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詩情)으로 가득한 현실의 이면
린 램지를 두고 그저 ‘주목할 만한 신예’라고 말하는 건 어쩐지 좀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은 세편의 단편영화와 두편의 장편영화가 고작이지만, 이들은 모두 독특한 시정으로 가시적인 현실의 표면을 파고들어 그 아래 깃들인 열정과 불안을 건져올리는 마술적인 힘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손쉽게 영화사적 전통에 기대지 않고 조금씩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린 램지는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지나치게 많아진 감이 없지 않은) 영화학교 졸업생들의 그럴싸한 ‘의사-예술영화’가 얼마나 게으르고 안이한 선택이었는가를 여실히 깨닫게 만든다.
영화학교 졸업 작품인 <작은 죽음들>(1995), 그리고 뒤이어 제작한 <소일하기>(1996), <가스맨>(1997)으로 칸영화제 단편부문 및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린 램지는 일찌감치 자신의 재능을 입증했다. 통상적인 영화에서라면 거의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사소한 순간들을 시적으로 탈바꿈해내는 섬세한 연출, 절묘하다 못해 거의 보는 이를 탄복하게 만드는 사운드와 음악의 활용, 어느 순간 인물들의 삶을 온통 사로잡아버리는 외상적 사건에 대한 관심 등 램지의 장편영화를 특징짓는 거의 모든 요소가 이미 그녀의 단편들에 나타나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램지의 딸인 린 램지 주니어는 <작은 죽음들>과 <가스맨>에서 모두 안느 마리라는 이름의 소녀 역을 맡아 연기했는데, 그녀의 시선을 빌려 램지는 무능력하기 짝이 없으며 가정에 무관심한 영국 하층계급 가장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자신의 딸을 다시 한번 안느 마리로 등장시킨 램지의 장편 데뷔작 <쥐잡이>(1999)에서 우리가 예의 그 무능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목도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선의 담지자는 안느 마리가 아니라 그녀의 오빠인 제임스 길레스피라는 10대 소년이다. 무대는 1970년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제임스는 어느 날 친구와 집 주변의 운하에서 장난치다 그만 실수로 친구를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고 만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내성적이고 수줍기 짝이 없는 제임스를 점점 불안의 수렁으로 밀어넣는다. 청소부들의 파업으로 인해 온통 쓰레기로 넘쳐나는 공터와 거리, 술에 취해 있거나 고작해야 스포츠 중계에나 미쳐 날뛰는 아버지,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누이들, 제임스가 연정을 품고 있는 연상의 소녀 마가렛을 괴롭히고 때론 그녀와 놀아나는 이웃의 불량배들, 병적으로 동물 수집에 집착하는 친구 케니 등등 이 모든 것을 피해 제임스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단 하나, 교외에 신축 중인 아파트이다. 켄 로치의 <케스> 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쥐잡이>는 <케스>식의 음울한 톤으로 일관하기보다는 삶의 비천함 속에 깃든 짧지만 강렬한 기쁨의 순간들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영화다. 그런데 <쥐잡이>의 아름다우면서도 절묘하기 짝이 없는 엔딩을 보고 나면, 우리는 혹시 이 모든 것이 이미 죽은 제임스에 의해 환기된 추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도 된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한 평자는 <쥐잡이>를 두고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윌리엄 포크너도 사랑했을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램지의 두 번째 영화 <모번 켈러의 여행>(2002)에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살한 애인- 그의 이름은 <쥐잡이>의 주인공과 똑같은 제임스 길레스피이다. 이것은 일종의 유머라기보다는 전작과는 또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읽힌다- 의 시체를 토막내어 묻고, 그가 남긴 소설을 자신이 쓴 것으로 위장해 출판사에 넘긴 뒤 여행을 떠나는 모번 켈러란 소녀의 이야기이다. <쥐잡이>와 마찬가지로, <모번 켈러의 여행> 또한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모호한 결론으로 끝이 나며, 산 자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이미 죽은 이의 비가시적인 흔적, 그 부재하는 현존이다. 아니나 다를까, 램지는 현재 강간살해당한 소녀의 내레이션으로 구성된 앨리스 세볼드의 베스트셀러 소설 <러블리 본스>를 영화화하려 준비 중이다.