

거대 문화자본들이 기획·조직하는 문화산업버전

확실히 한국과 동아시아의 21세기 문화적 관계망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조장되고 있다. 한류란 결국 이들 거대 문화자본들이 기획·조직하는 문화산업버전인 것이다. 그러나 “고려민족이 특유의 강인함과 근엄한 정신으로 21세기에 올린 개가”라고 평가되는 한류, 거기에는 주변부적 비판성이 나름의 문화적 해석력으로 생동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끊임없이 사이, 틈새(間)를 사고하도록 요구받아왔다. 따라서 틈없는(無間) 틈을 찾아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자기존재양식을 새로운 관계성 속에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오랜 변방살이의 곤혹스러움, 그 부단한 긴장과 강박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어가는 변방적 삶의 방법론을 체화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작금에 동아시아에 흐르는 한류 또한 그러한 형질을 어떤 형태로든 내재하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 한류가 동아시아의 구래의 불행한 관계성을 지양하고 새로운 관계지향을 만드는 문화적 온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하철 1호선>의 베이징 공연에서 진정한 한류가 왔다고 환영해 마지않았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식민지·분단의 참혹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형질로 전화된 아름다운 관계지향의 문화가 분명히 존재한다. 지금은 십대가수와 TV드라마 등 대중문화가 주종을 이루지만, 그조차 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국경을 타고 넘어 흘러들다가, 그곳의 부박한 살림살이 구석구석에 오물처럼 함께 흐르다가, 덕지적지한 부유물들을 다 떨어뜨리고 보면 서로의 거울이 되고(明鏡止水), 그리 비추다보면 타율적 근대라는 과거사의 아픔을 서로 보듬고 얼싸안게도 되고, 그러다 오늘의 삶의 어려움이 갖는 문제의 보편성을 확인하기도 하고, 문제의 심연에 이르러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으면 더이상 출로를 찾을 수 없다는 절박감, 그 새로운 관계의 정향(定向)으로 더불어 함께 흐르기, 그렇게 가고 또 흐르다보면 어느새 길이 되는, 희망이란 본래 그런 것이므로.

돌이켜보면 언제 우리가, 혹은 우리 문화가 국경을 넘어 이처럼 무단으로 횡단하고, 회통해본 적이 있던가. 이 회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 한류스타의 팬사이트를 통해서 본 한류의 현재진행은 네티즌들의 발랄한 소통, 그것의 확산과 축적이 새로운 정감적 진지를 만들어가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그 정서적 교감과 그것을 넘어선 문화적 체감이 새로운 동아시아의 지역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기를 넘은 불행한 역사의 그늘은 아직 깊게 자락을 드리우고, 거기 미국의 세계화전략은 물론 신동아공영권, 신중화주의 등 국가주의 환상들이 엄연한 분단살이 60년, 그러나 어쩌면 저 무정형의 문화횡단이 상업주의와 국가주의에 내도록 휘둘리면서도, 그 가시덤불투성이에서도 틈새를, 상처투성이지만 쉼없이 오가며 작은 샛길을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희망 : 발랄하게 소통하는 정감적 진지

민간 단위에서의 상호이해 지반을 넓히는 것이 지역평화를 일구어가는 관건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평화공존이란 곧 우리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따라서 그것의 진정한 구현을 위해 우리 자신이 적극적 추동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에 있다. 민중의 높은 정치의식과 조직화 정도, 치열한 현상타파 의지 등 현재 한국사회의 활력은 동북아는 물론 세계 속에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희망의 진지로 부상하고 있다. 월드컵과 촛불시위, 쌍방향성 인터넷 문화, 그 강렬한 문화적 활력은 우리나라를 역동적인 문화국가의 상으로 부조해가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한류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류는 이제 다시 길잡아 흐르게 해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사회주의의 해체 이후 새로운 문화정체성의 형성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한류가 선택되어졌다. 반면 일본의 경우, 할리우드 스타시스템의 일본 버전이 작동하여 한류의 파장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에서든 한류가 선택되어진 그 지점에 수용주체들의 서로에 대한 개입, 말걸기가 국경을 넘어 이미 시작되었으며, 거기서 새로운 문화적 관계망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이 우리의 착목지점이다. 미디어산업의 합작투자방식이 강제하는 산물이든, 대중의 자발적 소통의 소산이든, 새로운 관계지향의 고리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더구나 그것이 대중의 자발적 구조화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면, 도처에서의 이 발랄한 문화횡단, 이 계기성을 어떻게 일정한 관계지향으로 이끌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 된다. 한류를 자본과 국가의 이른바 ‘상생’이라는 허구적 이해관계에 얽힌 잔영이 아니라 진정한 동아시아의 평화공존이라는 희망의 바다로 흐르게 하는 것, 미적 가치창조의 빛나는 생산의 힘으로 문화적 관계망을 넓고 깊게 만들어가는 것이 당면과제인 것이다.

동아시아의 문화연대로 길을 잡아야

이는 한류의 장력이 미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의 문화교류를 문화적 연대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일본의 신대동아공영권이나 중국의 신중화주의의 패권전략과 달리 우리는 평화지향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깃발만 들고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고 우리의 목적지향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대등한 관계지형들을 동남아와 외몽골 등 주변을 확보해감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동남아시아와 외몽골, 러시아를 잇는 평화문화 벨트의 형성이 그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우리 민족의 존립의 문제로서 평화공존을 위한 관계의 중심으로서 위치를 부여받고 동아시아의 중심과 주변의 중층적 구조형성을 주도해갈 필요가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을 평화의 지향 속에 문화적 관계망의 거점으로 위상짓고, 동북아에서는 외몽골을 유라시아대륙을 잇는 평화문화의 관계망의 거점으로 확보하고, 러시아의 엄청난 문화자원과 문화수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주선과 부선의 다양한 관계망 형성으로서 기존의 한·중·일에 국한된 관계형성의 문제를 넘어 새로운 동아시아 구도를 세워가야 할 것이다. 물론 거기서 한·중관계, 위의 동력을 기반으로 그것을 얼마나 대등하게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사의 진보를 이끄는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구상과 기획들이 이라크 파병이라는 작금의 난맥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한순간에 무산은 고사하고 민족의 자존 또한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져 회생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것임을 새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