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류열풍 진단 [3] - 일본 내 한류의 오늘과 내일 (1)
2004-07-13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일본 내 한류의 오늘과 내일

‘친근감’넘어 창조적인 도발로 나아갈 때

지난 6월26일 일본 320여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이틀 흥행성적 규모 1억9천만엔으로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했다. 이날의 주역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전체 스크린의 1/3인 820개관에서 개봉해 단 이틀 만에 18억7천만엔(146만9천명)을 벌어들이고, <투모로우> <트로이>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등 다른 히트작들이 즐비한 상황을 감안하면 분투한 셈이다. 지난주까지 3주간 5위에 올랐던 <실미도>는 최종수익 4억엔 정도로 예상된 반면, 5주 동안 8위권에 머물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117개에 불과한 스크린 수에도 최종 수익예상이 8억∼10억엔으로 나와 “성공했다”는 평가다. 한국영화는 일단 한류의 붐을 타고 일본시장의 정착 길목에 들어섰다. 하지만 아직은 갈림길이다.

한국 붐, 홍콩·인도의 경우와 달라

5년 전 도쿄에서 잠시 살 때 동네 일본 아줌마들이 친근감을 표시하는 얘기는 고작 “김치 먹어본 적 있어요”였다. 올 초 일본에 온 이래 김치 얘기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욘사마’와 드라마 얘기뿐이다. 하긴 대형슈퍼는 한국산 김치를 진열하며 <겨울연가>의 음악을 틀 정도니, 가히 문화와 산업의 시너지(?) 아닌가. <겨울연가> 가발이 불티나게 팔리고 한국어 강좌 교재 판매가 2배 이상 늘었다는 보도나, <겨울연가>를 통해 삶의 기쁨을 찾았다는 80대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코웃음을 쳤던 자신이 뻘쭘해진다. 서점에 깔린 한국 배우들의 잡지 커버는 과다경쟁에 효과가 떨어졌다지만 아직 건재하다. 올 들어 3번 한국 배우들이 표지를 장식한 <키네마준보>는 그때마다 판매부수가 130~150% 늘어났다. 이 잡지가 발행한 <겨울연가로 시작하는 한국어>는 애초 내부 일각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7만부를 팔아치웠다. 최근 장동건과 원빈은 <주간 아사히>와 <아에라>의 표지에 등장했고 이 둘과 배용준, 이병헌 이른바 한국의 ‘4대천왕’의 브로마이드는 잡지들의 인기부록이다. 스포츠신문들은 NHK의 <대장금> 방영결정을 두고 “욘사마 다음은 욘히메(공주)”라고 법석이다(일본에서 ‘용’과 ‘영’은 같은 발음이다). 가요계에서 보아는 확고하며, 윤손하는 일본 연예오락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다. 숨차다. 이런 사례는 끝이 없다.

△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 감독과 배우들이 개봉 홍보차 일본을 방문했다. 두 영화 모두 일본에서 첫주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했다.

10년 전 홍콩, 5년 전 인도 발리우드영화의 붐을 경험했던 일본에서 한국 대중문화 붐은 곧잘 그들과 비교된다. 하지만 뚜렷이 다른 점이 있다. 인도영화가 이국적 문화로 폭발적 관심을 모았다가 급격히 사라진 데 비해 한국 대중문화에의 관심의 바탕은 ‘친밀감’이다. 올해의 붐은 어느 날 하늘에서 욘사마가 내려와 갑자기 시작한 게 아니다. 김대중 정부 이래 일본인의 대한국 의식은 뚜렷이 달라졌다. 일본 정부가 1978년부터 매해 실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가 있다. 한국 항목을 보면 98년까지 올림픽이 있던 88년 딱 한번을 제외하곤 언제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가 ‘느낀다’보다 높았다. 그게 99년부터 역전됐다. 또 다른 항목은 ‘양국 관계’ 부분이다. 교과서 문제 등으로 양국관계가 나쁘다는 대답이 많은 해에는 언제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대답도 급격히 늘었다. 하지만 99년부터는 비록 양국관계가 나쁘다는 인식이 많아도 여전히 친밀감의 비율이 높다. 메이지가쿠인대학 아키쓰키 노조미 국제학부장은 “이런 의식의 변화가 한국 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 계기”라 지적한다. 일본 드라마들이 회피하는 직설적인 사랑표현을 서슴지 않고(그렇지만 세련되게!) 불치병, 이복형제 등 극단적 설정으로 70년대 인기를 모았던 ‘다이에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나이든 일본 여성들이 한국 드라마에 호감을 갖는 이유다.

96년 개국한 케이블채널 KNTV의 변화는 드라마틱하다. 압도적으로 한국계(조선계)가 대부분이던 시청자층은 2002년 일본인 우위로 역전됐다. 정자희 편성팀장은 “TV 아사히의 <이브의 모든 것> 방영, 한·일 합작 <프렌즈> 방영, 가장 큰 건 월드컵이었다”고 말한다. 요즘 KNTV의 시청자는 일본인이 70%다. 정씨는 “일본엔 채널이 넘쳐나지만 콘텐츠는 부족하다. 적어도 1∼2년은 한국 드라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급기야 <후지TV>는 7월5일 시작하는 월요일 밤 9시 연애드라마 <도쿄만 풍경>에 재일동포 여성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이 시간대의 <후지TV> 드라마는 젊은 여성시청자가 주요 타깃으로 인기배우를 기용해 최신의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상징이다. 사회파 드라마도 아니고, 원작엔 재일동포가 등장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한류 붐이 벽을 무너뜨렸다”(<아사히 신문>)는 평가는 과장이 아니다. 한류는 일본에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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