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되는 한국영화 30편 넘어
그렇다면 영화는? 올해 일본에서 개봉되는 한국영화는 30편을 훌쩍 넘는다. 몇주씩 상영이 보장되는 블록부킹시스템을 감안하면 하루도 한국영화가 걸려 있지 않은 날이 없는 셈이다. 같은 날 두편 개봉도 드문 일이 아니다. <스캔들…>과 <조폭마누라>, <실미도>와 〈4인용 식탁>, <태극기 휘날리며>와 <고양이를 부탁해>가 같은 날 극장에 걸렸다. 콧대 센 도호를 제외하곤 3대 메이저인 도에이, 쇼치쿠도 움직이고 있다.
지금의 한국영화 ‘개봉 붐’ 앞에는 몇편의 영화가 있다. 2000년 <쉬리>가 대중적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면 그 전해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일본 영화계에 한국영화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도쿄국제영화제의 아시아부문 디렉터 데루오카 소조는 “한국영화를 색다른 게 아니라 ‘공통의 문화’로 수용하는 데는 <쉬리>보다 〈8월의…> 등장이 의미가 컸다”고 말한다. 그전까지 한국영화는 아무튼 ‘어두운 분위기’였다. 80년대 소수에게 ‘창호 형제’(일본에선 이장호와 배창호의 이름 발음이 같아 형제라는 소문도 있었다)가 허우샤오시엔 등과 더불어 ‘아시아의 뉴웨이브’로 인식됐지만, 여전히 한국영화의 절대다수는 “조선시대 배경, 불쌍한 여자, 여자를 때리는 강한 남자”(몬마 다카시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라는 인상이었다. 몬마는 “〈8월의…>를 보며 처음으로 한국에도 저런 남성이 있구나 싶었다. 또 한국영화는 나이든 배우들의 활약이 없어 깊이감이 적은데 신구의 존재감이 그걸 바꿔놨다”고 말한다.
<쉬리> 이후 일본에서 블록버스터급 개봉을 한 작품들이 몇편 있었지만, 아직 <쉬리>의 기록, 18억5천만엔(관객 126만명)은 깨지지 않았다. 2위 <공동경비구역 JSA> 12억엔, 공식집계가 끝나지 않은 <스캔들…>을 제외하면 <폰>이 8억6500만엔, <엽기적인 그녀>가 4억8천만엔 정도로 뒤를 잇는다. 미국 직배사인 부에나비스타가 배급한 <폰>을 제외하면 한국 대중영화의 이미지는 아직 협소하다. 80년대부터 김기영, 이만희 감독 등을 일본에 소개해온 이시자카 겐지 국제교류기금 전문위원은 “<쉬리> 이후 지금까지 정착된 한국영화 이미지는 할리우드적인 액션, 전쟁의 대작영화 그리고 웰메이드 러브스토리란 두 가지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쉬리>의 인기 요인 중 하나가 김윤진과 한석규의 멜로라인 부각이었다. 한국의 메인포스터가 한석규만을 내세운 데 비해 일본에선 김윤진과 한석규가 마주보는 포스터가 사용됐다.
아직까지 인기있는 배우는 일본에서 드라마가 방영된 경우다. <실미도>의 담당자인 도에이의 노무라 도시가 “한국의 톱스타 설경구가 일본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 실미도 사건이 일본인에겐 전혀 생소하다는 점이 선전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시자카는 “이미지를 늘리는 게 필요하다. 특히 한국영화는 젊은 세대가 타깃인 영화가 많은데 일본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극장에 안 간다. 영화사의 1년 라인업을 보면 청춘영화부터 어린이, 노인영화까지 다양하다”고 말한다. “10년 전 홍콩스타의 인기도 지금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런 인기는 5년을 못 가더라.”
물론 기존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뛰어난 연출의 인공적인 맛이 한국전쟁의 본질을 회피했다”(<영화예술>)거나 인물의 비현실성을 지적받긴 하지만,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성취한 ‘울리는 영화’로 받아들여지며 특히 엄청난 스케일과 촬영엔 모두 탄복하는 분위기다. 말 그대로 “아시아의 할리우드 이미지”(평론가 다나카 치세코)다. <실미도>는 설경구, 안성기의 연기력과 출연진의 고른 앙상블이 압도적이라는 평가다. 일본영화가 오락영화와 대중이 이해 못하는 작가영화로 극단화됐다는 반성과 더불어 영화평론가 데라와키 겐의 문화청 문화부장 취임을 계기로 ‘한국에서 배우자’ 식의 논의도 활발해졌다. 하지만 결국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은 이제까지의 이미지 또는 선입견을 깨는 작품들이다. 올해 비평적으로 주목받은 작품은 <오아시스>와 <나쁜 남자> <살인의 추억>이다. 평론가 기타고로 유지는 <살인의 추억>의 평에서 <박하사탕>과 비교하며 “봉준호의 명쾌하며 중후한 연출은 단순한 과거에의 회귀나 역사를 이야기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미해결의 사건, 재앙은 결코 질서의 회복이나 치료가 아니라 사라져가지 않는 흔적=망령으로서 공동체에 계속 달라붙어 있다. 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역사’가 아닐까?”라며 극찬했다. 여배우 중에선 인기는 전지현이지만, 문소리, 배두나가 서서히 진지한 주목을 끌고 있다. “앞으로 문소리의 영화는 놓치지 않으리라”(<마이니치 신문>)거나 “소녀들을 그린 청춘영화 중에서도 저항없는 공감을 획득한 드문 예의 작품…. 배두나는 윤기나고 싱싱하다”(<요미우리 신문>)는 얘기도 결국 <오아시스>와 <바람난 가족> <고양이를 부탁해>의 개봉과 각종 영화제를 통한 <플란다스의 개>의 소개 덕이다. 작은 작품들이 블록버스터식 대작들과 동시에 소개되며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다양화하는 효과는, 요즘 영화저널리즘에서 분명 읽혀지기 시작한다. 이창동, 홍상수와 함께 일본이 주목하는 감독은 곧잘 기타노 다케시와 비교되는 김기덕이다. <사마리아>가 고급(?)영화의 상징이라는 에비스 시네마 가든(우디 앨런 영화는 무조건 이 극장인 식이다)에서의 상영을 타진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에선 어느 지역, 어느 극장에 걸리느냐도 작품의 인상을 가늠하는 잣대다. 큰 규모로 4주냐, 규모를 줄여도 길게 갈 것이냐(<스캔들…>은 7주 이상 전략을 택했다)도 중요하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오락영화로는 정착하기 어렵다
일본에서 블록버스터는 3대 메이저 회사의 극장 체인을 끼워서 동시에 200개 이상 스크린에서 상영됨을 의미한다. <태극기…>는 <쉬리>의 기록을 능가할 것으로 조심스레 예상되지만, 모든 영화가 이런 식으로 공개될 순 없다. 벌써부터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본 영화계의 엄살을 감안하더라도, 때로는 높은 수입가격이 어쩔 수 없이 블록버스터식 배급을 강제하는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다. <키네마준보>에 따르면 2002년 19편, 2003년 26편이 수입됐는데 1작품 평균 가격이 그 사이에만 34만3940달러에서 42만3076달러로 상승했다. <올드보이> <실미도> <태극기…> 등 100만달러 이상 작품도 적지 않다. 몇억엔 규모의 마케팅을 벌이다가 그중 몇편만 실패해도 ‘한국영화는 안 된다’는 인식이 쉽게 퍼져 열기가 식지 않겠냐는 것이다.
도쿄필름멕스의 디렉터 이치야마 쇼조는 “한국영화가 일본에서 할리우드나 일본 오락영화 같은 식으로 정착하는 건 무리”라고 잘라 말한다. 그가 얘기하는 건 프랑스영화식의 정착 가능성이다. 일본에선 여전히 프랑스의 최신 영화가 꾸준히 소개된다. “물론 우연히 한 작품이 대성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춤추는 대수사선2>가 한국에서 큰 호응이 없듯 한국의 인기가 일본에서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질 좋은 작품이 꾸준히 소개돼 한국영화의 수준이 높다는 인식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정착의 길”이라는 것이다. 데루오카 소조는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홍콩영화 붐이 사그라든 가장 큰 요인은 결국 같은 배우, 같은 스타일의 영화가 반복된 탓”이라 말한다. 계속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는 ‘열정’과 장기적인 전략을 생각하는 ‘냉정’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